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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출지의 이요당과 안마을의 임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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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출지의 이요당과 안마을의 임씨들

[김유경의 '문화산책'] 경주 풍경 ②

경주시 곳곳에 있는 연못에서 피어나는 연꽃과 가지 끝에 꽃이 매달리는 배롱나무의 붉은 빛은 8월의 무성한 녹음에 대비돼 한 점 열화처럼 빛나보였다. 경주시는 관광객을 불러모으기 위해 봄이면 유채꽃, 여름이면 연꽃, 가을에는 국화 등을 많이 심는데 녹음이 짙은 여름을 위한 조경인지 경주 전역에 배롱나무가 지천이었다. 오며가며 물주전자가 놓인 것처럼 청량감을 주는 연못도 많고 연꽃이 많이 피었다.

그 중 남산자락 남산동 안마을 앞 서출지(書出池) 연못가에서 본 해묵은 배롱나무의 자태는 오래된 못과 정자와 신라 이야기가 어울려 풍류의 한 전형을 그림처럼 보여주었다. 수백년 고목이 다된 목백일홍(배롱나무)은 이요당 정자 가까이 물가에 가지를 늘어뜨린 채 올 여름을 넘기는 중이었다. 몇 백년 된 보기좋은 소나무 향나무도 어울려 연못을 감싸고 서있다.

▲ 해묵은 배롱나무가 있는 초가을 서출지와 이요당. 연못의 연은 너무 오래돼 연꽃도 드물어지고 왕골이 많이 차지했다. ⓒ이순희
▲ 늦 가을의 서출지와 이요당 ⓒ이순희
▲ 연못가의 오래된 소나무들 ⓒ이순희

채색화가 이순원씨는 "이글거리는 한낮, 꽃도 숨쉬기 힘들어할 것만 같은 더위 속 서출지 연못가의 흐드러진 배롱나무와 쇠락한 듯한 세월의 무게를 얹고 있는 정자"를 30여년째 잊지 못할 풍경으로 기억했다. 또 다른 사람은 한겨울 연못물에 남산과 정자가 거꾸로 비쳐 잠겨들어 오는 풍경을 말했다. 봄에 새로 피어나는 남산과 나무들의 풍광을 배경으로 해도, 가을날 주변의 황금색 논밭에 둘러쌓인 마을 앞에 안긴 모습을 보아도 더할 수 없이 편안하고 운치있다.

현종때 사람 임적이 1664년 여기 종택앞 그의 정자이름을 물과 산을 즐길 이요당(二樂堂)이라고 한 것도 이런 사계절의 풍취를 사랑해서였을 것이다. 정자가 없었다면 평범한 풍경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 지금은 이곳에 산과 물의 미학을 부여한 정신의 표상으로 사랑받게 만들고 많은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와 보는 곳이 되었다.

488년 신라 21대 소지왕이 이 연못과 관련된 역사를 남겼다. 까마귀가 왕 앞에 나타나 이곳까지 오게 했다. 연못에서 나타난 노인의 글을 통해 궁 안의 두 사람을 밀고, 거문고 갑속에 있던 승려와 비를 활로 쏘아 죽였다는 역사는 신라의 권력투쟁사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 시절은 불교가 막 유입되었으나 아직 국가적 공인이 되지 않은 상태였고 왕은 백제와 사돈이 되어 협력해 고구려와 싸우느라 군사행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경주에 처음으로 시장을 연 사람이고 할 일없는 사람들을 모아다 일을 시키는 실업자 대책을 강구했다. 비빈도 여러 명 있었지만 죽기 직전 꽃같은 미소녀와의 러브스토리도 따랐다. 그러나 아들에게 왕권이 세습된 것이 아니라 다음 대 신라왕은 그의 사돈이자 인척인 지증왕이 대를 이었다.

학자들은 승려가 이미 궁안에 들어와 있고 영향력이 큰 높은 신분의 여성이 같이 등장하는 것에서 불교와 기존 토착세력간의 죽고 죽이는 갈등을 찾아낸다. 또 소지왕에게 아들이 없었다는 사실에서 왕권계승을 위한 치열한 권력다툼 끝에 희생된 사람들로 보기도 한다.

그 이후 이 연못은 서출지라는 이름이 붙어 지금까지 불린다. 이렇게 아름다운 연못가 풍광까지도 어느 한끝 정치권력에 맞닿아있다고 생각하면 1500여년이라는 세월이 그리 아득하게 보이진 않고 오늘날 무수히 겪는 정치사적 이야기중 하나에 불과한 역사거니 하는 관점이 익숙하게 생겨난다.

무장을 하고 남산서 내려온 등산객 두 사람이 지나다가 안내판 한 면에 쓴 '열어보면 둘이 죽고, 안 열어보면 하나가 죽는다' 는 글귀를 보고는 "엣! 뭐가 둘이 죽는단 말야." 하고 싱겁게 지나간다. 서출지의 자세한 내용을 몰랐던가 보다. 게시판에 그 글귀를 옮겨놓은 경주시장 서명을 보니 488년 신라시대에 소지왕에게 글을 전달한 노인도 그 당시의 경주시장쯤 됐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이 생겨났다.

둘레가 200m되는 연못은 배를 띄울 정도로 크지는 않다(약2천1백평). 언덕에는 고목옆에 죽 둘러심은 배롱나무가 20여년 세월에 엔간히 컸다. 그러나 연은 지금 사람들이 기억하는 한 한 번도 새로 갈아심지 않아서 노쇠해졌다. 왕골이 가장자리부터 치고 들어와 연을 을러대듯 하고 올해도 연꽃은 어쩌다 한두개 피었을 뿐이다. "여기 연밥은 먹지 못하는 너무 노쇠한 것이요." 라고 동네 할머니가 말했다. "2011년에는 모두 갈아엎고 새로 심을 거라 하대. 여기 연꽃과 목백일홍(배롱나무)이 같이 꽃피면 볼 만해요."

그래도 밤새 오무라 들었던 연잎이 햇빛을 받으면서 펼쳐지며 이슬이 구르는 것이나 커다란 개구리들이 첨벙 첨벙 물속으로 뛰어들고 물살이 갈라지는 모습, 마른 연밥이 삐죽이 뻗쳐있는 풍광도 아름답게 보인다. 하늘은 새파란데 뭉게구름이 떠가고 400년 된 이요당의 문은 이즈음 이용하는 이가 없는지 굳게 닫힌 채 조각처럼 떠있었다.

▲ 이요당 주인 임적의 후손들이 많이 사는 안마을의 9월말 풍경 ⓒ이순희

정자 뒤로는 임씨들이 모여 사는 안마을이 펼쳐진다. 수십년 전까지 임씨네 종택이었던 커다란 한옥은 한번 남의 손에 넘어가고 난뒤 1972년부터 무량사 절이 되었다. 1200평 대지에 우물과 안채 등 옛집의 흔적이 아스라이 남았다. 말 서너필을 넣어두던 마굿간 건물은 찻방이 되어 신자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옛날 부자 집에 말 서너필은 예사로 매두었겠지. 지금도 집집이 차가 몇 대씩 있는거나 같지. 종 앞세우고 타고 다니는 거지. 사랑채 건물 몇 개는 뜯었어요."

임적이 연못에 20평 정도의 기역자 건물 정자를 들인데도 아마 이런 부의 배경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 임씨 종택은 지금 절이 되어 대문도 일주문이 되고 왼쪽의 마굿간도 개조되었다. ⓒ이순희

절에는 전엔 신자가 많았다가 지금은 법회 때면 동네 사람 20명 정도가 모일 뿐 평상시엔 스님이 없고 그 자리엔 지팡이만 대신 놓였다. 절을 지키는 배광길씨(71)는 "시내에는 한달에 한 두번 나가요. 옆에 정강왕능 헌강왕능이 있는데 여기 경주 소나무는 모두 휘었어요. 이 동네는 시끄러울 때가 없고 늘 조용한데 심심하면 염불도 하고 그러지요. 일 없는 사람끼리 공원에 모여 남의 말하며 떠드는게 싫어 이리와 지냅니다."고 했다. 탑 바닥에 개구리와 두꺼비 조각이 있었다. "눈 툭 튀나온건 개구리고 들어간건 두꺼빈데 스님이 한거다."

종은 법회때 친다고 했다. 이곳 안마을에 들리는 음향이 어떤 것들일지도 대략 짐작이 갔다. 마당엔 석류와 모란 금잔화 등이 심겨 향기로왔다. 별로 꾸미지 않은 마당은 천연스러운 시골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이요당은 임씨 문중 사람들이 많이 모일 때 열고 들어가 모임을 갖는다고 한다. 정자 뒤로 펼쳐진 안마을은 양지바른 남향에 햇볕을 담뿍 받는 논밭이 드넓어 풍요로와 보이고 소나무가 청청한 뒷산으로 올라가는 길이나 정자나무와 우물, 끝없이 이어지는 골목길의 감나무와 비어있는 외양간 등이 편안한 옛 마을의 전형같았다. 이 분위기에 끌려 여기와 한가로이 살고싶어 하는 외지인들이 많다고 한다.

▲ 이요당 뒤 안마을의 길 ⓒ이순희

▲ 안마을과 재실 사이에 남은 우물과 정자나무 ⓒ이순희

그래도 40여 가구 남짓 임씨네들이 많이 사는 안마을에서는 집을 여간해 사고팔지 않고 휴가 때 도시에서 오는 자녀용으로 비워둔다고 한다. 가을걷이한 물건도 이웃이 뭐가 없다고 하면 거저 갖다주어도 내다 파는 일도 없이 지내는데 모두 유복한 편이고 '인심이 좋다'고들 했다. 새집들이 많이 들어서서 오래된 집들과 나란하지만 별 거부감없이 어울려 보였다. 그리고 다른 마을에 갔을 때야 비로소 이런 조화가 얼마나 세련된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았다.

▲ 안마을 풍경. 조용하기만 하다. ⓒ이순희

밭을 한참 지나고 감나무 담 길을 따라간 옆동네는 재실마을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약간 도시화된 1970년대 동네 분위기가 만연했다. 된장을 파는 집도 있고 집들은 예스런 맛이 덜했지만 활기가 있어보였다. 여기서는 "저 앞 탑동네로 가면 말도 못하게 좋은 집들이 많다."고 했다.

그러나 끊이지 않는 길로 탑동네에 들어서면서는 아연실색했다. 새로 지은 큰 기와집들이 많이 있는데 대지를 짓누르듯 덮어 새까만 기와지붕과 대문만 압도할 비례로 다가설 뿐 다른 여유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곳이 좋아 이사 온 부자들이 기와집을 많이 지었다고 했다. 그러나 무조건 크기만 하면 좋다고 생각한 건축이나 왜색이 물씬한 회벽 담벼락 등을 보면 이들이 그렇게 지어달라고 주문했다기 보다 지방의 아류건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도 논밭이 넓고 마을 전체는 매우 여유있어 보였지만 길 몇 개를 두고 어떻게 이렇게 분위기가 차이날까 하는 것과 이런 분위기가 이긴다면 조만간 한국의 전통미는 지방에서조차 완전히 파괴되겠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오랜 역사를 지닌 곳에 있다고 한옥건축이 저절로 세련되는 것도 아닌듯 했다.

▲ 이 일대에 새로 지은 한옥들은 하나같이 단색의 회벽으로 담을 쌓았다. 일본 절 분위기가 났다. ⓒ이순희

이곳에서 길을 잃었다. 지나가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한 얌전한 부인이 장을 봐들고 오는 듯 걸어와서 '서출지 연못을 어느 길로 가는지' 물으니 "글쎄... 서출지는 모르겠고 저쪽에 뭐 연꽃 심어진 데가 하나 있어요." 했다. 작은 연못에 연이 우거져 있었다.

▲ 1664년 건축된 이요당에서 본 서출지 ⓒ이순희

그런데 알고 보니 삼국유사에 나오는 서출지는 조선시대 건물 이요당 있는 연못이 아니라 이곳 탑동네에 있는 볼품없어진 연못 양피지가 맞을지 모른다는 설도 있었다. 그 부근에 신라의 탑이 두 개 있는데 짝짝이였다. 외국인 비구니스님 두분이 '칠불암 가는데 거기 지금 주지스님 있느냐' 고 물으며 지나갔다. 오리고기 파는 간판 큰 음식점들 앞으로 나오니 다시 서출지가 보였다.

이곳이 그렇게 사랑받는 이유는 자명해 졌다. 다시금 정신을 쉬게 해주는 연못과 나무와 정자를 보며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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