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 수해 지원 차원에서 5000톤의 쌀이 북한에 배송될 예정이고 이산가족 상봉과 더불어 추가 쌀 지원이 논의될 수 있는 시점에 이러한 발언이 나왔기 때문이다. 아마도 대규모의 쌀 지원은 어렵다는 정부 내 기류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북한에 지원한 쌀이 군량미로 전용됐다는 명확한 근거가 어디 있느냐며 정부측의 말흘리기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북 지원 식량이 군량미로 전용된 명확한 근거가 없지 않느냐는 문제 제기는 대북 지원 식량이 군량미로 전용되지 않았다는 명확한 근거가 없지 않느냐는 질문 만큼이나 소모적인 문제 제기로 보인다.
▲ "북한이 100만톤의 전쟁 비축미를 보유하고 있다"고 말해 대북 식량 지원에 대한 찬반 논쟁에 불을 당긴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뉴시스 |
결국 대북 식량 지원의 논점은 지원된 식량이 군량미로 전용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정도의 군량미 전용을 감수하고라도 대북 식량 지원을 계속할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필자는 식량 지원을 계속해야 한다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대북 지원 식량의 일부 전용을 감수하고라도 식량 지원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는 이렇다. 첫째, 지금은 삼국시대처럼 적군의 군량미를 바닥내서 전쟁에 승리하는 시대가 아니다. 남북 간의 전쟁은 다시는 없어야 되겠지만, 혹시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군량미의 유무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갈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북한군으로의 일부 식량 전용이 있다 하더라도, 남한의 식량 지원으로 조금이라도 북한 주민들의 굶주림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식량 지원은 계속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둘째, 대북 식량 지원은 장기적으로 북한 주민들의 '자발적 대남 통합 의지'를 북돋우는 중요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사람은 보통 가장 어려울 때 돕는 사람을 잊지 못하는 법이다. 북한 주민들의 굶주림 문제를 해결해주는 대북 식량 지원은 언젠가는 있게 될 남북 통합의 시기에 북한 주민들이 스스로 남한과의 통일을 선택하게 하는 중요한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 남한은 매년 40만~50만 톤 정도의 식량을 북한에 지원해왔다. 이렇게 지원된 식량 가운데 실제로 얼마 정도가 북한 주민들에게 분배됐는지는 모르나, 남한의 식량 지원이 대남 적대감을 완화시키고 '남한이 북한을 도와주고 있다'는 인식을 북한 주민들 사이에 확산시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글자가 찍힌 쌀포대가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사용되어도 별로 이상할 것이 없도록 만든 것이 지난 쌀 지원의 성과였던 것이다.
대북 식량 지원이 가져다 줄 수 있는 효과인 '자발적 대남 통합 의지 조성', 즉 언젠가는 있게 될 통일의 시기에 북한 주민들이 남한과의 통합을 스스로 선택하도록 만드는 작업은 통일 과정의 문제점과 통일 이후의 후유증을 최소화하기 위한 전략적인 차원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먼저 북한 주민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남북한 통합이 결정될 때 통일 과정에서 우려되는 국제적 간섭을 최대한 배제할 수 있다. 남북한 공히 유엔의 독자적인 회원국이라는 점이나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볼 때, 한반도 통일의 문제는 남북한의 문제일 뿐 아니라 국제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북한 주민들이 스스로의 결정으로 남한과의 통합을 결정한다면 주변국들의 개입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질 수밖에 없다.
통일 과정에서 우리가 우려하는 시나리오 가운데 하나가 중국의 개입 가능성인데, 북한 주민들이 민족 자결의 원칙에 따라 남한과의 통일을 선택한다면 중국은 북한에 개입할 정당성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2차 대전의 전범국으로 통일 추진 과정에서 주권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독일의 경우도 동독 주민들의 자발적인 통일 의지가 통일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90년 3월 동독 최초의 자유선거에서, 동독 주민들은 '동독이 서독에 편입되는 방법'으로의 조속한 통일을 주장한 기민당 등 독일 동맹에 압도적인 지지를 몰아줌으로써 서독과의 통합 의지를 강력하게 표출했다.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등 전승 4개국도 결국 동독의 민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서독의 외교적 노력이 적절하게 가미되면서 독일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빠른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통일이 북한 주민들의 자발적 선택에 의해 이뤄져야 하는 또다른 이유는 통일 이후의 후유증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독일의 경우 동독 주민들의 자발적 선택에 의해 통일이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통일 이후의 후유증이 만만치 않았다. 동독 사회의 자유민주주의로의 개조가 이뤄지면서 동독인들은 대체로 재교육의 대상으로 전락했고, 동독 사회 전반에서 서독인들이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동독인들의 불만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통일 당시 동독인들이 기대했던 경제수준의 향상은 생각만큼 빠르게 진행되지 않았다.
▲ 독일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의 흔적이 남아 있는 베를린 포츠다머 플라츠 전철역 앞의 모습. .ⓒ연합뉴스 |
2008년도에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서는 전체 독일인의 반 이상이 통일이 많은 단점을 가져왔다는 데 동의했으며, 동독 주민들의 60% 이상이 자신들을 서독인들에 비해 2등 국민으로 느끼고 있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자발적 선택에 의한 통일이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후유증이 예상외로 심각하다는 것인데, 만약 서독이 동독을 일방적으로 접수하는 형태로 통일이 이뤄졌다면 독일내의 불안정 정도가 얼마나 심각할 것인지 예상하기가 쉽지 않다.
남북한의 경우도 자유민주주의로의 통일이 불가피하다고 본다면, 통일 이후 북한 주민들이 겪게 될 혼란과 박탈감이 어느 정도일지는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자유민주주의로 체제가 바뀌는 이상 북한 사회 개조의 상당 부분은 남한 사람들이 주도할 수밖에 없고, 북한 사람들은 이전의 북한 사회에서 무슨 역할을 했든간에 자신의 능력에 맞는 적절한 위치를 차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동서독의 경제격차보다 훨씬 큰 남북 간의 경제격차를 볼 때 통일이 되더라도 남북 간의 경제격차가 단기간에 줄어들기는 어려울 것이다. 북한 주민들로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통일이 바람직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될 것이고, 이는 사회 불안 등 통일 후의 극심한 후유증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통일 후 북한 주민들이 겪게 될 이러한 불만이 사회 불안으로 이어지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남북한의 통합이 적어도 북한 주민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 북한 주민 스스로의 뜻으로 남한과의 통합을 결정했을때만이, 북한 주민들이 어느 정도까지는 통일 이후의 후유증을 감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남한이 일방적으로 북한을 접수하는 형태가 된다면 남한 사람들은 점령자라는 인상으로 북한 사람들에게 다가갈 가능성이 높고, 이는 통일 이후의 우리 사회를 극도로 불안정하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
결국 통일 뿐 아니라 통일 이후의 후유증까지 고려한다면 남북한의 통일은 북한 주민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북한 상황의 불안정으로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통일이 진행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최대한 지향해야 할 방향은 북한 주민들에게 '그래도 도움을 주는 곳은 남한'이라는 인식을 지속적으로 유지 확산시켜 결정적인 시기에 남한을 통합의 대상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대북 식량 지원과 보건의료 지원 같이 북한 주민들의 가장 기초적인 생활에 도움을 주는 사업은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정치적 상황의 변화와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추진될 필요가 있다. 일부가 군량미로 전용되느냐의 차원을 떠나 보다 장기적인 전략적 차원에서 식량 지원은 사고되어야 한다.
* 북한학 박사인 안정식 기자는 SBS에서 한반도 문제를 취재, 보도하고 있으며 북한포커스(www.e-nkfocus.co.kr)라는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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