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최근 국무부 고위급 인사와 외부 전문가들을 불러 대북정책 평가회의를 가진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뉴욕타임스>가 오바마 행정부의 새로운 대북 접근 시도를 상세히 보도했다.
"대북 강경파들도 접촉 재개에 동의"
<뉴욕타임스> 인터넷판은 27일 클린턴 장관에 의해 1주일 전쯤 소집된 평가회의에 참석한 당국자들과 외부 전문가들의 말을 전하면서, 미국이 앞으로도 북한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버리지는 않겠지만 북한에 관여(engagement. 또는 '개입' '포용')하는 새로운(fresh) 시도에도 무게를 두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평가회의에서 클린턴 장관은 이제 앞으로 어떤 식으로 북한에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 달라고 외부 전문가들과 전직 당국자들에게 요청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참석 인사들의 말에 따르면, 미국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측과 어떤 형식으로든 접촉을 재개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강경파들(hawks)도 동의를 표했다고 한다.
오바마 정부의 한 고위 당국자는 북한에 대한 추가 압박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뉴욕타임스>는 미 정부가 압박만으로는 북한을 움직이기에 충분치 않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특히 천안함 사건 대응으로 이뤄지고 있는 엄격한 경제 제재와 한미 합동 해상군사훈련을 기초로 하는 현재의 대북정책에 대해 클린턴 장관이 조바심(impatience)을 드러냈다고 말했다.
신문은 새로운 정책을 주장했던 이들 중에는 오바마 행정부의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 대표도 포함된다고 전했다.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국무부 북한담당관을 역임한 조엘 위트는 "문제는 우리가 지금 뭘 할 것이냐는 것"이라며 "그 답은 관계를 재개하는 것(re-engagement)이고 (미국의) 도구함에는 어떤 다른 도구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의 당국자들은 여전히 대북 압박 쪽에 무게를 뒀다. 제프리 베이더 미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은 "우리는 기존의 방식을 바꾸고 싶지 않고, 과거의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길 원한다"며 "우리는 북한의 행동 변화를 추구한다"고 말했다. 다른 정부 관계자는 미국은 압박 전술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압박을 강화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뉴욕타임스>는 매파 분석가들조차 대화가 없으면 전쟁의 위험이 높아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오바마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하는 이들은 북한이 제재 때문에 핵 프로그램과 대남 적대행위를 포기했다는 증거가 거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신문에 따르면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 악화와 후계 문제 등이 있는 상황에서 북한의 정치적 변화가 이뤄질 때까지 미국이 기다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당국자들이 있는 반면, 다른 당국자들은 북한과 대립을 심화하면 앞으로 있을 접촉 기회를 줄어들게 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아울러 분석가들은 중국이 북한을 압박할 용의가 있는지에 대한 오바마 행정부의 확신이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5월 베이징에 간 클린턴 장관이 천안함 사고에 관한 한국 정부의 결론을 수용하라고 중국을 강력히 설득했으나 중국은 북한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한국 정부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부 움직임을 더디게 했다.
신문은 김정일 위원장이 북한을 방문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만나지 않고 중국을 방문한 것은 중국에 대한 경제적·정치적 의존이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신문은 오바마 행정부가 새로운 대북 접근법을 취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우선 대화의 형식과 내용이라고 지적했다. 6자회담이 유용하다는 주장이 있지만, 6자회담 조기 재개에 반대하는 한국과 일본을 설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북한이 핵무기 해체에 동의할 때까지 협상을 하지 않겠다는 오바마 행정부의 비타협적인 태도다. 미 정부 당국자들은 북한이 미국의 양보만을 얻어낸 뒤 또 다른 핵실험을 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핵문제 외의 이슈에서 북한과 관계를 시작하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다른 전문가들은 북한과의 관계에서 핵문제를 피해갈 수는 없다고 말했다.
▲ 지난 7월 한국을 방문해 강경한 대북정책을 천명했던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 그러나 그는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는 대북정책에 인내심을 잃어가고 있다. ⓒ뉴시스 |
클린턴, 기존 대북 라인 外 인물에게 회의 준비시켜
클린턴 장관의 회의 주재 사실은 지난 주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에 의해 처음 알려졌고 25일 필립 크롤리 국무부 공보담당 차관보에 의해 확인됐다.
클린턴 장관이 직접 국무부에서 북한 관련 정책회의를 주재한 일은 드문 일이었다. 그는 특히 제임스 스타인버그 부장관, 커트 캠벨 동아태 차관보, 보즈워스 특별대표, 로버트 아인혼 대북·대이란 제재 조정관 등 기존 대북 라인 대신 앤메리 슬로터 국무부 정책실장에게 회의 준비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현 대북정책을 주도하는 팀의 '틀에 박힌' 정책 보고 외에 신선한 대안을 원한다는 클린턴 장관의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그가 현재의 대북정책에 인내심이 다해가고 있다는 <뉴욕타임스>의 보도와 같은 맥락이다.
미국이 새 대북 접근을 검토하는 이유는 강경 일변도 정책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는 반면 북중관계만 더 밀착시켜 미국의 동북아 전략을 왜소하게 만들 뿐이라는 현실 인식에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이에 따라 오바마 행정부는 추가 대북 금융 제재 조치를 담은 새 행정명령을 이달 말 발표하고 한미 군사훈련을 한 두 차례 더 진행해 한국의 요구를 들어주는 동시에 대북정책 전환을 위한 준비에 착수할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11월 중간선거 전에 북한에 대한 타협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오바마 정부에 부담이 되기 때문에, 새 대북정책은 중간선거 이후에나 본격 추진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오바마 행정부의 이같은 구상에 대해서는 중국도 보조를 맞출 것으로 보인다. 평양과 서울을 방문한 뒤 미·일·러 등을 순방할 것으로 보이는 중국의 우다웨이(武大偉) 한반도 사무 특별대표는 6자회담을 당장 열기 보다는 연말 쯤 회담 재개를 목표로 일단 한반도 상황을 관리하는데 방점을 찍는 외교 활동을 벌일 것으로 관측된다.
그간 미국의 대북 접근을 효과적으로 봉쇄해 왔던 이명박 정부는 이러한 상황 변화에 두 갈래의 접근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우선 이란 제재 참여,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등을 통한 '대미 퍼주기'로 미국의 발목을 계속 잡으려는 시도를 할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정부는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추진하고 6자회담과 천안함 문제를 분리함으로써 향후 정세 변화에 대비할 것으로 전망된다. 외교통상부 당국자는 이미 "천안함 사태와 6자회담 재개는 성격과 차원이 다른 문제"라며 정부 방침이 둘을 분리하는 쪽으로 정리됐음을 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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