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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계형 정치하는 민주당, 추락하는 길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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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생계형 정치하는 민주당, 추락하는 길 밖에…"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 민주당 은수미 의원이 말하는 '노동과 정치'

"어느 날 유명한 외국 테너가수가 세종 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하는데 우연히 그 공연의 티켓을 구하게 됐다. 10만 원이나 되는 공연을 보기 위해 거기까지 걸어가서 그것을 보고 나오는데 너무 행복했다." 여기까지는 그저 클래식을 좋아하는 어느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비밀활동을 할 때라 늘 안전을 위해 서로의 동선을 체크했는데 너무 가고 싶어서 처음으로 알리지 않고 몰래 공연을 보고 왔다(웃음). 늘 돈이 별로 없어서 라면을 먹거나 굶어야 했기 때문에 원래라면 그 티켓을 팔아야 했는데 말이다(웃음). 그러면서 공연을 다 보고 나오는데 '여전히 내가 문화적 격차를 극복해내지 못하는구나'하는 생각에 갑자기 미안함과 자책감이 들었다"가 덧붙여지면 이야기가 살짝 달라진다. 은수미 민주통합당 국회의원의 이야기다.

"사회를 바꾸는 운동에 뛰어들겠다고 최종적으로 결심한 것이 대학교 2학년이었는데 그때 그 결정을 내리기가 너무 어려워서 내장이 다 뒤집힐 정도로 게워냈던, 너무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는 영혼을 바꾸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내 영혼에 검은 상장을 단다'는 느낌으로 운동을 했다." 무엇이 그로 영혼에 상장을 달기까지 고민하게 했을까?

"스스로에게도 질문해보지만, 그 이유는 정확하게 모르겠다. 어렸을 때 인상적인 기억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중학교 2학년 때 사회선생님이 '동일방직사건'을 이야기해주셨던 것과 그분이 추천해 주셨던 조세희 작가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책이었다. 대학에 들어와서 '이게 정말 현실이구나'를 스스로 인정하면서 그때부터 사회적 약자에 관심과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이 의원이 된 지금까지 내 인생의 과정 동안 내내 가지고 온 화두인 것 같다."

그를 보며 영화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혁명을 꿈꾸며 바리케이드를 쳤던 청년들이 생각났다. 그래서 20대 바리케이드를 쳤던 은수미가 지금은 법과 제도를 만들고 있는 국회의원이 되어 있는데 20대의 은수미가 지금의 은수미에게, 50대의 은수미가 20대의 은수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20대의 은수미는 50대의 은수미에게 이야기를 못한다(웃음). 그 이유는 조금 과격한 생각이긴 했지만, 나는 내가 서른이 안 돼서 죽을 줄 알았다(웃음). 20대 초에 운동을 시작했을 때부터 사람이 죽는 것을 많이 보기도 해서 그런지 내가 서른 살 이상까지 살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감옥에서 서른이 되었을 때 얼마나 놀랐겠는가(웃음)."

더불어 "50대의 은수미가 20대의 은수미에게 하고 싶은 말은 "너 참 잘 버텼다. 고문도 잘 버텼고, 구속 생활도 잘 버텼어. 생각한 것처럼 우리 사회가 많이 개선되지는 못했지만 너의 책임이 아니야"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지금도 실수를 많이 하는데 그때는 얼마나 실수를 많이 했겠나(웃음). 그러면 그렇게 가슴이 많이 아팠고, 자책을 많이 했다"라고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를 하는 순간 그와 나의 눈이 함께 빨개졌다.

대선 이후 '소명으로서의 정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다는 그에게 정치인 은수미가 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 찾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솔직히 지금까지는 '정치가 뭐고, 사회운동이나 연구활동과는 어떻게 다른가?'를 잘 몰랐다. 하지만 민주당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깊은 절망과 좌절을 보면서 내가 왜 정치인이어야 하고 어떤 정치인이어야 하는지 그리고 정치가 사회운동과 어떤 점에서 다른지도 깨닫고 있다. 앞으로 내가 정치 활동을 하는 동안은 민주당이 혁신적인 정치조직과 비전을 가진 정당이 되게 해서 다시 국민들의 마음을 얻고, 그래서 다음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를 위한 계획들을 세우고 추진하려고 한다. 그것이 정치인 은수미가 감당해야 할 역할이고, 그것의 기초는 노동이 될 것이다"라고 답한다.

20대에 "치열하게 고민했기에 운동을 시작한 이후론 단 한 번도 뒤돌아보거나 도망가지 않았고,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 당당하게 자기 평가를 했다"던 그가 이제 '소명의 정치'란 새로운 과제 앞에 다시금 자신을 게워내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고 있다. 그의 게워냄에, 그의 치열함에 응원을 보내고 싶다.


▲ 민주통합당 은수미 의원 ⓒ프레시안(최형락)

한국에서 노동 운동가가 된다는 것은 스스로 불편한 삶을 선택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듯하다. 무엇이 은수미 의원을 노동으로 이끌었는가? 어떤 개인적인 계기라도 있었는지 궁금하다.

스스로에게도 질문해보지만, 그 이유는 정확하게 모르겠다. 어렸을 때 인상적인 기억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중학교 2학년 때 사회선생님이 '동일방직사건'을 이야기해주셨던 것과 그분이 추천해 주셨던 조세희 작가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책이었다. 그 두 가지가 한참 정체성이 형성되던 시기에 나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준 것 같다.

또 하나가 그 당시에 내가 살던 신림동의 판자촌에 대한 기억인데 당시 내가 살던 집에서 몇백 미터만 걸어가면 판자촌이었고 친구들이 거의 그곳에 살았다. 한번은 친구 집에 놀러가서 술래잡기를 하다 몸을 밀쳐 벽에 부딪쳤는데 벽에 구멍이 났다. 벽이 스티로폼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보면서 내 친구들의 삶과 나의 삶이 너무 다르다는 게 납득이 안 갔다. 이야기로 듣거나 책을 통해 보았던 현실 세계와 실제 내 친구들의 삶을 통한 본 현실이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는 만연한 인식 속에서 그 때는 '수녀가 되어서 이 사람들을 위해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우리 집이 성공회 집안이라 중·고등학교 때까지 수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 부모님의 반대로 뜻을 접었다. 그 이후 공부만 하다 대학에 들어와서야 '이게 정말 현실이구나'를 스스로 인정하면서 그때부터 사회적 약자에 관심과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이 의원이 된 지금까지 내 인생의 과정 동안 내내 가지고 온 화두인 것 같다. 그냥 그렇게 정착이 돼버렸다.

아마도 어렸을 때의 형성된 기억이 굉장히 오래가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박근혜 대통령이 무섭다고 하는 것인데, 아마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배운 것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할 거다. 나도 어린 시절, 오디오 세트가 있는 중산층 가정에서 피아노를 배우며 클래식을 취향으로 살면서 살던 사람이라 이런 삶의 스타일을 바꾸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럼에도 '사회적 약자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나의 소명은 무엇일까'를 항상 고민하면서 살아왔는데 답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오래 지내다 보니 어느새 노동문제에 천착하는 것이 나에겐 참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자신이 살아온 배경과 활동한 배경이 달라서 주변의 반대가 많았을 것 같다. 그런 상황을 뚫기까지 쉽지 않았을 텐데, 그런 반대들을 어떻게 뚫어냈나?

굉장히 힘들었다. 가끔 '당신이 20대로 되돌아간다면?'이라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절대로 20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내게 20대는 최선을 다했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기이다. 그만큼 힘들었기 때문이다. 스무 살에 처음 서울대 사회학과를 들어갔을 때 그 당시 서울대에서 여성 비율은 굉장히 낮았고, 특히 사회대에서 여성 비율은 10%도 안 됐다. 중·고등학교 때 여학교만 다닌 탓에 대학교를 들어와 보니, 거친 남성들이 늑대처럼 느껴졌다(웃음). 남녀 간의 격차도 컸고, 문화도 달라서 상당히 힘들었다. 또 그때는 '백골단'이라고 불리는 전경들이 학교 잔디밭에 쫙 깔려있었는데, 가끔 전경들에 의한 성폭력 사건도 일어났다. 그런데 심지어 남자 교수들이 '한강에 배 지나가면 자국이 남냐?'라고 이야기하는 게 학교의 현실이었고 이런 무지막지한 현실을 용인하는 상황이 너무 싫었다. 자유도 정의도 없는 그리고 평화도 민주도 없는 심각한 상황에서 청년기를 보낸 것이다. 지금처럼 생계나 일자리에 대한 고민과는 달랐지만 나름대로 고민이 심했다.

그다음에 더 문제가 되었던 것은 선배들이 이야기하는 마르크시즘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해군사관학교 출신 군인이었던 아버지 슬하에서 살아왔던 나의 환경과 여러 사회문제들을 착취와 계급전쟁으로만 인식하는 것이 납득하기 어려웠다. 나에게 마르크시즘은 그 문제들을 해석하는 여러 관점 중에 그중에 하나일 뿐이지 특별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선배들이 그다지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왜 사회대에 들어와서 물을 흐리느냐"는 말도 여러 번 들었다.

옷차림도 문제가 되었다. 처음 대학에 들어왔을 때 스커트를 입었었는데 몇몇 주변의 상황과 분위기 때문에 어느 날부터는 입지 않게 되었다. 아예 색깔 있는 옷을 입지 않았다. 원래 예쁜 것을 참 좋아했는데 그것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것을 피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완전히 태도를 바꾸었다. 구두도 신지 않고 청바지나 짙은 색 바지에 검은색 티셔츠를 입는 방식으로 바꿨다. 예쁘고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고 싶은 내 자신과 매번 싸웠다. 한창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줄임말, 은수미 의원은 1989년 백태웅·조국 교수와 박노해 시인과 함께 사회운동 조직인 사노맹을 결성했다) 활동을 할 때였는데 어느 날 유명한 외국 테너가수가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하는데 우연히 그 공연의 티켓을 구하게 됐다. 비밀활동을 할 때라 늘 안전을 위해 서로의 동선을 체크했는데 너무 가고 싶어서 처음으로 알리지 않고 몰래 공연을 보고 왔다(웃음). 10만 원이나 되는 공연을 보기 위해 거기까지 걸어가서 그것을 보고 나오는데 너무 행복했다. 늘 돈이 별로 없어서 라면을 먹거나 굶어야했기 때문에 원래라면 그 티켓을 팔아야 했는데 말이다(웃음). 그러면서 공연을 다 보고 나오는데 '여전히 내가 문화적 격차를 극복해내지 못하구나.'하는 생각에 갑자기 미안함과 자책감이 들었다.

그렇듯 20대 내내 운동하는 나와 원래 내가 서로 충돌하며 '나는 왜 이 정도밖엔 안 될까.'라는 고민을 달고 살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살아야 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고통스러웠다. 운동을 하면서 정의와 민주를 위해 사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20대 청춘을 보내며 사랑도 마음대로 못해보고 발레나 오페라 같은 내가 좋아하던 것도 감추고 심지어 내가 좋아하던 옷 색깔도 숨겨야 하는 상황에서 살아야 했던 것이 참 힘들었던 것 같다.

이 과정에서 내가 배웠던 것은 끊임없이 스스로에 대해서 반성하는 것이다. 의원이 된 지금도 문제가 생기면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에서부터 왜 내가 의원생활을 하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질문한다. 그러다 보니 내 탓을 과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중에는 더러 남 탓을 많이 하는 사람도 있고 어쩌면 그게 필요한 경우도 있는데, 자신만 탓하다 보니 힘이 빠질 때도 더러 있다. 그래도 어떠한 현실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여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고 생각하며 선택하는 것이 힘이 된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 일들을 스스로 버텨낼 방법이 없다.

92년 '사노맹' 활동으로 6년간 옥살이를 했다. 감옥에서의 시간에 대해 "언제나 저를 살려준 하늘의 뜻이 무엇일까를 묻게 하는, 그런 겸손함을 좀 배운 것 같다"고 한 기사를 보았다. 창문이 없는 독방에서 6년을 지낸 끔찍한 경험을 했음에도, 그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왔을까 궁금했다.

옥살이를 하는 동안 많이 아팠다. 여성으로 감옥에서 6년 정도를 산 사람도 드물지만, 나만큼 아픈 사람도 드물었을 것이다. 두 번이나 수술했고, 폐렴에서부터 폐결핵까지 환경이 안 좋으면 걸리는 질환으로 시달렸다. 동시에 심리적인 문제가 생겨 항상 내가 정상인지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다. 안기부의 남산분실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했을 때의 기억은 꽤 오랫동안 심리적인 타격을 준 것 같다. 나를 고문하는 고문기술자들도 나와 같은 보통 사람들이었는데, 나를 고문하고 잠시 쉬는데 자기들끼리 자식 이야기도 하고 전셋값 이야기도 하고 "오늘 식사로 뭐 먹을까?"하는 이야기도 하더라. 그러고 나서 한 30분 뒤에 다시 고문을 한다. 그때 내가 들었던 생각은 '내가 사람인가'라는 것이다. 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나는 사람이 아니고 그냥 고문을 할 대상일 뿐 인 거다. '내가 동물인가보다'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경험을 벗어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또 그 과정에서 내 입으로 동료들과의 활동을 진술해야 한다는 것이 참 힘들었다. 물론 나는 영화 <남영동 1985>의 고(故) 김근태 선생님처럼 심하게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너무 고통스럽기도 하고, 고문관들이 이미 친구들이 다 진술을 했다기에 "그러면 진술을 한 것에 대해서만 맞는지 아닌지 '예, 아니요'로만 대답하겠다"고 하고 진술을 했다. 고문관들이 친구들이 진술하는 목소리를 녹음하여 들려주는 것도 고통스러웠지만, 녹음 내용대로 그 이야기가 맞는지 틀린지 진술한다는 것이 정말 힘들었다. '나를 비롯해 모든 동료들이 이렇게 무너지는구나, 인간이 참 나약하구나'라는 생각에 절망했다. 나 자신이 용서가 안 되는 것이다.

출소 2년 전 즈음에야 그런 나를 스스로 용서하게 되었는데, 그 덕분에 사람을 참 예뻐하게 된 것 같다. '사람이란 참 약한 존재이고 각자 굉장히 무거운 짐을 가지고 있다. 고문과 같은 강압에 의해 무너지면 누구나 심지어 나조차도 내 뜻과 의지와 정반대되는 대답도 할 수 있다. 그런 나약한 인간이 이나마 버틴 것은 참 잘 살아온 것이다. 그런 인간들이 그래도 민주와 정의, 인권과 평화를 위해 싸울 수 있을 때까지 싸워본다는 것이 참 가상하고 대단한 모습인 거다.' 그렇게 스스로를 토닥이니 갑자기 자유로워졌고, 내가 한결 예뻐진 것 같았다(웃음). 그러면서 나에 대해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무척 관대해졌다.

ⓒ프레시안(최형락)
내 스스로 무너져본 경험을 하면서 들었던 생각은 첫째로 사람들에게 무너질 정도의 힘겨운 삶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사람이 무너지면 반드시 바뀐다는 거다. 사람들의 변화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세 번째로 무너졌음에도, 다시 새롭게 살아나려고 노력한다면 그것이 성공하든 아니든 엄청 많은 칭찬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람이 이렇게 무너졌구나, 무너져 이렇게 변했구나, 그렇지만 이 사람은 이렇게 많이 노력하는구나'라고 감싸 안는 것이 필요하다. 그 당시 내가 참 싫어했던 노래 가사가 '아픈 만큼 성숙해 지는 거야'인데, 오히려 아픈 만큼 무너지는 게 맞고 아파서 성숙해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아프게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지금의 20대·30대에게 가장 미안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것인데, 이 사회가 이들을 아프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사회가 그들을 너무 아프게 하고 무너지도록 만들고 성숙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에 대해 우리가 반성해야지 그들을 비난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아마 이것이 감옥에서 나와서 내 삶의 기조가 되었던 것 같다. 지금도 아파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고통스럽다. 의원이 되어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간혹 잠을 자기 어렵다.

6년이란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고 일상에 정착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감옥에서 나오고 처음 2년 동안은 적응이 안 되고 많이 힘들었는데 그 후에 결혼도 하고 나름 소박한 삶을 살았다. 그런 소박한 삶을 꿈꿨다(웃음). 내 취향대로 옷을 입고, 음악을 듣는 것,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는 것, 말하는 것 모두가 자유로웠고 어떤 것을 해도 내가 크게 거스르거나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더 이상 정치는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2·30대처럼 무엇인가 소명을 가지고 벽에 부딪혀보고 넘기도 하고 혹은 그 벽을 뚫어보려고 하는 일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제는 우리 사회가 옛날에 화염병을 들고 가시 철망을 제거하고 억지로 올라가고 벽을 뚫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될 사회가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그러면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지금까지 노동 연구를 해왔다. 그런데 40대 후반에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라는 반성을 했다.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한 것이 교만한 것이었나, 내 세대가 여전히 책임지고 바꿀 소명이 있는 것인가, 이런 고민이 많았다. 정치인이 되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결론을 내린 것 같다. 필요하다면 벽을 뚫어야 한다고. 소박한 삶을 포기해야 한다고. '또 해야 하나? 좀 지겹다, 힘들다'는 생각도 했지만 이것을 20대나 30대에게만 맡겨 두어서는 안 되고, 결국 20대 때 내가 나의 세대의 문제에 직면했던 것처럼 50대인 내가 내 세대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던 것 같다. 그래서 거부하지 않았고 이 길을 선택했다. 내가 국회의원이 된 것은 그런 시대정신, 역사의식의 발로이자 사회적 주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대선평가토론회에서 발제한 토론문 때문에 많이 비난을 들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렇게 비판을 받는 입장에 서 본 적은 없었을 것 같다. 실제 정치인이 되고 나니 어떤 부분이 가장 힘들고 어려웠나?

의원이 된다는 것은 사생활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되고 나서야 알았다. 좋아하는 친구들하고 만날 시간이 없고 나의 모든 발언이 공적으로 처리되어 오해를 받기도 했다. 정말 어항 속의 물고기 같다. 우리도 이런데 연예인들은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다(웃음). 또 다른 힘든 것 중의 하나는 정치적 비판이다. 노동문제를 연구하다 보면 서로 다른 이해당사자들로부터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는다. MB정부 때 정부와 다른 견해이면 무조건 틀린 견해로 간주되어 온갖 비판과 인신공격을 받았다. 그래서 비판에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치인이 되어보니, 정치적 비판은 전혀 다르다. 내 의견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사 제목만을 가지고 낙인찍히고, 비판받게 된다. 내 의도와 무관하게 해석된다. 처음엔 이 모든 상황이 당혹스럽고 심지어 억울하기조차 했다. 게다가 한번 문제가 터지면 해명이 소용없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것 또한 '정치가 가진 속성, 혹은 정치인이 감내해야 할 일이었는데, 내가 이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초선으로서 아직 내공이 한참 부족하구나' 싶어 반성을 많이 했다(웃음).

지난 대선평가서에 관한 것도 당시 맥락은 이런 것이었다. 나는 민주당 선거 패배의 원인을 자기 당 후보에 대한 전략이 없었던 것으로 보았다. 예를 들어, 국가보안법으로 감옥에 갔던 사람을 후보로 내세우면 그 후보가 '종북 좌빨'로 공격받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를 넘어설 전략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문재인 당시 대선 후보를 선택하면 '친노 수장'이라고 공격받을 터. 이것을 넘어설 전략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전략은커녕 경선 과정을 '친노-비노'로 치르고 대선 후보가 된 이후에는 '노무현 대 박정희'였다. 나는 이런 전략 부재를 비판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내용들을 빼고 '문재인, 친노 수장, 구시대의 막내, 구태'라는 세 문장 정도만기사 제목이 되면서 당의 대선후보를 공격했다는 식으로 해석되었다.

대부분의 정치가 언론을 통해서 구현되기 때문에 정치인의 말이 언론을 통해서 왜곡될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하고, 동시에 언론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경험했다. 다만 개인적으로 문재인 의원에게만은 사실을 제대로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거두절미하고 "발제문을 읽으시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그것이 18대 대선에 대한 나의 객관적인 평가이고, 여러 사람들의 평가이기도 하다. 비록 힘드시겠지만 다른 사람들의 평가도 다 읽어주실 바란다"는 내용을 담아 연락을 했다. 나중에 들으니 문재인 의원에게 어떤 분이 "어떻게 은수미 의원이 이런 평가를 할 수 있냐?"고 매우 서운해 했더니, 문 의원이 "맥락을 보십시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웃음). 그 정도면 제대로 이해하신 것이라 생각하여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 연락을 드리지 않았다.

언론중재위까지 간 사건도 한 번 있다. 대선 전 <중앙일보>에서 내가 음주 국감을 했다고 기사를 낸 적이 있다. 마침 대선이 시작되어 어찌할 수 없어, 대선 끝난 후 언론중재위에 제소하고 동영상을 포함한 사실 자료를 제출했다. 사실이 아니었지만, 언론사 측에서 '정정 보도를 받지 않겠다'고 하여 반론보도를 내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그때도 꽤 힘들었다. 내게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새누리당에서 제보한 대로 기사를 쓴 것인데, 이런 일이 항상 터질 수 있다는 것도 새삼 알게 되었다.

민주당은 총선과 대선에서도 실패했지만, 대선 이후에도 실패하고 있다는 평이 많다. 대선 내내 야권의 맏형임을 자임했지만, 기대어 울 수 있는 맏형은커녕 쓰러져가는 가계를 일으켜 세울 방법조차 모르는 것 같고, 심지어 관심도 없는 것 같다. 민주당을 밀어주었던 사람들은 민주당이 대선 실패를 한 것보다 어쩌면 그 모습에 더 많이 분노하고 실망하는 것 같다. 이제 10개월 정도 민주당을 경험했는데, 민주당의 이런 총체적 부실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대선 이후에 잘 못하고 있다는 데 동의한다. 요즘이 더 절망스럽다. 대선에서 패배한 뒤 석 달이 지났지만 바뀐 게 없는 게 사실이다. 대선 패배 직후 많은 사람들이 낙담하고 분노하고 절망했는데 지금은 그 절망을 넘어서 민주당 꼴을 보고 싶지 않다고 한다. 죽이고 싶다고 댓글을 다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기자들도 민주당 더러 망해야 한다고 하더라. 상황이 심각하다. 물론 5월 4일 전당대회도 있고 혁신위원회나 전당준비위원회도 가동되고 있고 많은 노력은 하고 있지만, 그 조차도 너무 부족하다. 나 스스로도 민주당이 바뀔지에 대해 100% 자신이 없는 경우도 있고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절망감도 크다.

서민을 표방하면서 서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문제를 넘어서기 위해서 노동특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이를 통해 민주당이 노동문제를 우리의 문제로 끌어안도록 나름 열심히 노력했다. 그래서 노동특위를 만들고 27명 정도의 의원들과 결합해서 함께 현장도 다니고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활동도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이러한 활동이 민주당의 혁신에 기여하지도 못하고 민주당의 것으로 제도화되거나 내면화되지는 못했다. 비례 초선은 지역 초선과 달리 당원이나 대의원과 소통하기 어렵다. 당내 선거에서 득표를 조직할 수도 없다. 정책적 기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당직을 맡지 못하면 당 활동에 대한 기여도 하지 못한다. 이런 한계 속에서 초선 비례가 당 개혁을 위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정말 고민스럽다. 또한 초선 비례는 지역구가 없기 때문에 한 번 하고 나면 끝난다. 당을 바꾸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있지만 실제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현실이 나를 더 절망케 한다. '넌 왜 의원을 하니?'라고 끊임없이 자문한다.

옛날에는 민주당이 혁신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요즘은 '정말 혁신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민주당 정치인 중에 상당수가 소명으로서의 정치보다는 생계형 정치 쪽으로 돌아선 것 아닌가라는 의심이 든다. 생계형 정치는 특정한 시대적 소명을 가지고 무엇을 개혁하기 위한 정치가 아니라, 돈과 권력을 위한 정치를 하는 경우를 뜻한다. 소명으로서의 정치가 없어지면 정치적 거래만 남는다. 예를 들어 공천권을 시대정신을 구현할 수 있는 좋은 정치인을 뽑기 위해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자원과 이익을 확대시키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당내 계파정치가 그렇다. 당을 건설적으로 발전시키고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하는 것을 목적에 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 계파의 인물들을 늘려 당내 지배권을 확보하고 권력자원을 확대하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익공천인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밖에서 생각했던 정치와 국회에 들어와 느끼는 정치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다. 지난번 유시민 전 통합진보당 공동대표가 트위터에 정계은퇴 선언을 한 것에 "직업으로서의 정치 아닌 '소명으로서의 정치'가 무엇일지, 남은 자의 고민이네요"라고 남긴 것을 보았다. 정치인 은수미가 되어 소명으로서의 정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찾았나?

솔직히 지금까지는 '정치가 뭐고, 사회운동이나 연구활동과는 어떻게 다른가?'를 잘 몰랐다. 하지만 민주당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깊은 절망과 좌절을 보면서 '내가 왜 정치인이어야 하고 어떤 정치인이어야 하는지', 그리고 '정치가 사회운동과 어떤 점에서 다른지'도 깨닫고 있다. 소명을 가진 정치인으로서 정치활동을 한다고 함은 시대적 정신을 구현하며 그것을 국민의 눈높이와 맞추는, 정치조직과 정당을 만드는 것인데 그것이 중요한 의무라는 사실에 소홀했다. 노동전문가로 대선 직전까지 청문회를 세 건, 정기국회 때 국정감사를 하면서 굉장히 많은 노동 현안을 다루었고, 노동 의제를 사회적 쟁점과 정치적 의제로 만들었다고 스스로 자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치인 은수미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분명한 자각이 없었다. 내가 하나는 알고, 둘은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반성을 많이 했고, 더불어 '아~ 이제 정말 정치인으로서 시작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내가 정치 활동을 하는 동안은 민주당이 혁신적인 정치조직과 비전을 가진 정당이 되게 해서 다시 국민들의 마음을 얻고, 그래서 다음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를 위한 계획들을 세우고 추진하려고 한다. 그것이 정치인 은수미가 감당해야 할 역할이고, 그것의 기초는 노동이 될 것이다. 정치인으로서 아직은 50점 미만이지만 내년 이맘때쯤이면 과락(낙제점)은 좀 면해야 하지 않겠나(웃음). '60점은 넘는 정치인, 나아가 80점에 근접하는 정치인으로 거듭나야겠다'는 다짐을 요즘 많이 한다. 물론 그럴 수 있을지, 간혹은 마음이 너무 무겁다. 친한 의원 한 분이 나더러 너무 무겁다는 평을 하던데 지금 내 상태가 그런 모양이다.

좋은 정당을 만드는 것을 본인이 감당해야할 과제라고 꼽은 것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이런 고민을 초선 의원이 한다는 것이 어떤 면에선 참 아이러니한 것 같다. 사실 앞선 사람들이 해왔어야 했던 질문이 아니었을까. 잘 조직화된 조직 속에 정책전문가들이 들어와서 그들이 마음껏 국민을 위한 정책을 생산해낼 수 있도록 하는 게 원래는 정상 아닌가?

지금 민주당 지지율은 20퍼센트 대이다. 10퍼센트로 떨어질 수도 있다. 그동안 민주당이 좋은 정당 조직을 만드는 것에 대한 고민을 충분히 했다면, 민주당 지지율이 이렇게 낮지 않을 거다. 나 역시 밖에 있을 때 민주당을 많이 비판했지만 민주당이 가진 한계가 무엇인지 잘 몰랐다. 그런데 들어와 보니 알겠더라. 민주당은 실제로 좋은 정당으로서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첫째로, 기간조직이 무너져 있다. 중앙당이든 지역이든 대중과 접촉하는 풀뿌리 조직이 없고 있어도 대부분이 선거에 동원되는 수준에 불과하다. 대중정당이라고 할 수 없다. 대중정당은 단순히 표를 주는 지지자 정당이나 유권자 정당이 아니라 세대든 지역이든 계급·계층이든 간에 자기 기반을 가지고, 그들을 항시적 조직화하고 교육시키고 그것을 통해 민생문제와 현안 문제를 해결하는 힘을 가지고 활동을 하는 정당을 말한다. 여기서는 당원들이 내는 당비가 상당 부분 중요한 자원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기간 조직들이 완전히 무너져 있다. 당원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도 모르고 실제로 당비를 내는 당원도 파악이 안 되어 있거나, 있다 하더라도 얼마 되지 않는다.

또한 당원의 의견을 들을 수 있는 어떠한 소통 구조도 없다. 내가 비례의원이기 때문에 당원의 의견을 못 듣는 것이 아니라, 들을 수 있는 통로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직접 현장으로 간다. 의원이 중요한 이슈를 정할 때 당원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당원의 의견을 들을 수 없다면 전적으로 의원 개인의 결정에 입각할 수밖에 없다. 현재 민주당은 당내 소통구조, 당원과 의원 간의 조직체계가 많이 무너져 있다.

또 하나는 당내 계파정치가 오래되다 보니까 계파로부터 자유로운 가치나 비전을 가지는 새로운 의견그룹이 존재하지 않는다. 계파라는 것이 가치나 비전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공천을 받을까', '어떻게 하면 자기 계파의 권력자원을 확대시킬까' 하는 거래에 의해 형성되다 보니 새로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지난 선거에서 나를 포함한 41명이 반대서명을 했는데, 이것에 대해 곧바로 언론에서는 '친노 주류의 반란'이라고 나오지 않았나.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친노, 비노, 486을 뛰어넘는 새로운 가치와 의견을 던지는 강력한 그룹이 형성되지 않는 한, 어떤 이야기를 하든지 그것은 '비주류의 저항, 친노의 반란, 486의 어쩌고'하는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마치 꽉 물려 움직이지 않는 톱니바퀴 같은 느낌이다.

사실 민주당이 나같이 잘 알려지지 않은 노동전문가를 의원으로 발탁한 것 자체는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시대정신이 경제민주화, 노동, 복지를 이야기하니까 당이 '우리도 이런 사람을 뽑았노라' 하면서 살짝 반응을 보인 것에 불과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시대정신이 나를 뽑은 것이었고 당은 그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시스템이나 룰, 목표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던 거다. 당에 의견그룹도 많고 시대정신을 어떻게 구현할지 고민과 방안들이 준비되어 있었다면, 나 같은 전문가들은 그에 맞춰서 의정활동을 잘 하면 되는데 그렇지 않다 보니 앞으로 나 같은 사람이 들어올 때 잘할 수 있도록 좋은 정당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민주당에 대한 평가가 매우 냉철하다.

너무 솔직했나(웃음). 민주당은 더 이상 추락하는 길밖에 없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당 의원으로서 민주당 혁신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서 당 혁신을 해보고, 그래도 안 되는 것은 하늘의 뜻이겠지 생각하련다. 해보지도 않고 포기할 수 없다는 게 내 결론이다. 그런데도 너무 마음이 무겁다. 스스로 무거움에 짓눌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고민을 하는 과정이 무척 치열하게 느껴진다. 원래 그렇게 끝까지 고민을 해보는 편인가?

성격인 것 같다. '너무 근본적이다'라는 지적도 받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 욕구가 적은 것이 반영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사실 공적이고 정치적 삶보다는 사적인 삶에서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도전해야 하는 과제가 나에게 찾아온다. 사적인 삶을 좋아하고 권력욕이 적다보니 이럴 때마다 '왜 또 나인가'라고 고민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한다. 그렇다고 항상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끊임없이 질문할 뿐이다. 결국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그리고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는 한,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가 볼 것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부분이다. 20대 때 내 삶을 완전히 뒤바꿔야 하는 운동을 선택했던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사회를 바꾸는 운동에 뛰어들겠다고 최종적으로 결심한 것이 대학교 2학년이었는데 그때 그 결정을 내리기가 너무 어려워서 내장이 다 뒤집힐 정도로 게워냈던, 너무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는 영혼을 바꾸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실제로 조직에 그다지 맞지 않는 인간형인 탓도 있다. '내 영혼에 검은 상장을 단다'는 느낌으로 운동을 했다. 그러나 그만큼 치열하게 고민했기에 운동을 시작한 이후론 단 한 번도 뒤돌아보거나 도망가지 않았고,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 당당하게 자기 평가를 했다. 그리고 나의 잘못에 대해서는 책임을 졌다. 그랬기 때문에 서른다섯 살에 구속생활을 마치고 나왔을 때 더 이상 후회도 없었고 내가 할 만큼은 다 했다고 생각했다.

운동을 하기로 결정했을 때 영혼을 바꾸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악마와 싸우다가 악마를 닮아간다는 말이 있듯이, 운동을 위해 일하다 '조직을 위한 로봇'형 인간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을 것 같다. 운동을 위해 자기의 영혼을 버린 듯 열심히 활동하는 것과 정말 영혼을 잃어버리는 것은 다른 문제인 것 같은데, 운동을 하면서 이 둘 사이에 내적 긴장감은 없었나?

긴장감이 굉장히 컸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이 쉰이 넘어서 '소명형이냐, 생계형이냐'를 묻는 것도(웃음) 그런 긴장감 때문이다. 가끔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하는 스스로에게 정말 짜증이 난다(웃음). 그냥 편안하고 쉽게 가지 왜 이런 피곤한 질문을 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그게 내 약점인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얼마나 진지하고 무거워 보일까 싶어(웃음).

ⓒ프레시안(최형락)

얼마 전에 '당신의 삶에서 가장 크게 영향을 주었던 사건 5가지를 이야기해보시오'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래서 몇 개를 꼽아보니 어린 시절의 강렬한 경험 외에도 고문을 당했던 것, 6년간 구속생활을 했던 것, 뒤늦은 결혼을 했던 것, 박사학위를 딴 것, 노동 연구원에 들어간 것, 이혼을 했던 것, 국회의원이 된 것 혹은 누군가를 강렬히 사랑했던 것 등 따져보니 열 개가 넘는 거다. 순탄한 삶은 아니었고 매번 선택의 순간마다 '너는 무엇을 원하니, 너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하는 물음을 끊임없이 던지고, 그에 답하며 살아왔다. A를 하기 위해 B를 포기해야했다면 B를 포기했었던 그 아쉬움 때문에 A를 참 제대로 했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늘 지금 잘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물어보고, 돌아본다. 나의 인생을 손에 올려놓고 관찰하는, 현실에 완전히 안주하지 않는, 경계인으로서의 느낌을 가지고 살았다고 해야 할까. 잘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올 경우 내부에서 빨간불 신호가 작동을 한다. 그렇게 살다보니 안정적인 것보다 불안정한 것을, 기득권을 옹호하는 쪽보다 반대하는 쪽에 늘 서게 되었던 것 같다. 아마도 앞으로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하늘이 내게 뜻하는 삶도 그런 삶이 아닐까 싶다. 포기했다(웃음).

<조선일보>에서 "친야·노동에 사노맹 출신까지", "23년 전 박노해와 사노맹 결성한 은수미"라는 기사를 연이어 낸 적이 있다. 은수미 의원과 소위 '빨갱이'라는 급진적 이미지를 엮으려는 의도가 보이는 제목이었다. 하지만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아직도 금기시되는 한국 사회에서, 일반 사람들에게 '사노맹'이라는 이름이 과격하게 들리는 것 또한 사실이다. 당시 노동 운동에서 그런 과격함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나? 특별히 이 질문은 그 당시 상황을 잘 모르는 20대 대학생 친구가 은수미 의원을 만난다고 하니 꼭 물어봐 달라던 질문이었다.

만약 현재의 사회질서를 바꾸려고 한다면 지금의 2030이든, 과거 2030이든 다른 세대에게는 언제든지 과격하게 보일 것 같다. 다만 그 양상이 다른 것 아닐까. 현재의 사회질서를 바꾸기 위해서는 자기 몸에 체화되어 있는 구질서를 부정하게 되는데 우리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열아홉, 스물의 여대생이라고 하는 것은 중산층이거나 얌전하게 자란 상류층 여성들이라고 할 수 있다. 소수이고 특권층인 경우도 있다. 그러면 이들이 사회에 나오게 되었을 때 한 번씩 자기 부정을 하게 되는데 예를 들어 술을 떡이 되도록 마셔본다든가(웃음), 찐한 연애든 저항이든 그런 과정을 겪는다. 나는 원래 욕을 못하는데 한 6개월간 일부러 욕을 해본 적이 있다(웃음). 늘 입던 스커트를 벗고 고무신을 신어 보기도 했다. 이러한 모든 표현이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과격해 보이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2030은 다른 방식으로 우리가 했던 똑같은 과격함을 가지고, 자기부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음악을 하고 다른 패션과 문화를 가지고 부모 세대가 알아듣지 못하는 자신들만의 이상한 말을 하면서 말이다. 나는 그게 바로 청년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세대든 기존 질서를 과격하게 저항하는 것, 그게 바로 청년이다. 가끔 누군가 "요즘 애들은 정말 무례하고 이해가 안 된다"라고 하면, 막 웃는다. 아마 우리 때도 어른들이 그렇게 이야기했을 것이다(웃음). 과거 70년대, 80년대는 만약 20대가 운동을 하지 않고 저항을 하지 않는다면 죄의식에 시달릴 정도로 운동 문화가 지배적이었다. '종북좌빨'이라는 언어적 폭력 외에도 노골적인 물리적인 폭력까지 동원되는 사회에 붉은 띠를 두른다거나, 분신자살하거나, 화염병을 던지며 저항하였기에 과격해 보이고, 그래서 비난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지금의 청년들은 굉장히 다양한 문화적 코드를 가지고, 다양한 시도를 통해 기존 질서에 저항한다. 가수 서태지의 랩은 그 자체로는 매우 과격해 보일 수 있지만, 피를 튀기지 않고 대중 매체를 통해서 나타났기 때문에 덜 과격해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정신은 과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노동'이라는 말 자체가 여전히 한국에서는 이질적이다. 그래서 왠지 과격하게 느껴질 수 있다. '노동이란 말 말고 다른 말 쓰면 안 돼?'라는 질문도 듣는데, 그렇게 못 하겠다. 다른 말도 생각해 봤는데 더 좋은 대안이 있으면 그것을 쓰겠지만 다른 대안이 없다. 여전히 정면도전이다. 노동의 가치가 여전히 사회적으로 대단히 낮게 인정받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이란 말을 정면에 쓰는 것이 필요하다. 이게 일종의 과격함이다. 하지만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거리에서가 아닌 의회에서 얌전히 이야기하니까 예전의 나보다는 덜 과격해 보일 거다(웃음).

의정활동 하면서 '아, 이게 정말 정치구나! 이래서 정치를 하는구나'라고 느꼈던 순간들이 있다면?

분명히 있다. 예를 들어 쌍용차문제를 다룰 때 천막에서 농성을 같이 할 수도 있지만, 국정조사를 하고 청문회를 통해 증인을 부르고 이것을 국민들에게 알리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운동의 요구를 의회로 가지고 와 정치적으로 재해석하고 관철시키는 것이다. 새누리당 의원들과 기업들하고 논쟁을 하기도 하고 노동자들과도 논쟁을 하기도 했다. 이 모든 과정을 의회가 중심이 되어서 조정하고 조율하고 해봤던 것이다. 그리고 노동을 대선과제로서의 최상의 사회적 쟁점으로 만들어 내었다는 것이 참 뿌듯했다. 그래서 대선 후보들이 쌍용차 문제를 언급할 때 짜릿했다.

또한 의원의 입법활동이라고 하는 것은 공권력 동원을 가능하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최저임금을 논쟁을 하면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재가 간병인(병원에서 환자를 간병하거나 집에서 간병하는 노동자)에 대한 최저임금적용 부분이다. 재가 간병인은 지금 하루 24시간에 6만 원에서 7만 원 정도를 받는데, 시간당으로 이천 몇백 원 정도로 최저임금을 못 받는 상황이다. 만약 최저임금을 적용한다면 몇 가지 문제가 생긴다. 우선 재가 간병인은 24시간 대기를 하는데, 이것을 '24시간 노동으로 해야 할지 아니면 밤에 자는 것 빼고 16시간이나 그 이하로 해야 할지' 하는 문제가 있다. 만약 24시간 일한 것으로 하면 지금의 임금에서 두 배로 올려줘야 한다. 내가 재가 간병인을 써봤는데 하루에 6만 원씩 30일을 썼다고 치면 180만 원이다. 거기에 점심이나 저녁을 지급을 해 드리기 때문에 200만 원이 넘게 나가는데, 이러면 환자 가족은 너무 힘이 든다. 반대로 그대로 두면 간병인은 최저 임금을 못 받는 거다. 그렇다고 해서 두 배로 늘리면 매달 400만 원을 지급해야 하고. 이러면 정말로 환자 가족은 다 직장 그만두고 직접 간병을 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환자 가족들은 최저임금을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을 당하면 범법자가 된다. 지키기 힘든 법이 통과하면 상당수 시민이 범법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법 하나로 공권력 동원이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상호가 윈윈(win-win)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입법이고 의원은 그런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입법을 할 때 가장 합리적이고 보편적으로 설계될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 아직까지 이 법을 통과시키지 못했는데 앞으로 통과시킬 계획이다. 물론 대안이 필요하다. 시민을 범법자로 만들거나 시민들에게 그렇게 많은 부담을 지울 수도 없지만 노동자들이 최저임금도 못 받게 할 수는 없다. 이것이 입법을 하는 사람들의 고민이고 정치인들의 고민이고 정치적인 조율과 협의가 필요한 내용이다. 이런 문제들을 고민할 때 '아~ 이게 정치구나. 운동과 다른 점이구나'를 느낀다.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면 혁명을 꿈꾸며 바리케이드를 쳤던 청년들이 나온다. 그들처럼 은수미 의원도 바리케이드를 쳤던 청년에서, 연구자로, 그리고 지금은 법과 제도를 만드는 국회의원이 되어 있다. 20대의 은수미가 지금의 은수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금의 은수미가 20대의 은수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20대의 은수미는 50대의 은수미에게 이야기를 못한다(웃음). 그 이유는 조금 과격한 생각이긴 했지만, 나는 내가 서른 살이 안 돼서 죽을 줄 알았다(웃음). 20대 초에 운동을 시작했을 때부터 사람이 죽는 것을 많이 보기도 해서 그런지 내가 서른 이상까지 살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감옥에서 서른이 되었을 때 얼마나 놀랐겠는가(웃음). 20대의 은수미는 50대의 은수미에게 "내가 참 소녀적이라서 너를 상상하지는 못했어. 그런데 그게 내 진심이었고 미안해"라고 이야기 하겠다(웃음).

50대의 은수미가 20대의 은수미에게 하고 싶은 말은 늘 실수 투성이었고 부족함 투성이었던 나에게 "너 참 잘 버텼다. 고문도 잘 버텼고, 구속 생활도 잘 버텼어. 생각한 것처럼 우리 사회가 많이 개선되지는 못했지만 너의 책임이 아니야"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왜냐하면 내가 20대 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정말 행복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배나 어른들로부터도 그런 격려의 이야기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고, 늘 죄의식에 시달리는 나날들이었다. 업무에 집중하다 보면 다른 것을 안 돌아봐서 실수도 하고 스물다섯에 지도부가 되다 보니까 나보다 나이 많은 노조원들하고 일을 하면서 괜히 강하게 보이려고 하면서 뭔가 모르게 실수를 많이 했다(웃음). 지금도 실수를 많이 하는데 그때는 얼마나 실수를 많이 했겠나(웃음). 그러면 그렇게 가슴이 많이 아팠고, 자책을 많이 했다.

'청년유니온' 자문도 해주시는 등 평소 청년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것으로 알고 있다.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나의 20대에게 해주고 싶은 것처럼 지금의 노력하는 모든 20대 친구들에게 기회가 된다면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너 참 예쁘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20대 때 나는 내가 너무 밉고 부족하다 생각하여 자신감이 없었다. 사실 꽤 당당해 보이는 친구들조차도 상당수가 열등감에 시달린다. 그런 친구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은 "너 참 예쁘거든. 나는 네가 옳다고 생각해. 그러니 네가 즐겁고 네가 원하는 것을 그냥 해도 괜찮아. 나도 이렇게 실수를 하면서 살아보니 또 살아지고 그 과정에 꿈이 조금씩 이루어지더라.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너는 결코 혼자가 아닐 거야"이다. 만약 내가 아이가 있다면 지금쯤 10대 말이나 20대일 것이다. 조카들이 있어서 가끔 친구처럼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마찬가지로 20대 친구들을 만나 같은 시대를 사는 다른 세대가 친구로서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리고 20대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가끔 서로 다른 세대가 너무 단절되어 있다는 느낌이 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나는 지금의 20대 청년들이 자신의 문제를 정면을 바라보길 원한다.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럽다고 이야기하고 슬프면 슬프다고 이야기하고, 자신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자리 문제는 당신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이고 이것은 누구도 대신 해결해 주지 않는다. 그렇지만 기성세대로서 내가 약속할 수 있는 것은 당신들이 정면을 바라볼 수 있도록 지원하고 협력하고자 노력하겠다는 거다. 각 세대는 각 세대의 하늘과 무거움이 있고 그 무거움을 서로 존중하고 지원할 수만 있다면 세대 간 갈등이 조화롭게 될 것이다. 20대에 정면을 바라보는 힘을 길러 그 힘으로 30대와 40대를 살아야 한다.

이와 더불어 지금 20대들에게 '충분히 자기 부정을 하고 실수하면서 충분히 과격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 속에서 자신이 과격할 수밖에 없는 진실, 즉 기존의 패러다임을 부정하고 나 자신과 타인과 세대를 넘어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라고 말이다. 그 과격함을 20대가 가지지 않는다면 바로 '꼰대'가 되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늘 경계인으로서의 긴장감을 꼭 가졌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그 과격함은 더 이상 신선하지도 젊지도 찬란하지도 않는 자기 합리화가 된다. 가끔 누가 변절했다고 하는데, 다 이유가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제도화되어 그의 삶에 이 긴장감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과격함조차도 주류가 돼버리면 그 과격함은 더 이상 의미가 퇴색돼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은 주류가 되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만들어졌을 때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되도록 자리를 내줘야 한다. '내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었으니, 내가 패러다임을 운영하는 주체가 되어야 해' 하는 보상심리를 갖는 순간, 경계심을 잃어버리게 되고 그 순간, 꼰대가 되고 만다(웃음).

ⓒ프레시안(최형락)

참 중요한 이야기인데, 사실 바로 그 부분에서 모두가 넘어지는 것 같다.

굉장히 힘들다. 좀 더 안정적이고 싶고 돈도 더 많이 갖고 싶고 대접받고 싶고…. 그게 편하고 쉬우니까 말이다. 그러나 스스로 주변인으로서의 관점을 계속 가지다 보면 나중에는 중심인이 되는 게 재미없어진다. 내 경우는 스스로는 늘 주변인의 삶을 원했지만 정작 대체적으로 있었던 위치는 중심이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주변인의 삶의 가치를 가지려고 했다. 이제는 많이 체화되었지만, 끊임없이 변하는 중심과 주변의 경계에서 주변인의 위치가 주류화 될 때, 다시 그것을 넘어선다는 것이 참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늘 스스로를 끊임없이 살펴야 한다. 있는 곳에서 안주하지 말고,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도 하지 말고.

그런데 막상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었는데, 실력이 없고 야망만 있는 사람이 많은 이들이 수고해버린 판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지 않나. 그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건 내가 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어떤 한 사람이 있어야만 그 판이 잘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독재다. 그건 카리스마 있는 신이나 영웅을 원하는 거다. 그러나 사회는 영웅으로 구성되지 않고 보통의 사람들에 의해 구성된다. 나만이 운영할 수 있는 판이라면 그것은 실패한 거다. 물론 그 패러다임도 결국 썩는다. 그러면 당연히 또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세대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기존의 패러다임을 뒤흔든 내가 새 패러다임을 운영도 하고 그 성과도 얻겠다.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그것은 정말로 독재사회와 다름없어진다. 완벽한 꼰대이고.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에게 주어진 역할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것을 잘 수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야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야망은 보상심리하고는 굉장히 다르다. 자기한테 부여한 혹은 자기가 직접 선택한 역사적 소명에 올인하고(집중하고), 그것을 정말 즐길 수 있는 능력이다. 그것에 입각해 정말 즐겁게 최선을 다해서 했다면 나중에는 보상받을 게 없다. 그것을 잘 이뤄낸 것만으로도 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그 이상의 돈이나 자리와 같은 보상을 원한다면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사람들이 나더러 "운동하면서 참 고생했다"고 그러는데, 그게 일면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그게 재미없었으면 했겠는가?'(웃음) 하는 생각을 한다. 후배들에게 가끔 "그때 나는 불새처럼 날았다"고 이야기한다. 아무리 힘들었지만 나에게 있어서 불새가 되는 경험은 정말 충만한 경험이었다. 누가 그런 경험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충분한 거다. 그 이상도 이하도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대게는 이게 쉽지 않다. 어쩌면 나도 다시 계속 경계를 해야 할 위치에 서버린 귀찮은 정치인이 되어버렸다(웃음).

의정보고서에 의원실 배치도와 보좌관 이름이 들어가 있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보통은 독방을 갖고 싶어 하기 마련인데 의원실을 다른 보좌관들과 나눠 쓰는 것도 인상적이다.

의원실이 좁아서 그런 거다(웃음). 별거 아니다. 옆에 누가 있어도 일 잘한다. 의정보고서는 정한나 비서가 주도적으로 만든 것이다. 자유롭게 만들라고 했더니, 보좌진이 정말 마음대로 만들었다(웃음). 정말 재미있게 작업했다. 향후에 우리 보좌진의 이름을 내건 정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 보좌진들이 나랑 일하면서 최대한 기쁘고 자유롭게 자기가 원하는 꿈을 구현했으면 좋겠고, 우리 의원실이 그들에게 징검다리 같은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그들이 나를 통해, 우리 의원실을 통해 날아오르는 것이 또한 나를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서로가 충분히 돌보고 소통하는 문화가 형성되기를 원한다. 그런데 실제 의원실은 의원이 중심이 되니 그게 잘 안 된다. 바라는 것처럼 얼마나 실제 결과를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너무 권위가 없다, 카리스마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듣기도 해서 한편으론 조금 고민스럽다(웃음).

은수미에게 '자유'란?

나에게 '자유'란 집단적 자유이다. 노동문제를 하는 사람이라서 그렇다.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서 노동자가 언제나 약자이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은 웃긴 소리이다. 상사가 부당한 명령을 내려도 해고당하지 않기 위해선 순응할 수밖엔 없다. 요즘 같이 어려운 상황에선 고문을 해도 당할 판이다. 거기서 자유란 해고될 자유이고 죽을 자유인 것이다. '위계적인 사회에서 모든 개인에게 자유란 뭘까?'라고 생각해보았을 때 자유란 약자에게는 '집단적인 자유, 즉 노동조합을 만들거나 협동조합을 만들어서 사회나 권력으로부터 가해지는 나에 대한 옥죄임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개인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특정한 개인이 목숨을 걸고 지키는 그런 영웅적인 자유가 아니라 보통사람들이 집단에 참여해서 목소리를 내는 결사체로서 조직에 참여해서 그 조직의 보호를 받으면서 저항할 수 있는 집단적 자유를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의 핵심이 자유이고 그 자유를 누릴 권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노동, 자유, 권리를 중요시 한다. 자유인이라 함은 바로 그런 집단적인 자유를 통해서 자유로워진 인간, 집단을 통과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이 그런 집단에 참여하는 것이 자유의 시작이다. 비정규직은 조직에 참여할 자유조차 없지 않은가. 개인이 자유롭다고 생각해서는 자유로워지지 않고 또 그런 사람을 여태껏 보지 못했다. 그 사람은 특별히 자본이 있기 때문에 자유롭거나 돈 때문에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인데 그 사람조차도 그다지 자유롭지 못하다(웃음). 돈이 없는 일반사람들도 협력하고 연대하고 결사할 수 있는 자유, 그게 자유다. 그러니 얼마나 어렵겠는가. 개인이 집단에 참여하기도 어렵지만 그 집단이 자유가 아닌 얽매임으로 바뀔 수도 있다. 조직이 원래의 목적을 포기하면 새로운 집단을 만들어야 하며 그런 점에서 집단적 자유는 영원한 도전인 것 같다.

(인터뷰 및 정리: 정치경영연구소 김경미, 손어진, 김민희)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들을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 분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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