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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 이젠 '히딩크 마법'에서 깨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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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 이젠 '히딩크 마법'에서 깨어나라

[프레시안 스포츠] 히딩크 오보 해프닝이 남긴 것

21일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히딩크 감독이 아르헨티나전에서 1-4로 패한 허정무호를 비난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쏟아졌다. 히딩크가 했다는 발언은 대략 이렇다. "한국은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축구가 아닌 야구를 했다. 일방적으로 수비만 하며 상대 공격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네덜란드 축구 잡지(푸트발 인터내셔날)에 소개된 히딩크 인터뷰를 인용해 게재된 기사는 허위로 판명됐다. 한 네티즌이 그럴듯하게 꾸민 것을 국내언론이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기사화해 문제가 됐다.

'히딩크 우상화'에 나가떨어진 한국의 후임 감독들

오보를 양산한 국내 언론도 문제지만 이 해프닝으로 드러난 더 심각한 문제는 2002년 이후 한국 축구의 신으로 군림했던 '히딩크 우상화'의 폐해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히딩크 어록'으로 국내 언론의 스포츠면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한국을 떠난 뒤 네덜란드 아인트호벤과 호주, 러시아 등에서 보여 준 그의 지도력에 언론은 '히비어천가'를 경쟁적으로 양산했다.

뿐만 아니다. 히딩크 이후에 한국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던 감독들은 그와 얼마나 비슷한 시스템을 팀에 도입했는가에 따라 훌륭한 감독이 되기도 했고, 무능한 감독이 되기도 했다. 히딩크는 한마디로 한국 축구의 리트머스 시험지였다. 실력위주의 선수 선발, 체계적인 체력훈련을 통한 압박축구, 철저하게 공격축구를 염두에 둔 용인술이 다른 감독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됐다.

히딩크 이후 코엘류, 본 프레레, 아드보카트, 베어벡 감독은 모두 히딩크를 넘을 수 없었다. 일단 이들 후임감독들은 히딩크가 2002년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선수들과 보냈던 만큼의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다. 부임 후 대표팀과 오직 72시간 밖에 훈련을 못했다고 툴툴거렸던 코엘류의 경우 특히 그랬고, 너무 늦게 2006년 독일 월드컵 준비에 들어갔던 아드보카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월드컵 4강 국가의 감독이라는 부담감이었다. 자신의 실력으로 그 벽을 넘지 못했던 본 프레레는 "한국 축구 감독직은 독이 든 성배"라는 험한 말까지 하면 떠났었다.

▲ 4강산회의 주역 거스 히딩크와 허정부 현 국가대표 감독 ⓒ뉴시스

성공에 너무나 배고팠던 히딩크의 4강 신화

이들과 히딩크 감독은 뭐가 달랐을까? 히딩크의 4강 신화 키워드는 '성공에 대한 절박함'이었다.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으로 유럽 축구 중심에 있던 히딩크는 한국 대표팀의 감독이 되기 이전에 추락을 경험했다. 스페인의 명문 레알 마드리드와 레알 베티스에서 뼈아픈 실패를 했다.

이때 한국은 2002년 월드컵에 대비하기 위해 외국인 감독을 물색하고 있었다. 대한축구협회는 프랑스를 98년 월드컵 우승으로 이끈 에메 자케에 러브콜을 보냈지만 자케가 거절했다. 대신 그 자리는 2순위였던 히딩크에게 돌아갔다. 유럽무대 진출을 위해 칼을 갈던 히딩크와 한국 축구의 만남은 이런 점에서 극적이었다.

이룰 것은 다 이룬 자케가 한국을 맡았다면 자케에게 오히려 부담을 됐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에서의 실패는 지금까지 쌓아온 그의 명성에 오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히딩크는 달랐다. 성공에 굶주렸던 히딩크는 밑질 게 없는 상황이었다. 한국의 축구실력은 검증되지 않았지만 개최국 프리미엄까지 생각하면 더 그랬을 것이다.

히딩크는 '성공에 대한 굶주림'이라는 바이러스를 한국 대표팀에 퍼뜨렸다. '공동 개최국 일본에 밀리면 어쩌나'라고 걱정하던 한국 선수들의 눈빛은 달라졌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그들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셔틀런' 등 강도높은 체력훈련을 견뎌냈다.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플레이를 위해서는 체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기 시작해서다.

한국이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16강에 진출했을 때, 우리는 세상을 다 얻은 듯 마냥 기뻐했다. 하지만 히딩크는 달랐다. 그는 "아직 배가 고프다"라며 이탈리아전을 겨냥했다.

그가 다시 유럽축구의 중심으로 가려면 월드컵에서 대어를 낚아야 한다는 점을 모를 리 없었다. 히딩크의 성공에 대한 굶주림은 한국을 8강으로 인도했다. 사실상 보너스나 다름없었던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 한국은 스페인까지 넘어섰다. 히딩크에게 이 경기는 자신에게 좌절을 안겨 준 스페인 축구에 대한 달콤한 복수였다.

"박지성, 이젠 히딩크를 넘어서라"

2002년 월드컵이 끝난 뒤, 네덜란드 아인트호벤의 감독이 된 히딩크는 이영표와 박지성을 아인트호벤으로 불러 들였다. 아인트호벤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끊임없이 노력했다. 하지만 히딩크 감독의 이영표, 박지성에 대한 관심과 배려 등이 더 자주 뉴스의 초점이 됐다.

특히 히딩크 감독의 선수를 보는 눈은 두 선수가 성공가도를 달리자 화제가 됐다. 이영표, 박지성은 그런 점에서 철저하게 '히딩크의 아이들'이었다. 아직까지도 두 선수는 2002년 멤버 가운데 사실상 유이했던 유럽무대 성공작으로 남아 있다.

박지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러브콜을 받았을 때, 히딩크 감독은 그의 이적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아직 빅리그에서 뛰기에 2~3년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다. 기자도 당시 박지성이 과연 맨유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반신반의했다. 도움을 구하고자 이용수 KBS 해설위원(세종대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박지성은 이젠 히딩크 감독을 넘어서야 한다." 2002년 한국 축구의 모습처럼 박지성에게 필요한 건 과감한 도전과 더 큰 무대에서의 성공에 대한 굶주림이라는 의미다.

유효기간이 지난 '히딩크의 마법'

허정무 감독은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치욕적인 순간을 맛본다. 한국은 축구 8강전에서 태국에 졌다. 한국 축구는 바닥을 쳤다. 태국 영자신문 <방콕 포스트>는 사설을 통해 "한국전 승리는 달콤했다. 최근 태국이 월드 클래스 팀 한국을 이긴 것은 처음이다. 더욱이 어제 우리는 9명이 한국의 11명을 상대했다"고 감격했다.

이 경기를 시작으로 서서히 인기를 잃어가던 허정무 감독은 2000년 아시안컵을 끝으로 대표팀을 떠났다. 1년 뒤 허 감독은 홍콩으로 향했다. 칼스버그컵 중계방송의 해설을 하기 위해서였다. 허 감독은 자신의 후임인 히딩크 감독을 찾아갔다. 그는 억센 네덜란드 억양으로 "히딩크 감독, 오늘 저녁 큰 승리를 빕니다"고 말했다.

통역으로부터 이 분이 허정무 전임 감독이라는 말을 들은 히딩크 감독은 다분히 의도적인 몸짓으로 사진기자 앞에서 허 감독의 어깨를 정답게 두드렸다. 히딩크 사단의 기술분석관으로 일했던 얀 룰프스가 쓴 <6월 이야기>에 나오는 대목이다.

그 순간 허정무 감독의 심정은 어땠을까? 1년 뒤, 히딩크 감독의 성공신화를 보며 허 감독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허 감독은 승리에 대한 배고픔과 새로운 도전에 대한 꿈을 키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 원정 16강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월드컵 무대에 서 있다.

히딩크 감독이 한국 축구에 남긴 최고의 유산은 기존의 틀에 대한 도전정신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축구가 지금 깨야 할 것은 '히딩크의 신화'다. 히딩크도 그가 이끈 4강 신화라는 푯말만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한국 축구에 마냥 박수를 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는 자신보다 더 승리에 배고픈 누군가에 의해 한국 축구의 새 이정표가 만들어 지기를 기다릴지 모른다. 8년 전 제조된 '히딩크의 마법'은 유효기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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