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은 계간지 <미래와 희망> 3호에 실렸던 글이다. <편집자>
1. 언어와 정치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이념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다각도에서 해결책이 제안된 바 있지만 생각의 차이는 점차 커져 가고 있다. 또 진보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현저하게 축소되어 진보진영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전략을 다방면에서 연구해 보았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러한 시점에서 필자는 진보/보수의 구분을 만들어 내는 언어적 차원을 분류해 봄으로써 진보/보수의 인식론적 수준을 가늠해 보고, 현재의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전략을 언어의 차원에서 고민해 보고자 한다. 언어의 성격을 기준으로 볼 때, 한국사회에서 경쟁하는 보수/진보의 구분은 세가지 차원에서 가능하다.
첫째는 이데올로기 수준에서 정치적 진보/보수를 구분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경우 진보/보수는 이념적인 내용과 사상적 근거에 의해서 구분된다. 예컨대 보수는 민족주의를 강조하고 국가안보를 중요시하며, 경제적으로 시장자유를 주장하는 반면 진보는 국제주의를 강조하거나, 폐쇄적 안보정책보다는 선린우호정책을 선호하고, 경제적 평등을 강조하면서 국가개입을 정당화한다. 한국에서 진보가 정책으로 제시하는 복지국가는 평등을 중요하게 생각한 반면, 보수가 강조하는 시장자유주의는 발전에 무게중심을 둔 것이라고 분류할 수 있다. 이러한 수준에서 보면 진보의 이념과 내용은 시대와 상황을 넘어서 고정불변한 진리로 보이며, 정책적 대안도 여러나라의 특수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념적 내용을 기준으로 판단하건대, 한국의 진보는 현재 19세기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를 답습하고 있다.
두 번째는 담론의 수준에서 정치적 진보/보수를 구분 할 수 있다. 담론이란 언어의 사회적 효과에 주목하는 개념이다. 예컨대 한국의 진보진영에서 "노동자"라는 말을 선호하는 대신 한국 보수 진영에서는 "근로자"라는 단어를 선호하는데, 그 이유는 두 단어의 의미내용은 동일하지만 그 담론적 효과가 다르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자본가와 대립구조에서 계급성을 바탕으로 한 언어라고 한다면, 근로자라는 단어에는 이러한 대립구조가 없다. 전자가 저항이데올로기와 관련되어 노동혁명, 노동조합과 같은 말로 연결되는 반면, 후자는 근로봉사, 근로소득, 근로소득세 등에서 보이듯 자연스럽게 지배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는 전략적 어휘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보면 정책적 내용보다는 어휘의 사회적 효과와 언어대립관계가 한국사회에서 진보/보수를 구분하는데 중요하다. 보수가 효율성, 자율성, 민영화, 국제화등의 단어를 활용하는 반면, 진보는 평등, 연대, 공공성, 민족주의 등을 자주 사용한다. 이러한 단어의 대립구도는 의미의 내용보다는 단어의 이분법적 대립구도가 중요하다. 예컨대 효율성은 대체로 평등이나 공공성과 대립하여 이해되는 것이 보통인데, 한국사회에서는 효율성의 담론적 효과가 평등이나 공공성보다 보다 광범위하게 지지층을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일반 국민들이 언어에 적응하는 경로를 통해서 면밀히 분석해야 알 수 있는 사항이다.
세 번째는 언어시장의 논리를 기준으로 진보/보수를 구분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와 담론이 텍스트 공급의 차원을 강조한다면, 언어시장은 텍스트가 생산된 사회적 배경에 더 주목한다. 또 이러한 텍스트의 어휘들이 일반 개인들에게 어떻게 수용되는가에 관심을 갖는다. 예를 들어 발전이라는 개념을 두고 박정희 시대와 1990년대 이후를 비교한다면, 단순히 학자의 논문이나 대통령의 연설문만을 연구하는 차원을 넘어서, 당시 정책결정에 관여했던 핵심관료들의 학력, 생애, 친분관계들을 추적해 보아야한다. 또 시민사회에서 정부의 정책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나 언론의 태도도 매우 중요하다. 특히 요즘과 같이 시민단체가 활성화된 시기에는 다양한 사회세력들이 정부의 정책을 두고 찬성과 반대의 성명서를 발표하는데, 여기서 정부정책의 호응도가 결정된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니다. 또 언론의 세력투쟁도 매우 중요한 변수중의 하나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보수언론의 헤게모니는 진보가 상대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하여 진보진영에서는 인터넷 활용을 통해 게릴라 전술로 담론의 저항진지를 만들어 가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들어와 공중파는 물론, 인터넷, 모바일 폰에 대한 언론규제법이 통과되고 있어 게릴라 전술을 통한 여론형성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다. 나아가 개인들이 정책들을 당연한 시대정신으로 받아들이고 익숙하게 되는가를 살펴보는 작업(이것을 개인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도 빼놓을 수 없다. 박정희 시대의 발전은 반공이라는 정치이데올로기, 병영체제적 시민사회, 반공규율로 훈련된 개인이라는 세가지 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반면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이후의 발전개념은 세계화, 경쟁, 자기계발이라는 축으로 이루어 져 왔다. 특기할 사항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발전개념은 국제정치의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강해졌다는 점이다. 이렇게 보면 발전이라는 동일한 개념을 두고 보수/진보가 대립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은 시대에 따라 사뭇 달라진다.
이와같은 이론적 배경을 근거로 필자는 실증작업을 하고자 하는데, 그 대상으로 박세일의 보수담론을 선정하였다. 박세일은 현재 보수진영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여론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다양한 정책결정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다. 그는 보수담론의 의미와 영향력을 이해하고 분석하는데 적절한 본보기가 될 것이다.
2. 박세일 담론구조 분석
1) 국제정치/국내정치
박세일은 한국의 중도보수를 대표하는 학자이다. 그는 서울대학교 교수를 거쳐 김영삼 정권에서는 세계화추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박근혜가 당대표로 있을 당시 여의도 연구소장을 지내면서 한나라당의 정책결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더구나 그는 현재 한반도 선진화 재단을 통해 학계와 정계의 싱크탱크를 진두지휘하면서 보수진영의 정책담론을 생산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가 발행한 책들은 한나라당원들의 정치학 교과서로 간주될 만큼 한국 정치계에서 보수진영의 핵심언어로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그의 언어구조를 살펴보는 것은 보수/진보의 대립구도에서 보수언어의 특징을 이해하고, 진보진영의 언어적 취약점을 고민하는데 매우 유용할 것이다.
<21세기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 <공동체적 자유주의>, <대한민국 국가전략>, <대한민국 세계화전략 ;창조적 세계화론>은 지난 5년사이에 박세일이 연이어 출간한 책인데, 그의 사상적 구조를 이데올로기/담론/언어시장의 3차원에서 분석하기에 적절한 텍스트다. 우선 책 제목에서 쉽게 알 수 있듯이 그의 사상은 "선진화", "공동체적 자유주의", "세계화"로 요약될 수 있다. 여기서 필자는 매우 간명하고도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다. 박세일이 제안하는 세가지 개념의 내용은 무엇인가 ? (이데올로기의 수준) 세가지 개념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발휘하는 사회적 효과는 무엇인가 ? (담론적 수준) 세가지 개념은 어디에서 유래하고 있으며 보통사람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 (언어시장의 수준)
이데올로기의 수준에서 평가하면 박세일의 언어는 근대화이론의 연장선에 서 있으며, 이것은 국가주도의 경제개발을 강조했던 과거 한국사회의 지배담론과 유사하다. 그런데 차이점이 있다면 오늘날 선진화 전략은 국가가 아니라 시장자율의 효율성을 강조한다. 또 개혁적 주체세력이 선진화를 이끌어야 하는데 선진주체는 정당, 싱크탱크, 국민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방식도 강권력이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고 공익을 앞세우는 문화적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본다. 세계화는 현대 자본주의의 거슬릴 수 없는 추세이며 이에 창조적으로 동참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용의 수준에서 보면 흠잡을 때 없이 훌륭한 제안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언어구조의 사회적 담론효과는 사뭇 다르다. 시장자율성을 강조하게 되면 기업의 사회적 공익보다는 효율성을 인정하게 되고, 세계화의 논리에 추종하게 되면 투기자본의 이해관계에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기가 힘들다. 더구나 세계화는 국내정치/경제의 실패를 무능한 정부나 국민들의 잘못으로 돌리기 쉽다. 그렇지만 현대 자본주의 문제는 세계체제와 관련된 것인 만큼, 정책실패의 원인을 국내정치의 리더쉽이 부족했다고 쉽게 비난할 수는 없다.
한편 개인의 창조성과 자율성을 강조하는데, 이렇게 되면 시장에서 낙오자가 되어도 그 책임은 모두 개인의 무능력 탓이 된다. 일자리를 못 찾는 것이 어디 개인의 문제인가 ? 현재 자본주의 사회가 유연축적체제로 움직이는 한 20/80의 사회는 불가피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복지국가의 인프라를 정비해야만 한다. 물론 박세일도 공동체주의를 강조하지만 그 논리가 매우 공허하다. 그는 극단적 좌와 우의 대립을 포섭할 수 있는 대안으로 공동체주의를 제안하는데, 그것은 마치 중용의 미덕과 같이 중간에서 양자를 모두 끌어안을 수 있는 어정쩡한 타협책으로 보인다. 미국에서 개발된 공동체주의를 인용하지만, 그 내용을 한국현실의 적용하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다. 현재 한국사회에는 공동체의 뿌리조차 무너져 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론과 현실의 괴리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세일 담론은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그의 정책제안에 귀를 기울이며, 보통사람들도 그가 강조하는 세계화 논리에 고개를 끄덕인다. 왜 그럴까 ? 필자가 보기에 그의 정책제안이 강한 반향을 얻고 있는 이유는 국제정치적 역학구도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보수담론은 압도적으로 미국학계에서 생산된 언어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국제적인 공인을 등에 업고 쉽게 국내정치로 진입된다. 필자가 판단하건대, 박세일의 보수담론은 미국정치학계가 만들어 낸 "민주화 이행론", 세계은행이 생산한 "거버넌스", 보수적 관료와 투기적 상업은행이 연합하여 창출한 "워싱턴 컨센서스"를 한국식 버전으로 바꾸어 놓은 전형적이 신자유주의 담론이다. 미국이 생산한 담론을 박세일이 어떻게 윤색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 언어시장의 구조를 알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정치의 역학변화를 알아야 한다.
냉전시기였던 1960년대와 70년대에 미국학계를 지배했던 담론이 근대화이론이었다면,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시작된 이후에 미국학계에는 인권이론과 세계화이론이 득세한다. 즉 미국행정부의 대외정책과 이를 뒷받침하는 학문적 담론은 권력과 자본을 매개로 깊숙하게 연결되어 있고, 대외정책의 변화와 학계의 지배담론은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 받는다. 이러한 상호관계가 물질적 기반을 이루며 실질적으로 시대정신을 만들어 낸다. 한편 중심국에서 전개되는 담론의 이행과정이 한국사회에서는 지배담론의 투쟁과정에 그대로 투사된다. 이것이 필자가 보기에 한국사회에서 진보/보수의 담론대결을 두고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고전적인 맑시즘이나 월러스타인의 세계체제론에 따르면 중심국의 정치 경제력이 주변국의 사회경제에 종속적 변화를 만들어 내지만, 한국과 같은 주변국에서 실물제도의 변화는 비 물질적 가치관에 의해서 추동되는 것이 보통이다. 여기에 학계의 지배담론이 큰 역할을 한다.
냉전적 사고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봉쇄정책은 미국이 2차 대전 이후 제 3세계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하고 소련 공산주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서 만든 이데올로기였다. 당시 미국은 자본의 국제적인 순환을 확장하고 잉여의 수취를 통해서 미국의 번영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는데, 여기에 가장 큰 장애물은 소련 공산주의의 확대였다. 정치적으로 독립한 제 3세계의 민족주의 운동에 공산주의 이론은 매우 매력적인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미국은 '방어적 근대화'이론을 근거로 개발원조 정책을 펼친다. 제 3세계에 경제적 원조를 지원함으로써 국내정치의 혼란을 방지하고 소련의 위협을 방어한다는 전략이다. 여기에 근대화 이론은 담론적 효과를 발휘한다. 경제발전이 정치발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강변하는 근대화 이론은 루시안 파이의 < 정치발전의 국면들>, 립셋의 <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등의 저작들을 통해 구체화된다. 여기에 카네기 재단이나 포드 재단과 같은 미국 재벌기업은 물론 CIA의 공적 자금도 은밀하게 개입한다. 프린스턴 대학이 발간한 정치발전연구 시리즈와 리틀 브라운 대학의 비교정치학 시리즈들이 대표적인 근대화 이론의 성과들이다. 이 시기 한국대학에서는 미국유학파들이 근대화 이론을 배우고 돌아와 정치학과에 행태주의 방법론, 정치발전론,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등의 교과목을 개설하고 강의를 시작한다. 또 이들 미국유학파들은 정치, 경제, 분야에서 박정희의 개발정책에 이데올로기를 제공한다. 대표적인 사람이 한배호, 남덕우 등이다.
그런데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국의 대외정책에 변화가 찾아온다. 일단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미국 정부는 방어적 근대화/냉전적 봉쇄정책의 기조를 포기하고 새로운 정책을 모색하게 되는데, 이러한 고민 끝에 나온 대외정책의 기본방침이 인권정책이다. 인권정책은 이미 카터 행정부에서 도입되었지만, 레이건은 이것을 보다 공격적인 보수적인 색깔로 윤색한다. 진 커크 패트릭이 주창한 <독재와 이중기준, dictatorship and double standards>이라는 논문은 레이건 행정부가 인권정책을 어떻게 공격적인 대외정책에 응용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커크패트릭에 따르면 카터행정부에서 사용한 인권정책은 소련의 후원을 받는 제 3세계의 일부 세력들을 미국에 적대적이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소련의 후원을 받는 비 민주주적 정권에 대처하기 위해서 새로운 전략이 필요했는데, 이때 인권은 미국에 반대하는 세력을 독재정권으로 규정하고 민중들을 해방시킨다는 명분으로 제 3세계에 무력개입을 정당화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제공해 준다.
한편, 근대화 이론에도 변화가 따랐다. 70년대 남미학자들은 종속이론을 통해서 미국식 근대화에 정면을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남미 전역에는 권위주의체제가 구축되었는 바, 이것은 경제발전이 정치적 민주화를 가져 올 것이라는 낙관을 뿌리부터 흔든 요인이었다. 여기에 UN의 라틴 아메리카 위원회는 수입대체 산업화를 통해 경제발전의 새로운 모티브를 찾을 수 있다고 시사하지만, 오도넬과 같은 학자들은 <근대화와 관료적 권위주의>라는 책자를 통해서 수입대체 산업화가 오히려 국내정치에서 1차산업군을 경제적 희생양으로 내 몰며, 민중들의 저항을 억압하기 위해서 관료적 권위주의 체제가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이와 같은 남미학자들의 저항에 대하여 포드재단과 같은 재벌들은 라틴아메리카 연구에 국제적인 자금지원을 시작하게 된다. 부에노스 아리레스에 생긴 사회연구센터(CEDES)가 그 대표이다. 여기에 오도넬이 초대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후임에는 카르도소가 위촉되었다.
이때부터 남미학자와 미국학자의 공조가 진행되었고, 궤를 같이하여 '근대화이론'이 '민주화 이행론'으로 바뀐다. 정치학자들은 남미의 권위주의 체제를 연구하면서 민주화로 이행하기 위해 정치행위자들의 리더쉽을 강조한다. 이리하여 구조적 맑시즘의 위력은 사라지고 경제개혁과 테크노크라트의 역할이 중요한 의제가 된다. 리더쉽, 정치개혁, 행위이론은 워싱턴 컨센서스의 중요한 기반이다. 그리고 구조조정의 프로그램이 남미 제국에서 적절하게 적용되지 못하게 될 때 "거버넌스"의 효율성을 기치로 세계은행이 개입하여 국내경제를 조정하게 된다. "굿 거버넌스(good governance)"의 논리는 대체로 초창기에 아프리카에서 빈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동원된 개념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세계은행이 제 3세계를 국내거시지표를 두고 일괄적으로 통제하는 개입주의정책의 기반으로 활용되었다. 이렇게 놓고 보면 민주화 이행론/거버넌스/인권은 국내정치/국제정치경제/보편적 이상주의를 대표하는 학문적 개념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박세일의 선진화/세계화/공동체주의 담론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정신적 에농세(ENONCE)라고 할 수 있는 3가지 담론구조를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
우선 선진화라는 테제는 레리 다이아몬드(L. Diamond)의 '민주주의 공공화론(the consolidation of democracy)'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이아몬드는 우드로 윌슨센터에서 '민주화 이행론'을 연구하며 민주화의 지표를 선정하고 민주화의 공고화 가능성을 연구한 학자이다. 그는 남미와 동남아시아에 걸쳐 자신의 연구성과를 적용한 일이 있다. 한국에서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김병국교수와 공동으로 <남한에서 민주화를 공공화하기 (consolidating the democracy in south Korea),Lynne Rienner Pub.2000>, 신도철 교수와 공동으로 <한국에서 제도개혁과 민주주의 공공화 ( institutional Reform and democractic consolidation in Korea), Hoover intitutional Press, 2000>을 발행한 바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의 저서 <Spirit of democracy; the struggle to build free societies through the wolrd>가 한국말로 번역되었을 때, 그 제목이 < 민주주의 선진화의 길: 자유사회의 세계보편성을 위하여>이다. 이렇게 보면 민주주의 이행론의 인식론적 토대가 한국에서는 '선진화', '창조적 세계화"라는 파생어를 만들어 낸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들어 박세일은 "창조적 세계화 모델"을 제안하면서(<창조적 세계화론>, 589쪽) 금융제도, 교육제도, 조세 및 재정개혁, 반부패 개혁 등등의 제도개혁을 강하게 주장하는데, 이것은 오도넬(O'Donelle), 카로도스(Cardose), 도밍게(Domingue)등의 남미학자들이 미국식 민주화 이행론에 기대어 테크노 폴이 주도하는 국내정치/경제 개혁을 강조한 사실과 매우 유사하다. 또 박세일은 선진화전략과 관련하여 과거의 생산적 복지는 현실으로 어려우며(<대한민국 선진화 전략>, 69쪽) 차라리 일하는 복지, 생산적 복지가 가능하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민간협치와 선진화된 지도자의 역할을 강조한다. 이것은 도밍게(Domingue)가 편집한 저서 <테크노 폴>(<Technopoles; freeing politics and Markets in Latin America in the 1990s>,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97)에서 역설하는 내용들과 거의 똑같다. 구주조의 맑시즘의 비판정신을 거세하고, 자본주의의 폐해를 국내경제의 운영실수로 몰아붙일 수 있었던 근거가 테크노폴의 리더쉽이론이었는데, 이것이 한국에서는 선진국민, 선진정당, 선진싱크탱크, 선진지도자로 둔갑하고 있다.
한편 박세일의 공동체주의가 흥미롭다. 사실 미국에서 인권담론이 유포되면서 정치사상사에서 롤스 자유주의 정치사상이 서서히 세력을 잃고 1980년대 이후에는 공동체주의 담론이 미국학계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롤스는 형식적 절차와 개인의 권리를 중요시하는 칸트주의 입장을 대변하는 학자라면, 공동체주의자들은 공동체 규범을 우선하는 헤겔주의적 입장을 견지한다. 이때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공동체주의를 강조함으로써 제 3세계의 국내정치를 두고 정치주체들이 적극적인 정치개혁에 참여하도록 강요할 수 있으며, 국제정치적으로도 국제공동체를 건설한다는 명분으로 개별국가의 주권을 넘어서 미국의 개입정책을 정당화할 수 있게 된다. 인권정책이 바로 이것이다. 이렇게 보면 인권/공동체주의/미국의 개입정책은 서로 짝을 이루는 3박자의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박세일은 공동체의 이름만을 수입하여 유교공동체와 접목시키고 있다. 웃지 못할 촌극이다. 박세일의 말을 인용해 보자
우리는 이 공동체 자유주의라는 통합과 발전이념을 가지고 아직도 우리 사회의 일각에 남아 있는 20세기적 구 우파와 구 좌파의 잘못된 이념과 사상, 가치관과 사고를 미래 지향적으로 고쳐나가야 한다. 그리고 이념과 사상의 합의를 만들어 가야 한다. < 공동체적 자유주의>, 221쪽) (---) 그리하여 공동체가 건강성과 유덕함을 유지하여야, 즉 건강하고 유덕한 공동체를 유지발전시켜야 개인의 자유가 더욱 만개할 수 있다. (226쪽)
2) 시민사회/개인 수준
박세일의 담론효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에서 시민사회와 개인화 과정의 상호관계를 알아야하는데, 이때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대표적인 기관 4곳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대학, 언론, 기업, 교회
박세일은 현재 서울대학교 교수이다. 그의 경력을 자세히 살펴보면 김영삼 정권시절 세계화추진위원회 위원장, 여의도 연구소장, 한나라당 전국구 국회의원, 한반도 선진화 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이러한 화려한 경력은 그의 담론을 뒷받침하는 사회적 배경이다. 특히 그는 미국에서 법학과 경제학에서 두가지 학위를 취득했는데, 이것은 새로운 학력으로 국내에서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 그중 하나가 새로운 컬리큐럼을 거의 독점적으로 창설하고 운영하면서 지배담론을 생산한다. 그는 서울대학교 국제학부를 창설하는 과정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며, 학과의 교수직을 충원하거나 교과목을 설치하는데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세계화와 관련된 공인된 담론과 대학의 제도를 설계하고 창설한 장본이다. 세계화와 관련된 미국유학파가 대학 내에서 미국식 교과과정을 이식하여 미국과 동일한 내용으로 강의하게 되면 미국의 이해관계가 한국정치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현재 그는 세계화를 지지하는 미국유학파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보수논객이다.
서울대학교수의 배경은 언론에 그대로 반영된다. 한국의 언론에서 기고자의 대부분은 교수집단이며 특히 서울대학교수의 비중은 압도적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에서 미국유학파-서울대교수-보수언론은 중심국의 지배담론을 국내정치 안으로 수입하는 중요한 통로이다. 여기에 박세일은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 언론분야에서 일정한 쟁점을 두고 여론을 주도할 사람이 마땅히 없다. 그래서 한국사회에서는 대학교수들이 언론에 참여하는 비율이 높다. 하지만 대학교수들이 한국사회에서 정치나 경제문제를 두고 감시자 역활을 하기가 쉽지는 않다. 왜냐하면 교수들이 일정부분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으며, 이미 정당에 개입하여 현실정치에 깊숙이 관여하는 만큼 그들이 기고하는 글들은 대부분 감시와 비판의 기능보다는 특정한 정책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역할에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보수언론사와 기업화된 사립대학은 보이지 않는 커넥션을 형성하고 있으며, 특정한 교수들에게 언론에 기고할 기회를 자주 부여하여 신문사의 이념과 이익을 대변하는 나팔수 역할을 시키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른바 언론사의 전위대가 교수사회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오늘날 한국의 대학교수는 특정한 이해관계를 보편적인 것으로 위장하면서 자신의 학문적 정당성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전형적인 매판학자의 모습이다. 따라서 한국에서 언론의 개혁문제를 거론할 때는 반드시 지식인사회의 계급성과 학언의 유착관계를 염두해 두어야 한다. 박세일의 담론은 매우 공식적인 학술담론으로 포장되어 있고, 그 학문적 깊이도 일견 깊어 보이나 결국 보수세력의 이해관계에 봉사하고 있다. 어쩌면 보수언론이 박세일에게 자신의 이해관계에 필요한 담론을 주문생산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박세일이 보수언론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자신의 담론을 전파시키는데 매우 유리한 조건이다.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그는 자신이 기고한 신문사, 강연장소, 토론 장소들을 상세하게 명기하고 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와 같은 보수진영의 신문에 연일 원고를 게재하고 있으며, 나아가 매일경제, 한국경제, 불교신문 등의 제 2 보수권 언론은 물론 심지어는 한겨례 신문과도 인터뷰를 하고 있다. 또 다양한 시민단체의 창립기념대회, 사회운동토론에도 참여하고 있다. 보수를 넘어서 진보까지도 넘나들며 자신의 담론을 확산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언론활동은 물론 정당정치와 포럼으로 이어진다.
한편 시민사회에서 박세일의 신자유주의 담론을 지지하는 또 다른 세력은 기업이다. 한국의 재벌기업은 기업의 위기상황을 조장하여 노동자들의 순응을 이끌어 낸다. 이때 미국의 경영담론은 과학적 근거를 갖춘 정당성의 원천이다. 외환위기를 전후하여 살펴보면 차이가 분명해진다. '경영환경악화', '의식혁신의 부활', '학습조직의 필요성'을 등을 강조하던 기업의 어휘가 외환위기 이후에는 '정보혁명시대', '불확실성에 대비하는 경영의 변신', '새로운 인사 제도' 등과 같은 어휘로 바뀐다. 이러한 경영담론은 궁극적으로 기업의 종사자에게 특수한 복종의 형태와 사회적 실천을 강제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구본형, 공병호의 경영담론은 국가수준의 정책담론과 개인들의 복종을 중간에서 이어주는 매개자 역할을 한다. 물론 박세일은 이러한 기업경영의 담론에 논리적 정당성을 제공하는 최고의 학자이다. 박세일이 <창조적 세계화론>에서 현재의 바람직한 노사관계를 해결하기 위해서 '유연안정성(flexicurity)'라는 개념을 제시하는데, 이것은 결국 노동유연성을 인정하는 토대위에서 개선책을 찾자는 시도이다. 공병호나 구본형의 "성공학 담론"이 노골적이고 천박하게 친자본주의 편을 드는 반면, 박세일은 논리면에서 보다 '유연하고', '노동자의 편에 선 듯한'인상을 준다. 그러나 자본의 이해관계를 위해서 노동자들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치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보통사람의 눈에는 이면의 논리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훨씬 설득력이 있고, 그래서 훨씬 위험하다.
한편 한국에서 특이한 사항은 한국의 개신교들이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국가담론과 개인화 과정을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전통적인 사회과학의 분류에 따르면 종교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적 영역에 해당하지만, 한국에서 위세를 떨치는 몇 개의 대형교회를 보면 교회가 더 이상의 영혼의 구제에만 머물고 있지 않다. 한국 보수단체의 대표적인 인사들이 개신교의 목사라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대형교회의 목사들은 설교나 책자를 통해서 신도들에게 일정한 정치적 정향을 자신도 모르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1990년대 이후 한국교회의 양적성장, 특히 해외선교가 활성화되면서 교회는 한국의 세계화담론을 전파하는 중요한 이데올로기 국가장치가 되었다. 특히 교회에서 신도들을 훈련하는 방식, 예컨대 사명선언문 쓰기, 묵상하기, 규칙적인 기도시간 갖기 등은 성공하는 처세술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예를 들어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 나타나는 자아에 대한 세부적인 반성, 서술, 평가시스템들은 모두 교회가 신도들을 훈련시키는 방식을 답습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박세일이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적 인간형(창조성, 자기개발 등등)이 일반 개인들에게 전파되는 경로이다.
시민사회를 거친 담론의 영향력은 개인에게 출판물을 통해서 전달된다. 한국에서 출판은 개인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매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보면 도서가 개인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출판은 특히 개인이 정치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을 치밀하게 조정한다. 오늘날 한국에서 공식적인 정치언어들은 대부분 학문적 훈련을 요구하는 것들이며, 따라서 보통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가 없다. 세계화와 관련된 포스트 포디즘, 노동의 유연성, 생산적 복지 등은 상당수준의 사회과학훈련을 거쳐야만 알 수 있는 개념들이다. 따라서 보통사람들은 간접적인 정치적 상징을 통해서 실제를 이해하게 된다. 여기에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책들이 민중의 정치적 표상을 결정한다. 박세일 담론의 효과는 사실 이러한 우회로를 거쳐 개인들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따라서 민중들이 가장 많이 읽었던 베스트 셀러의 목록을 살펴보면 당대의 의식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또 한 시대를 다른 시대의 정신구조와 비교할 때도 베스트 목록은 매우 유용한 척도가 될 수 있다.
교보문고에서 발행한 1987년 베스트목록에서 1위부터 5위까지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홀로서기(시)>, <접시꽃 당신(시)>,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소설)>, <사람의 아들(소설)>, <오늘 다 못 다한 말은 (비소설)>이다. 한편 1995년 베스트 목록 5개는 아래와 같다. <성공하는 사람의 7가지 습관(경영)>, ><컴퓨터 길라잡이(컴퓨텨)>,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영어)>, <고등어(소설)>, <신화는 없다(비소설)>이다. 한편 2007년 목록은 아래와 같다. <시크릿(경제경영)>, <파피용(소설)>, <대한민국 20대 재테크에 미쳐라(경제경영)>, <이기는 습관(경제경영)>,<해커스 뉴토익 reading(영어)>이다. 이처럼 베스트 목록의 변화만을 놓고 보더라도 한국사회에서 개인들의 정보습득과정이 압도적으로 기능적인 경영학, 처세술, 영어에 치중되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경영학 관련 서적은 미국의 경제패러다임과 자본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박세일의 세계화론이 경영학담론의 지원을 받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 진보담론의 문제점과 제안
이러한 관찰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보수담론의 위력이 개인의 창의성이나 논리력에서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실 박세일의 담론을 논리수준에서 비판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조금만 천착하면 그가 어떤 책을 참고로 자신의 언어를 축조해내고 있는지 밝혀낼 수가 있다. 그런데 그의 담론은 국제사회, 시민사회, 개인화 수준에서 모두 협조체제를 갖추어 하나의 시대정신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것이 무섭다. 즉 "워싱턴 컨센서스"(국제수준), "기업경쟁력 강화"(시민사회), "성공의 조건"(개인화수준)같은 담론이 박세일의 "창조적 세계화론"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담론이 진보학자들의 눈에는 매우 유치해 보여도 일반국민들은 이 모든 담론들을 하나의 화음으로 듣고 있으며,
그 효과는 대단하다. 이제는 어쩌면 논리가 아니라 협화음이 중요한 시대이다.
이것이 오늘날 진보담론이 맞이한 위기상황이다. 대체로 진보담론은 국가수준의 담론, 간혹 시민사회 수준의 담론을 갖추고 있기는 하지만 국제수준이나 개인화수준의 담론이 정비되지 못한 상태이다. 더구나 국가수준의 담론이나 시민사회의 담론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해 화음으로 들리지 않는다. 예를 들어 최근 진보진영에서 역동적 복지국가를 제안하고 있는데, 이것이 시민사회에서 강조하는 생태민주주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에서 중도 진보를 대표하는 최장집의 민주화 이론, 임혁백의 민주주의 이론도 사실은 1980년대 윌슨센터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 낸 "민주주의 이행론"의 아류라는 사실이다. 최장집의 박사학위 지도교수였던 아담 쉐보르스키는 폴랜드 출신의 맑시스트였으나, 80년대 후반이후 윌슨센터의 프로젝트에 동원되면서 미국학계에 적응하게 된다. 미국사회에서 맑시즘을 가르치는 교수가 과연 생존할 수 있을까 ? <자본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맑시즘을 견지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려는 시도였다면, <국가와 시장>, <민주주의 와 시장>, <민주주의와 발전>들은 민주주의 이행론의 패러다임에서 작성된 전형적인 프로젝트 결과물들이다. 초창기 쉐보르스키에서 배운 최장집에게 비교적 맑시즘의 색깔이 남아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에 비하여 임혁백은 쉐보르스키 후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시카고에서 유학생활을 했고, 그러한 이유에서인지 그가 수입하는 담론은 주로 민주주의 이행론에 해당하는 책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장집 자신도 민주주의 이론을 보편성의 틀 안에서 이해했고, 그것을 한국사회에 그대로 적용하려했다는 점에서 보면 미국의 세계전략과 학문전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가 자주 인용했던 뤼시마이어의 <자본주의 발전과 민주주의>는 챨스 틸리의 <국민국가의 형성과 계보>와 함께 근대화 프로젝트에서 만들어진 홍보물로 제 3세계의 민주발전의 전형을 미국으로 바라보도록 만든 이데올로기 선전물이었다. 한국진보진영이 최장집을 통해서 한국의 민주주의 미래를 구상했던 것 자체가 웃지 못할 아이러니였는지도 모른다. 결국 한국에서는 진보지식마저도 학문의 식민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닌가 !
그런데 최장집의 담론이 그나마 한국에서 진보담론으로 인정받고 일반 국민들에게도 통용될 수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보통사람들이 담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수준을 늘 의식하고 진보담론을 구성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적어도 최장집의 민주화이론들은 당대에 국제수준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시민사회 수준에서 상식적인 반향을 일으킬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정치현실과도 밀접하게 연결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와 비교하여 좀더 급진적인 진보담론, 이른바 대학가에서 유행하던 PD/NL담론들은 운동권 내부에서는 치열한 논쟁거리였지만 정작 일반 민중들 수준에서는 그 차이점이 뭔지, 내용이 뭔지 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80년대 대학가의 운동권 담론이 최장집 수준의 민주화이론과 서로 조응하여 1987년 체제를 만들어 내는 기폭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보운동 진영이 이러한 운동의 성과를 담론의 성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당대의 운동성과는 구조적 모순이 극에 달해 시민사회가 자동적으로 폭발한 것이지, 이론과 담론효과가 민중들에게 전달되었던 것은 아니다.
현재 한국 진보진영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전히 국가수준의 담론에 매몰되고 있으며, 이념적 진정성에 집착하고 있을 뿐, 이것이 시민사회에서 어떤 조응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지 않는다. 또 국제담론에 어떤 대응을 내놓을지도 분명하지 않다. 사실 진보진영이 큰 틀에서 제시하고 있는 복지국가론, 사회민주주의도 따지고 보면 60년대 근대화모델의 아류일 수 있다. 물론 우리는 19세기 서유럽의 모델을 머릿속에 염두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놓고 보면 서유럽이건 미국이건 산업자본주의 맥락에서 복지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후기 포스트 포디즘 시대에도 여전히 복지국가가 가능할 까 ? 투기자본의 세계화를 맞이한 시대에 노동자 복지는 어떻게 가능할 까 ? 국제화를 맞이하여 과연 대학의 법인화를 끝까지 저지할 수 있을까 ?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은 매우 구체적이고 매우 급박하다. 대안을 만들어 내야하고, 각각의 대답들이 국제수준-정치사회-시민사회-개인화수준에서 서로 조응하여 화음으로 국민들에게 들려야 한다.
이러한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80년대의 원칙론을 버리고 정치언어를 시장의 논리, 언어게임의 논리로 이해해야 한다. 수용자의 입장에서 담론을 바라보고 생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소위 진보진영의 이론가라는 사람들이 기대고 있는 학자들은 주로 서유럽의 맑시스트들이다. 그들의 학문적 깊이를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상적 배경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반향을 일으킬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과연 푸코, 들뢰즈, 네그리의 맑시즘으로 한국의 사회문제에 응답할 수 있을까 ? 80년대 운동권 논리가 현재 고집스러운 아집으로 전락할 처지에 이르렀다. 더구나 오늘날의 한국정치는 개별화되고, 일상생활에 깊이 스며있는데 아직도 사회운동의 구호는 반이명박 연대, 노동자연대 등등과 같이 거대담론의 수준에 멈추어서 있다. 계급이 아니라 직업군, 세대군, 학력차별군 등으로 현실적인 행위이론을 생산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개인화 차원에서 진보진영이 준비한 담론은 실로 보잘 것 없다. 아직도 노동자 계급의 투쟁의식을 강조하는 수준이라면 보통사람들을 설득할 수가 없다. 오늘날 개인들은 노동자이면서도 이미 부르조아적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으며, 중산층이면서도 건전한 공익의식을 포기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저들의 행동을 허위의식이라고 비난 할 수도 없다. 더 이상 그들은 이성적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성의 껍데기를 채우고 있는 내용물은 욕망, 감정, 불안, 열등감이며 이것은 주로 소비광고, 영화, 드라마, 노래들에 의해서 채워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개인들의 주체화과정을 '욕망의 정치'라는 패러다임에서 분석할 필요가 있으며, 이러한 주체형성과정이 담론의 효과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도 차후에 밝혀져야 한다. 시간은 그리 많지 않은데 진보진영이 학문적 수준에서도 할 일이 많다. 진보진영도 보수진영이 하듯이 거대한 틀에서 전략적 담론을 만들어 갈 통일된 조직이 필요하다. 영민한 통찰력과 매우 유연한 전략적 자세가 그 어느 때 보다 필요한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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