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7일 미 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 나선 글린 데이비스 대북정책 특별대표는 평화적 방법으로 비핵화를 실현하려는 미국의 최종 목표는 대화를 필요로 한다면서도 "북한의 무모한 도발들이 대화 재개의 문턱을 확실히 높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대화를 위한 대화를 하지 않을 것"이라며 "진지하고도 신뢰할 만한 협상은 북한이 9.19 공동성명의 의무와 공약을 충족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는 태도 변화를 요구한다고 강조했다.'북한의 선 변화, 후 협상' 기조를 명확히 한 셈이다.
▲ 북핵 6자회담 미국측 수석대표인 글린 데이비스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 ⓒ뉴시스 |
실패한 정책 되풀이하나?
데이비스는 또한 다섯 가지 대북정책의 원칙도 밝혔다. 첫째 "미국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할 수 없다." 둘째, "미국은 북한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보상하지 않을 것이다." 셋째, "미국은 북한이 단순히 대화에 복귀하는 것을 보상하지 않을 것이다." 넷째, "미국은 남북관계와 인권 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면 북한과의 근본적인 관계 개선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다섯째, "우리는 북한이 주변국들을 도발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데이비스는 "이러한 입장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북핵 문제 해결 방안으로 한-미-일 공조 체계 및 중국을 통한 대북 압박을 핵심으로 삼겠다는 의사도 피력했다. 기존 입장과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들이다.
주목할 점은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태도이다. 데이비스는 북한의 인권 상황을 맹비난하면서 "인권 상황의 개선은 미국 대북정책의 통합적 부분이고 북한이 인권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북미관계의 전망에 중대한 영향을 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두 가지 접근법을 설명했다. 하나는 유엔인권이사회(UNHRC)가 북한의 인권 탄압 행위를 파악할 조사위원회를 설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에 대해 적극 지지하고 협력하겠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국제기구 및 비정부단체, 그리고 대북 방송 기관들과 적극 협력해 "북한 내부로 독립적인 정보를 유입"시키겠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북한 주민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장기적으로는 시민사회의 발전을 위한 씨앗을 뿌리겠다"고 밝혔다. 미국 의회가 북한 인권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데이비스의 발언은 의회의 요구에 대한 화답의 성격도 지니지만, 북한의 강력한 반발을 야기해 북미관계 및 한반도 정세에 또 다른 악재가 될 공산도 크다.
3월 11일 뉴욕 아시아 소사이어티 연설에 나선 톰 도닐런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이 밝힌 대북정책의 내용도 한반도 정세의 극적인 전환을 기대하기에는 크게 미흡하다. 그는 "미국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도 않고 북한이 미국을 겨냥한 핵미사일 개발 시도를 방관하지도 않을 것"이라며 네 가지 대북정책의 핵심 원칙을 밝혔다. 첫째는 "북한이 한-미-일 사이의 틈새를 이용하려는 시대는 끝났다"며 세 나라 사이의 대북정책 공조를 강화하고, 미·중 협력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둘째는 "악행을 보상하지 않을 것"이며 진지한 협상을 위해서는 북한의 태도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미국 본토와 동맹국 방위를 확고히 하겠다며, 특히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사용뿐만 아니라 핵무기나 핵물질을 다른 나라나 비국가 행위자에게 이전하는 것은 미국과 동맹국들에게 중대한 위협이고 이에 따라 북한은 그 결과에 대해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끝으로, "미국은 북한으로 하여금 더 좋은 길을 선택하도록 계속 독려할 것"이라며 북한이 태도를 변화하면 미국은 진지한 협상에 나설 용의가 있다고 강조했다.
'버마(미얀마) 모델'?
최근 미국의 고위 당국자들이 대북정책과 관련해 강조하고 있는 것이 '버마 모델'이다. 데이비스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2012년 11월 버마 방문 중에 "미국은 북한이 핵무기를 내려놓고 평화와 번영의 길을 가기를 원하고 있으며 그렇게 한다면 미국으로부터 도움의 손길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힌 것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북한은 도발로 응수해 미국을 실망시켰다고 비판했다.
도닐런의 버마 사례 제시는 더욱 구체적이다. 그는 "오바마 대통령은 불끈 쥔 주먹을 푸는 나라들에겐 손을 내민다"며, "오바마 대통령의 약속에 의심을 품는 사람이 있다면 버마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양곤을 방문한 것은 적대적으로 낙인찍힌 관계도 위대한 협력의 관계로 전환할 용의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며 "버마는 주민들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고립을 탈피하고 문호를 개방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북한도 버마의 길을 갈 수 있다며 "북한이 기존의 약속과 스스로 한 말을 지키고 국제법을 존중"하려는 진지함을 보여준다면 미국은 적극적인 협상에 나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2기 오바마 행정부가 대북정책의 화두처럼 들고 나온 '버마 모델'은 어느 정도의 적실성이 있는 것일까? 10여 년간 국무부에서 대북정책을 다뤘었고 2008년 오바마 캠프에서 북한팀장을 맡았었던 조엘 위트의 평가는 정곡을 찌른다. 그는 평화네트워크와의 인터뷰(☞관련기사 바로 보기)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버마 발언은 "의미 없는 이야기"라며 과거 클린턴 행정부도 오늘날 오바마 행정부도 수없이 반복해온 것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오바마 대통령이나 행정부 관리들의 언급은 언제 한 것이든 새로울 것이 전혀 없고 일종의 레토릭"이고, "미국이 진지하게 북한 문제를 대하고 있지 않음을 상징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일침을 놓았다.
기실 미국이 '버마 모델'을 강조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프로파간다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렵다. 미국-버마 관계와 북미관계의 근본적인 차이를 외면한 채, '북한은 버마처럼 좋은 길이 있는데 왜 거부하느냐'는 정치적 공세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대량살상무기를 자발적으로 포기해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이뤘다는 '리비아 모델'을 강조했던 것과도 대단히 흡사하다. 그러나 핵 개발을 포기했던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은 서방세계의 군사적 개입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는 북한으로 하여금 "핵 억제력"에 더더욱 집착하게 만들었다. 한마디로 '리비아 역효과'였던 셈이다.
주먹은 동시에 풀어야
미국은 버마처럼 북한에게 주먹을 풀 것을 요구한다. 핵과 미사일 개발을 포기하면 미국이 손을 내밀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버마는 미국을 향해 주먹을 쥐지 않았다. 미국도 버마의 군부 독재와 민주화 운동 및 인권 탄압에는 비판적이었지만, 직접적인 군사 위협을 가하진 않았다. 더구나 오바마 행정부가 버마에 정성을 들이는 데에는 중국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깔려 있다.
그러나 북한은 다르다. 북한이 핵미사일이라는 주먹을 쥐려고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세계에서 가장 큰 주먹을 쥐고 있는 미국과의 오랜 적대관계에 있다. 미국과 휴전상태로 60년을 지내온 나라는 북한이 유일하다. 한국전쟁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60년 넘게 미국으로부터 지속적인 경제제재와 핵위협을 받아온 나라도 북한이 유일하다. 사정이 이렇다면 미국은 북한에게 '같이 주먹을 풀자'고 제안하는 것이 공정할 터다. 그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고 적대관계를 청산하려는 진지하고도 능동적인 자세를 보이면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에서는 이러한 접근을 찾아볼 수 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데이비스와 도닐런이 설명한 대북정책은 참신하지도 창의적이지도 않다. 힐러리 클린턴이 국무장관 시설 주문했던 "신선한 옵션"도, <뉴욕타임스>가 요구한 "창의적 사고"도 찾아볼 수 없다. 보수적 전문가인 빅터 차 전 백악관 아시아담당 보좌관이 "전략적 혼수상태(strategic coma)"라고 혹평했던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를 고수하겠다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2기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의 문제점을 하나하나씩 짚어보면 아래와 같다.
우선 미국은 앞으로도 한-미-일 공조 체계를 대북정책의 핵심 수단으로 삼겠다고 한다. 1기 오바마 행정부 4년 동안 지겹도록 들어왔던 얘기이다. 더구나 이러한 접근은 '미국이 북한의 위협을 구실로 한-미-일 삼각 동맹을 구축하려 한다'는 의구심만 증폭시킨다. 또한 중국이 대북 압박과 제재에 동참할 수 있도록 미·중 협력도 강화하겠다고 한다. 이는 부시 행정부 6년, 오바마 행정부 4년간 동북아에서 '5대1' 구도를 만들어 북한을 고립·압박하려 했으나 참담한 실패로 끝났던 사례를 떠올리게 한다. "오바마 대통령의 시도는 부시 행정부 때보다 성공적이지 못했다"며 북미 고위급 회담에 나설 것을 촉구한 <뉴욕타임스>의 사설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부시 행정부가 막판 2년간 한반도 비핵화에 중요한 진전을 이룰 수 있었던 데에는 북미 직접대화에 나선 것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은 북한의 태도 변화가 선행되지 않으면 대화를 위한 대화는 하지 않고 대북 제재는 강화하겠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대북 제재가 북한의 언행을 변화시키는 데에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는 점은 이미 충분히 입증된 터다. 북한의 태도 변화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대화와 협상이다. 그런데 미국은 대화를 통해 달성해야 할 목표를 대화의 조건으로 삼고 있다.
북한 인권문제도 중시하겠다고 한다. 100% 동의한다. 그러나 그 접근법이 잘못됐다. 적대관계 있는 어느 일방이 상대방의 인권문제를 제기하려면 관계 개선과 신뢰 구축이 병행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 2011~12년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북한이 로버트 킹 대북인권특사의 방북을 승인하는 등 인권 대화에 나설 수 있었던 데에는 오바마 행정부의 인도적 지원에 대한 적극적 자세가 주효했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를 이유로 대북 지원 방침을 철회했다. "인도적 지원과 정치를 분리한다"는 오랜 외교 원칙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미국이 진정 북한 주민들의 인권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면 "식량지원을 중단하는 것은 명백한 인권침해"라고 일갈했던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발언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또 한 가지. 미국 정부가 북한 인권문제 대책으로 여러 가지 방안을 내놓는 것은 국내외적으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북한 인권문제 개선에는 실효적인 효과가 없고 오히려 북한으로 하여금 리비아 사례를 떠올리게 만들어 "핵 억제력"에 더더욱 집착하게 만들 것이다.
북한은 핵의 위력을 믿고 군사 모험주의적 행태를 강화하고 있다. 북한 주민의 생존권과 인권 상황도 개탄스럽다. 그러나 북한 문제의 크기와 심각성에 비해 미국은 문제의 본질을 외면한 채 다람쥐 쳇바퀴만 계속 돌리고 있다. 이제 북한은 거친 입을 다물고 협상의 문을 열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미국도 '무언가 하고 있다'는 보여주기식 대북정책에서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는 전략적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 두 나라로 하여금 움켜쥔 주먹을 풀고 악수를 하도록 하는 몫이 한국에 있음은 물론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