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침몰 이후 군의 비밀주의가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군의 비밀주의 때문에 호미로 막을 일을 탱크로도 막을 수 없는 사태로 번지고 있다. 생때같은 젊은 병사 46명이 차디찬 바닷물 속에서 운명을 달리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무엇인가를 숨기기 위한 군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군이 감춰야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생명의 위협 속에서 촌각을 다투던 46명의 병사들에 대한 구조보다 감춰야 하는 것의 가치가 더 컸을까? 물론, 국가 안보를 위해 보안을 생명처럼 다루는 군에서 국민들의 알권리를 희생하면서도 반드시 지켜야할 가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경우에는 숨기고 싶은 것의 가치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신속하게 젊은 병사들의 생명을 구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에 당연히 우선순위를 두었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설사 보안이 일부 누설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오히려 군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를 더 튼튼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천안함 침몰 이후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것은 군이 허둥대고 둘러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군이 과연 전시 비상상황에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수 있을지 의구심이 갈 지경이다. 신뢰의 위기이다. 군에 대한 신뢰의 위기는 '안보의 붕괴'(security collapse)로 이어지는 심각한 것이다.
▲ 12일 천안함 함미 이동중 MBC |
진상규명을 차기 정권으로 넘길 것인가?
현대 안보에서는 군이 국민과 소통하지 못하면 보안을 통해 지키고자 하는 가치를 오히려 잃어버리게 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초래한다.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국민들의 알권리에 대한 의식이 높아지는 상황에서는 국민과 군이 한마음 한뜻이 되는 것이 가장 효율적으로 안보를 지키는 방법이다. 국민이 군을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안보가 가능하겠는가?
우리의 현대사에서 군의 정치 개입은 오랫동안 군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가져왔다. 우리 군의 역사에서 이것만큼 불명예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천안함 침몰에 대한 군의 잘못된 대응으로 또다시 군은 불명예를 자초하고 있다. 수장된 장병들의 넋을 진정으로 위로하는 길은 사건의 원인을 정확하게 규명하고, 구멍뚫인 국가안보 시스템을 재건하는 것이다.
벌써부터 천안함 침몰 사건이 영구미제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그것은 천안함 사건이 지속적으로 사회적인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말이다. 장기적으로 혼란을 초래할 것이라는 뜻에 다름 아니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광주에서 발생한 시민 학살은 10년 동안 사회 갈등의 핵심 현안이 되었다. '광주학살 진상규명'은 80년대 10년간 가장 뜨거운 이슈였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노태우 군사정권으로 정권 재창출을 성공했지만 진상규명 요구는 노태우 정권에서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지금 이명박 정부가 미제사건으로 처리해버릴 경우 2013년 차기 정권이 들어서면 '천안함 침몰 진상규명'은 다시 한 번 한국 사회를 달구는 의제가 될 것이다. 여당이 정권을 재창출하거나 야당이 정권교체를 하거나 어느 경우에도 안보에 대해 무능했던 정권과 차별화하는 것은 새 정권이 가장 명분 있게 추구할 수 있는 정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전임 정권이 추진했던 정책에 대해 후임 정권이 정치적·법적으로 심판하는 일이 재발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사건을 은폐하는 것에 대한 진상 조사는 정책에 대한 심판이 아니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는 후임 정권에 의해서 천안함의 진상이 밝혀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해서는 안 된다.
진실이 최선의 정책이다
지금은 미국이 1960년대 통킹만 사건을 미제로 처리했던 것과 같은 시대가 아니다. 정보통신과 과학기술의 발달은 진실의 영구 은폐를 불가능하게 할 것이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이명박 대통령이 쥐고 있다. 대통령은 스스로 강조했던 대로 한 치의 의혹도 없이 이 사건을 규명해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사건 초기부터 진실 은폐로 초지일관한 군을 국민과 소통하는 군으로 만들기 위한 혁신적인 군 개혁 추진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천안함 침몰에 대한 사고 원인 규명 및 진상 조사도 이런 차원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진실이 최선의 정책"이라는 원칙에 입각해 의혹이 가는 모든 것을 규명해야 한다. 더 이상 군사기밀이라는 이유로 국가 안보의 균열상태가 심해지는 것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군이 국민들에게 이솝우화의 양치기 소년 같이 여겨지는 상황이다. 어떠한 군사기밀도 이러한 안보균열 상태보다 더 우선적인 가치를 가질 수 없다.
닉슨의 하야는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은폐에서 비롯되었고, 6월항쟁도 박종철 고문 은폐 기도에서부터 시작하였다. 대통령이 책임지고 한 치의 의혹도 없는 진상규명에 나설 때 군과 국민 사이에 신뢰가 회복되기 시작할 것이며, 이명박 정부 역시 영예로운 성과를 남기게 될 것이다.
선체를 완전히 인양하면 진실은 조금씩 밝혀질 것이지만, 정확한 원인규명을 위해서는 사건의 배경에 대한 철저한 파악이 필요하다. 트럭이 언덕길에서 미끄러져 추락했을 때, 트럭의 파손상태, 도로의 상태 등에 대한 조사과 함께 트럭이 어떤 목적으로 언덕길을 운행했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긴급한 업무 수행으로 긴장도가 높은 상태였다면 평상시에 피할 수 있는 요인들도 사고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미 군사훈련과 천안함, 오비이락인가?
3월 26일 사건 당일에는 서해상에서 한미 합동 독수리훈련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천안함이 침몰한 백령도 일대에는 이례적으로 천안함 뿐만 아니라 속초함, 성남함 등 초계함 3척과 초계함보다도 규모가 큰 호위함인 전남함까지 전개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대형 함정들이 백령도 일대에 배치된 것은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것인가?
함참은 한미합동훈련인 독수리 훈련과 백령도 일대에 대형함정 4척이 전개된 훈련에 대해 "(양측이) 전혀 별개의 지역에서 별개의 목적으로 기동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국방부 장관은 독수리훈련은 백령도 일대에서 실시되지 않았고, 한미 합동 훈련 중 오폭 사고의 가능성에 대한 일부 언론의 보도에 대해서도 단호히 부정하였다.
백령도 일대에서 독수리훈련이 실시되지 않았고, 천안함 침몰은 독수리훈련 중 발생한 오폭이 아니라는 군의 해명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왜 4척이나 되는 대형 함정이 백령도 일대에 배치되어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충분조건은 아니다. 그 이유를 설명해야만 천안함의 침몰 이유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지금 상태에서는 좌초, 내부폭발, 피로파괴 등의 가능성은 점차 약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외부폭발의 경우도 현재로서는 뾰쪽한 증거가 나오고 있지 않다. 이렇게 미스터리한 사건으로 귀결되고 있는 것은 사건의 배경을 충분히 살피지 않으며 접근하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평상시 사고 원인이 될 수 없는 것도 긴장도가 높은 상태에서는 사고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다시 사고배경부터 차근차근 짚어가는 접근법이 필요하다. 미제사건이 되어 장기적인 국가적 갈등요인으로 비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해군참모총장이 천안함 침몰 1주일전인 3월 19일에 취임하면서 NLL(북방한계선) 사수 의지를 밝혔고, 서해 먼 바다 인근에서 독수리훈련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정황은 26일 당시 서해상에서 뭔가 긴박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음을 추정하게 한다. 결국 의혹을 밝히는 핵심은 원점으로 돌아가서 왜 천안함이 그날 거기에 있었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 워싱턴에서 열린 핵안보 정상회의에서 만난 이명박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서울 핵안보 정상회의 성공의 열쇠도 천안함 진상규명이 가지고 있다. ⓒ청와대 |
이명박 정부에게 주어진 '소명'
증거가 없는데도 북한의 소행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은 다소 의도적이다. 과거 1980년대 말 90년대 초반 술자리에서 마음껏 욕해도 된다는 네 가지 대상에 대한 농담이 있었다. 전라도, 여성, 정치인, 북한이 그것이다. 북한 연루 가능성을 처음부터 배제할 수 없다 치더라도 증거도 없는데 북한의 소행으로 몰고 가는 것은 한국 사회가 후진화되고 있다는 징표가 하나 더 늘어나는 것일 뿐이다. 역사가 퇴행의 길을 걷게 될 수도 있다.
미국의 워싱턴 DC에서 열린 핵안보 정상회의에서 2차 핵안보정상회의를 2012년 한국에서 개최하기로 했다. 이명박 정부는 2012년 핵안보 정상회의를 '핵 없는 세계'를 실질적으로 만드는데 기여하는 성공한 회의로 만들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번 위싱턴 정상회담은 '핵 없는 세계'라는 오바마의 원대한 구상과 달리 '속 빈 강정'이 되어버렸다. 핵무기 감축에는 접근하지도 못하고 칠레, 우크라이나, 캐나다, 멕시코 등 4개국의 농축우라늄 폐기 정도에 만족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핵보유국인 북한이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핵무기 감축의 성과는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2012년 회담에서는 '핵 없는 세계'와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실질적인 진전이 있지 않으면 지금부터 누적되기 시작한 실망이 좌절로 급속하게 전락하는 회담이 될 수도 있다. 반면 이명박 정부가 오바마 정부의 협조를 이끌어서 남북관계를 진전시켜낸다면 한반도 비핵화라는 성과를 2012년 핵안보 정상회의에서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천안함 침몰을 북한의 소행으로 몰고 가는 분위기 속에서 3차 남북 정상회담은 물 건너 갔다는 비관적 전망이 우세하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이 천안함 침몰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고, 북미 긴장관계를 중재해내는 역할을 한다면 남북 정상회담은 불가능하지 않다. 오히려 남북 정상회담과 핵 정상회담을 연동시키면서 남북관계와 세계적인 핵감축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게 될 가능성이 더 커진다.
이는 어쩌면 이명박 정부에게 주어졌지만 아직은 의식하지 못하는 숙명일 수도 있다. 천안함 침몰에 대한 냉철한 접근과 의혹 규명은 역사가 주춤거리는 것을 막을 뿐만 아니라, 이명박 정부에게도 정치적인 성과를 안길 것이다.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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