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포커스>는 극동문제연구소의 교수진과 외부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한반도 문제 관련 정책소식지입니다. 이번 6호는 '남북정상회담, 가능성과 조건'을 주제로 6편의 글이 실렸습니다. 3월 첫째 주 동안 매일 1편씩 소개됩니다.
1972년 설립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는 북한·통일 문제에 관한 연구와 정책 제안 활동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는 최고의 민간 연구기관입니다. <편집자>
이명박 대통령의 <BBC> 방송 인터뷰를 계기로 남북정상회담 논의가 급물살을 타더니, 지금은 정중동의 숨고르기에 나서는 모양이다. '연내에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성사 직전의 뉘앙스에서 '회담 성사를 위한 어떤 대가도 있을 수 없다'는 단호함으로 바뀌었다. 관련 장관들의 입장도 '언제 어디서든 정상회담은 가능하다'는 일반적 원칙을 강조할 뿐, 구체적 진전 상황에는 묵묵부답이다. 성사 가능성은 열려 있지만 아직은 무르익지 않은 듯하다.
정중동의 남북정상회담
수면 아래로 잠복해 일정한 숨고르기를 하고 있지만 여전히 남북정상회담은 진행형이고 가능성의 영역에 놓여 있다. 고위급 인사의 싱가포르 대북 접촉과 통일부 당국자의 개성 접촉은 이미 확인된 상태다. 대통령의 인터뷰 발언을 자의적으로 수정해야 했던 청와대 대변인의 소동은 역설적으로 정상회담 진행의 신빙성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기왕에 남북정상회담이 논의되고 있고 여전히 진행 중이라면 당연히 성공적인 정상회담이 되도록 해야 한다. 논의만 무성한 채 서로 상처를 입히며 실패로 끝나는 정상회담이라면 아니한 만 못하다. 그리고 민족의 미래와 한반도의 평화에 기여하는 성공적인 정상회담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견지해야 할 몇 가지의 조건이 있다.
무엇보다 남북정상회담은 당사자의 진정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정부 출범 이후 이명박 정부는 북에 대해 진정성을 요구해왔다. 북이 진정성을 보인다면 대북 지원도, 대북 대화도 언제든지 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맞는 이야기다. 그러나 진정성을 보여야 함은 남과 북 모두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민족의 화해와 남북관계 개선, 그리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진정성은 오히려 남쪽이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이제 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 이명박 정부는 그동안 북에 요구했던 진정성을 스스로 보여줘야 한다.
회담 필요성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진정성
첫째, 정상회담의 필요성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진정성이 명확히 입증되어야 한다. 도대체 남북정상회담을 왜 하려 하고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지 분명한 태도를 정해야 한다. 정상회담을 행여라도 대북 굴복의 수단으로 간주하고 접근한다면 애초부터 회담 성사는 불가능하다.
적대와 갈등의 분단국 정상회담이라는 애초의 필요성과 정당성으로 돌아가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해야 한다. 오랜 대결을 끝내고 화해와 협력의 남북관계를 촉진하며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고 한반도 평화를 진전시키는 데서 분단국의 정상회담은 가장 유용하고 효율적인 대화 채널이다. 최고위급이 만나 얽힌 현안을 풀고 갈등을 협력으로 전변시키는 정상회담이야말로 적대와 대결로 점철된 분단국가의 필수불가결한 해결방식인 것이다.
이를 전제한다면 이명박 정부는 남북정상회담의 필요성과 목적에 대해 가장 원칙적이고 보편적인 입장으로 복귀해서 스스로를 다짐해야 한다. 김정일 위원장과 만나 갈등의 남북관계를 화해의 남북관계로 개선하고 긴장의 한반도를 평화의 한반도로 바꾸는데 기여하는 목적이야말로 남북정상회담 개최의 알파이자 오메가임을 시종일관 견지해야 한다.
그러나 회담의 필요성에 대한 진정성 대신 북의 정상회담 구애를 지렛대로 삼아 북한을 길들이고 굴복시키려는 호재로 활용하려 한다면 이는 역사적 정당성의 정상회담을 한낱 힘겨루기의 수단으로 폄하하는 것에 불과하다. 북이 아쉬운 입장이니 이참에 북한의 버릇을 고치고 유순하게 길들이겠다는 심산에서 지금 정상회담에 접근한다면 이는 성사되지도, 성공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정상회담 논의 자체가 남북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뿐이다.
정상회담에 적극적인 북한을 마치 경제적 필요 때문에 자존심도 버리는 처지로 간주하고, 이를 기회로 우리 정부의 대북 요구를 철저히 관철시키고 북한에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정서가 이명박 정부 내부에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 해 접촉에서 회담 성사의 조건으로 서울 답방을 요구하고 다음엔 비핵화 진전을 요구하고, 또 그 다음엔 국군포로·납북자 송환을 요구하면서 수시로 북을 몰아세우는 것은 회담 성사보다 북한 길들이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의구심을 낳기에 충분하다. 북이 굴복하기 전에는 그 어떤 남북대화도 진전시키지 말고 민간차원의 소소한 대북지원도 불허해야 한다고 결정했다는 전언도 들린다. 이명박 대통령의 뜻에 따라 유일하게 허용된 대북 협력 사업이었던 북한 산림녹화마저 북이 선뜻 받겠다고 하자 서둘러 거부 입장으로 바뀐 것도 석연치 않다. 조계종에서 순수한 뜻으로 금강산 법회를 갖겠다는 것도 정부는 뚜렷한 이유 없이 불허했다.
남북정상회담에 나서는 북한의 태도를 대북 제재와 내부 이상의 효과로 간주하고 단호한 기다림이 결국엔 북의 완전굴복을 가져올 것이라는 희망 섞인 주관적 기대에 사로잡혀 민족의 화해와 한반도 평화에 기여해야 할 역사적 정당성의 남북정상회담을 북한 길들이기의 정치적 수단으로 자리매김한다면 지금의 정상회담 논의는 처음부터 성공할 수 없는 것이 된다.
합의 및 이행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진정성
둘째, 정상회담에서의 합의와 이후 실천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진정성을 보여줘야 한다. 이제 정상회담은 만나는 것 자체만으로 성공이라고 할 수 없다. 역사상 최초의 정상회담이라면 분단 상대방의 최고지도자가 직접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상호 인정과 공존의 남북관계를 확인했다는 점에서 일단은 성공한 것이었다. 그러나 3차를 맞는 이번 정상회담은 양 정상의 악수와 포옹만으로 성공을 보장하기 힘들다. 만나서 유의미한 성과를 내야하고, 그것은 생산적 합의와 구속력 있는 이행을 담보하는 것이어야 한다.
당장 회담 성사만을 놓고 남북이 힘겨루기만 할 게 아니라 회담 개최 이후 남북이 합의 가능한 의제와 요구 사항을 준비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만났으되 도저히 합의가 불가능한 최대목표의 요구만을 서로 되뇌인다면 정상회담은 열리지만 결렬되고 말 것이다. 임동원 전 장관의 회고록에 나오듯이 2000년 정상회담에서 북이 금수산 기념궁전 참배를 끝까지 강요했다면 「6.15 공동선언」은 빛을 보지 못했고, 역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은 실패한 회담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상대방이 도저히 수용하기 힘든 요구를 전면에 내걸고 그것만 고집한다면 정상회담은 성공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를 감안한다면, 지금 이명박 정부가 회담 성사의 조건으로 내걸고 있는 것들이 사실 진정으로 합의 가능한 것인지 스스로 자문해봐야 한다. 일관되게 이명박 정부는 비핵화 진전을 정상회담 의제로 분명히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북핵문제는 사안의 본질상 남북 정상이 만나 단숨에 만족할 만한 진전이나 깔끔한 해결을 도출하기 힘들다는 것을 이명박 정부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
아무리 북이 양보한다 하더라도 남북정상회담에서 이른바 그랜드 바겐이 요구하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핵폐기의 진전이 가시화될 수는 없다. 김정일 위원장이 아무리 절실하고 급박하다 한들 이명박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플루토늄'을 덥썩 내놓거나 '핵무기'를 순순히 손에 쥐어 줄 리는 없기 때문이다. 정상회담에서 합의 가능한 의제와 수준을 뛰어 넘어 그저 감정적으로 정상회담 한 방에 핵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심산이라면 과연 합의를 원하는지에 대한 진정성을 처음부터 의심해봐야 한다. 남북의 정상이 만나 핵문제의 '원샷' 해결이 현실적으로 어려움을 잘 알고 있기에 최근 들어 이명박 정부도 정상회담의 조건으로 핵문제 해결이 아니라 핵문제 논의로 후퇴했다.
지금 이명박 정부가 견지하고 있는 국군포로·납북자 문제 해결도 사실은 정상회담 한 번으로 말끔히 해결되기 어려운 난해한 이슈이다. 남측에겐 인도적 사안이지만, 북측은 철저히 정치적 사안으로 규정하고 있다. 시인하고 송환에 나선다 하더라도 일본의 사례에서 경험했듯이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또 다른 문제의 시작일 수 있음을 북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결코 정상회담에서 일도양단으로 해결할 수 없는 복잡한 의제가 또한 국군포로·납북자 문제인 것이다. 물론 한 두 명의 송환 성사를 회담 성공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겠지만, 근본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이뤄지는 상징적인 동행입국은 그야말로 '보여주기 위한' 이벤트성 정상회담이 될 것이다. 정상회담에서 반드시 비핵화를 진전시키고 국군포로·납북자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고집하는 것은 처음부터 합의 불가능한 의제와 목표를 걸어 놓고 상대방의 수용만을 기다림으로써 사실 회담을 성사시킬 생각보다는 북한을 굴복시킬 생각이 더 강함을 보여준다.
정상회담 합의 이후 실천의 진정성도 담보되어야 한다. 정상회담은 만나기도 어렵고 만나서 합의하기도 어렵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합의한 내용을 실천하는 것이다. 역사적 합의를 도출해놓고도 이런 저런 핑계로 서로 이행을 게을리 한다면 정상회담은 서로를 불신하는 데만 기여할 것이다. 「6.15 공동선언」은 다소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것이어서 남북관계 개선과 민족화해의 증진이라는 흐름으로도 일정한 실천을 담보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10.4 정상선언」은 남북관계의 질적 발전을 추동할 구체적인 협력 사업들이 적시되었고, 따라서 이행 여부를 정확히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10.4 정상선언」은 잊혀진 문서가 되었고, 합의이행을 주저하고 머뭇거리고 부인하는 분위기로 나아갔다. 결국엔 「10.4 정상선언」에 포함된 단 하나의 합의도 실질적으로 이행되지 못했다.최근까지도 남북관계에 긴장과 갈등이 지속된 데는 사실 「10.4 정상선언」 이행을 거부하는 이명박 정부의 고집에 기인한 바가 컸다.
결국 지금의 남북정상회담 논의가 성공으로 귀결되기 위해서는 합의에 대한 진정성과 함께 실천에 대한 진정성이 충분히 보장되어야 한다. 그리고 실천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첫 걸음은 지금이라도 이명박 정부가 앞선 1·2차 정상회담의 성과를 계승하고 합의 사항을 존중하며 이행하겠다는 의지를 명확히 밝히는 길이다. 정부 스스로 3차 정상회담이라고 명명하면서 1차와 2차의 정상회담을 부인하고 합의사항을 휴지조각으로 간주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비진정성의 상징이 될 것이다.
▲ 2000년 6월 남북의 두 정상이 역사상 처음으로 악수를 나눈지 10년이 지났다. ⓒ연합뉴스 |
신뢰조성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진정성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셋째, 신뢰조성의 진정성을 보여줘야 한다. 이명박 정부가 정상회담 개최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음은 자신의 주장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상호 신뢰가 형성될 때에야 읽힐 수 있다. 상대방에 대한 신뢰를 얻지 못할 때 남북정상회담은 정치적 술수와 힘겨루기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금강산 관광 개시와 대북 인도적 지원, 그리고 베를린 선언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남북의 상호 신뢰를 쌓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2007년 정상회담 역시 아무 근거 없이 성사된 것이 아니었다. 「2.13 합의」와 핵문제의 진전, 그리고 일관된 대북 화해협력으로 신뢰가 형성된 다음에야 가능한 것이었다.
지금의 남북정상회담 역시 북에 요구를 걸어 놓고 무작정 기다린다고 성사되는 게 결코 아니다. 남북이 만나 유의미한 성과를 내겠다는 상호 신뢰가 마련되어야만 최고위급의 정상회담도 기대할 만한 것이 된다. 그러나 최근 남북관계는 상호 신뢰가 아니라 상호 불신을 키워가는 형국이다. 간헐적으로 열리는 남북대화는 상호 대결을 확인하고 정당화하는 기제로만 작용하고 있다. 개성공단 실무회담에서도 이명박 정부는 공단 발전을 위한 성의 있는 태도보다 남측의 일방적 입장을 통보하는 장소로 활용하는 모양새다. 금강산 관광 실무회담 역시 북의 절실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는 관광 재개에 관심이 없고 북의 완전굴복만을 요구하고 있다. 민간이 정성들여 모은 대북 지원품을 전달하려 해도 통일부는 번번이 방북신청의 철회를 권고하고 있다. 이처럼 각종 회담과 접촉을 대북 압박의 통로로 삼는다면 일방이 굴복하지 않는 한 상호 신뢰에 의한 정상회담 성공은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진정으로 정상회담의 성사와 성공을 바란다면 조건을 달아서는 안 된다. 오바마 대통령도 '강인하고 직접적인 외교'를 내세워 북한 지도자와 만날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 '전제조건 없이'(without precondition) 만나겠다고 밝혔다. 미리 정한 조건의 수용만을 기다리며 상대방의 굴복을 강요할 게 아니라 상호 신뢰의 진정성을 보일 때에야 비로소 의미 있는 만남이 성사될 수 있을 것이다.
남북의 지도자가 진심으로 만나서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논의하는 것이 정상회담이라면 그 성공의 일관된 조건은 이명박 정부가 개최 필요성에 대한 진정성과 합의 및 실천에 대한 진정성, 그리고 상호 신뢰 마련에 진정성을 보이는 것이다. 정상회담을 대북 길들이기와 버릇 고치기의 수단으로 활용하거나, 정작 만나서도 얼굴만 붉히고 싸우고 오겠다는 오기의 대상으로 접근한다면 지금의 남북정상회담은 논의조차 할 필요가 없다.
* 원제 :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을 위한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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