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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에도 갤럭시3, 아이폰5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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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에도 갤럭시3, 아이폰5가 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곳, 가자의 오늘] 가자의 아름답고 평범한 일상

지난해 11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또 한 번의 총성이 울렸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충돌로 17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폭격의 잔해가 가자지구를 뒤덮었다. 수천 년이 지나도 여전히 계속되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은 가자지구의 사람들을 점점 사지로 몰아넣고 있다.

하지만 가자에서도 사람들의 삶은 계속되고 있다. 팔레스타인 평화연대 김태언 활동가는 지난 1월부터 가자지구를 찾아 현지의 모습을 직접 관찰하고 있다. 터널이 없으면 하루를 살아가기 힘든 가자지구의 생존 법칙부터 외지인이든 현지인이든 누구에게나 친절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족과 친구를 잃은 슬픔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까지 가자에는 다양한 삶들이 펼쳐져 있다. <프레시안>은 지난 2007년부터 팔레스타인 평화 활동을 벌여온 김태언 활동가가 전하는 현지 소식을 연재한다. <편집자>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곳, 가자의 오늘
① 지상 최대의 감옥 '가자'의 터널을 가다
② 폭격, 가족의 죽음…14살 아이 마음엔 복수심 뿐
③ "한국인들, 우리 아이들의 고통을 기억해달라"

가자는 역사상 한 번도 평화로운 적이 없었다.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던 탓에 동과 서, 남과 북으로 팽창하는 외부 군대의 필수 점령 지역이었고, 이 과정에서 끔찍한 살육, 파괴가 자행되었다. 그 비극의 역사는 4000년 전 고대 이집트에서 시작해 십자군, 나폴레옹, 대영 제국주의를 거쳐 신생국가 이스라엘의 반복된 학살까지, 완벽한 현재진행형이었다. 이스라엘 건국 후 65년간의 반복된 폭력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익숙한 가자의 이미지는 폭격, 대량 학살, 봉쇄, 점령, 저항군의 탄생지 등으로 한정되었고, 긍정적인 단어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지속된 분쟁으로 인해 사람들에게서 가자는 조금씩 잊혔고, 어느새 가자 사람들의 죽음은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서울 면적 절반밖에 되지 않는 가자엔 여전히 170만 명이란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고, 나는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을 엿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4000년이나 지속된 오래된 역사에도 불구하고 불행히도 가자는 많은 관광자원을 남기지는 못했다. 많은 침략군이 거쳐간 자리에 남아 있던 것은 오스만 제국 통치 시절 대부분 파괴됐고 그나마 남은 것도 이스라엘이 파괴했기 때문이다. 가자의 건물은 대부분 5층 미만의 돌과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다. 많은 건물이 헐벗은 회색이고, 콘크리트가 채 마르지 않은 건물이 많았다. 빈번한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인해 부서지고 다시 짓기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물 내부에 들어가 보면 놀랄 정도로 아름답게 꾸며진 집들이 많은데, 흉측한 건물 외부에 대해선 십중팔구 '어차피 부서질 거, 같은 돈으로 내부를 꾸미고 말지'란 대답을 들었다.

▲ 실크로드를 오간 상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객사 '카라반' ⓒ김태언

그래도 아직 가자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유적이 몇 군데 남아 있었다. 가자의 올드 시티 '아싸하' 지역과 칸 유니스의 중심지가 바로 그곳이다. 아싸하에서 아랍식 시장을 따라 걸으면 가자에서 가장 오래된 모스크 '자마 알 아크바르'가 보인다. 이 모스크가 있던 자리엔 원래 3세기경에 지어진 시나고그가 있었다. 이 유대회당을 십자군이 교회로 개조했고 이후 살라딘이 이 지역을 재탈환한 후 모스크로 탈바꿈시켰다. 모스크 한쪽 벽은 환하게 눈이 부신 귀금속 시장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가자 사람들은 오랜 기간 결혼예물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금붙이 시장에서 나와 조금만 걸으면 골목에 '하맘 사마라'가 나타난다. 1500년대 사마리아인이 지었던 터키식 목욕탕으로 지금까지 본래 기능을 하고 있었다. 시간에 따라 번갈아 남탕에서 여탕이 되는 이 공중목욕탕은 그 열기가 한국 사우나 이상으로 뜨거웠고, 많은 사람들의 사교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 주변으로 500미터 안에 14세기에 지어진 동방정교 교회, 모스크, 오래된 박물관 등 가자시티 내 대부분의 역사 유적들이 위치해 있다.

가자를 벗어나서는 중부도시 칸 유니스의 중앙시장이 위치한 곳에 실크로드 시절 이곳을 지나다니던 상인들을 위한 객사인 '카라반'의 입구와 벽이 남아 있었다. 카라반을 뜻하는 아랍어 "칸"을 따서 "칸 유니스"라는 이름을 지었을 정도로, 과거에 상업이 번성했던 지역임을 알 수 있었다.

덤덤하게 비극을 이겨내는 가자의 사람들

가자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친절했다. 오랜 기간 폭력에 노출되었던 사람은 외부 사람에 대해 공격적일 것이란 통념과 달랐다. 가자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친절함은 나의 고정관념을 철저히 파괴했다. 물론 아시아인이 중국인과 동일시되는 관념은 여기에서도 주효했다. "씨니(중국인)"로 시작하는 길거리 사람들의 인사에 일일이 답하며 한국을 이야기하다 보면, 5분 동안 10미터를 걷는 것조차 힘들었고, 상점 주인들은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나에게 커피라도 한잔 대접하기 위해 붙잡기 일쑤였다. 어느 나라든 보통 외국인한테는 몇 푼 더 받기 위해 가격을 속이기 마련인데, 내가 머무르는 동안 가자에서는 상점, 식당, 택시 등 단 한 번도 외국인 특별가격을 제시받아 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매우 정직했고 친절했다.

또 이들은 내면적으로 강하고 회복력이 뛰어났다. 가자에서 가족이나 친구를 이스라엘 공격으로 잃지 않은 사람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슬프지만, 다들 웃으며 덤덤하게 주변 사람들을 어떻게 잃었는지 이야기를 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폭격이 너무나 일상이 된 이곳에서는 길을 가다 벽에 붙은 죽은 사람의 사진을 보면서 그 사람의 뒷얘기 농담을 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고, 이것이 그 상실의 슬픔을 잊어버리는 방법이 되어버렸다. 죽음을 슬퍼하지만 금방 잊어버리는 것, 한창 지속되는 폭격 속에도 잠을 잘 수 있는 것, 이게 진정 그들이 말하는 '가자 사람'이었다.

▲ 가자 시내에 그려진 벽화 ⓒ김태언

가자는 사람들의 편견과 상당히 달랐다. 폭격으로 파괴된 건물을 도시 전반에 걸쳐 흔하게 볼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가자 도시 중심지는 활기찼다. 각종 옷가게, 쇼핑몰 등은 사람들이 시간을 때우는 단골 장소였고 밤에 사람들은 해안가에 위치한 카페에서 차와 물담배 등을 즐겼다. 사람들은 주로 카페의 와이파이로 페이스북을 하거나 카드 게임을 즐겼다.

가자의 밤하늘은 별이 눈부시게 밝았는데 가자의 열악한 전력사정이 한밤의 별을 밝히는 데 한몫했다. 이스라엘의 발전소 폭격 이후, 가자의 전력사정은 좋지 않아서 하루에 15시간 정도밖에 전기가 공급되지 않았고 대부분의 집과 상점에선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얻었다. 밤에 켜진 불은 곧 발전기를 뜻했고 빛이 있는 곳엔 발전기의 파괴적인 소음이 뒤따랐다. 도시 중심지를 제외하고는 불을 밝히지 않은 곳이 대부분이었고 가자 사람들의 생활패턴은 전기가 들어오는 오전 시간대로 맞춰져 있었다. 이들의 업무 시간은 대체로 점심시간 없는 오전 8시~오후 2시, 주 6일 근무였다.

가자엔 너무나도 평범하고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로 넘쳐났다.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는 대부분 한국의 현대, 기아차가 점령했고 심지어 공식 기아 대리점도 한 곳 있었다. 앵그리버드의 영향력은 전 세계적으로 엄청나서 봉쇄로 고통을 받는 가자에까지 침투할 정도였다. 사람들은 내 휴대폰이 어떤 종류인지 궁금해하며, 자기의 삼성 갤럭시3를 자랑하였고 새로 출시된 아이폰5를 사서 즐거워하는 사람들도 볼 수 있었다.

가자에는 택시는 있었지만 버스 같은 공식적인 대중교통 수단이 존재하지 않는다. 택시는 크게 세 부류로 도시 내 합승택시, 도시 간 합승택시 그리고 콜택시가 있다. 도시 내에서는 그냥 길에 서서 손을 들고 경적을 울리는 아무 차를 향해 목적지를 말하고, 가는 방향이 맞으면 1~2셰켈(한화 320-640원)을 내면 된다. 도시 간 이동을 할 때는 특정 위치에 서 있는 노란색 8인승 벤츠 택시를 타면 되는데 목적지에 따라 그 가격은 최대 5.5셰켈(한화 1760원)이었다. 콜택시는 어느 나라나 가격이 부담스러웠다.

▲ 가자 시내의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장 ⓒ김태언

가자의 음식은 주변 중동지역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과 매우 비슷했다. 이들은 주머니처럼 속이 빈 빵 '코부스'를 주식으로 다양한 채식기반의 사이드 디쉬인 홈무스, 풀, 샐러드 등을 먹었는데, 이와 같은 것들은 주로 아침에 인기가 많았다. 오전 9시~10시쯤 늦은 아침을 먹고, 점심은 보통 일이 끝난 오후 2시~4시 사이에 먹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에서, 가족들과 거한 점심을 선호했다. 수프부터 고기와 밥을 곁들인 주요리, 그리고 뼛속까지 달콤한 크나파로 디저트까지 거하게 먹은 뒤, 이후에 따로 저녁을 먹는 사람은 보기 힘들었다. 가자 사람들은 대부분 하루 두 끼만 먹었다.

가자의 바다는 푸르고 아름다웠다. 바깥세상에 비치는 가자에 대한 편견이 지중해 오른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가자 해안의 아름다움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여름에는 수영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다는 가자의 해안엔 호텔과 카페가 모여 있었고, 겨울임에도 햇살은 따뜻하고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 차를 마시며 시샤를 입에 물고 있었다. 높은 실업률 때문에 길거리에서 노는 젊은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모르고 본다면, 그 어느 지중해 해변보다 여유로워 보였을 것이다.

▲ 가자 해안가에 위치한 안 안달루시아 호텔 ⓒ김태언

눈물과 고통의 땅으로 대표되는 가자에서 나는 가자의 아름다움을 봤다. 이곳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그 어느 나라와 다를 바 없는 평화롭고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한 의지로 가득했다. 예상과 달리 우리의 일상에서 익숙한 대부분의 것들이 그들의 일상에 존재했고, 이러한 평범함을 통해 많은 비극적인 사건을 겪으면서도 살아남아 있는 그들의 강한 생명력을 엿볼 수 있었다. 짧은 기간 동안 그들 생활을 간접 체험하며 오랜 기간 동안 가자가 "가자"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의 강한 회복력, 생명력은 그들 삶의 원동력이자 외부의 힘이 절대 파괴할 수 없는 '가자의 힘'이었다. 짧은 기간 동안 내가 본 가자의 아름다움과 사람들의 친절은 떠나는 발길을 매우 무겁고 씁쓸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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