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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관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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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관Ⅱ

[한윤수의 '오랑캐꽃']<170>

이틀 후 일요일.
*공교롭게도 00국 대사관 노무관실 직원 5명이 발안 센터에 왔다.
자국 근로자를 현장에서 만나 고충을 들어보겠다는 것. 전국을 돌며 근로자를 만나볼 예정이라는데 발안이 1번 방문지로 뽑혔단다.
그들의 방문은 오전 10시 반부터 12시까지로 정해졌다. 하지만 1시간 반이라는 짧은 시간에 뭘 하겠다는 것인지?
나는 이런 행사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들의 내방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우리 센터에 도움을 주는 어느 공공기관이 중간에서 주선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던 날이 장날이라고, 날씨가 몹시 추워서 1시간 반 동안 찾아온 00국 근로자는 6명에 불과했다. 대사관 직원들은 자국 근로자들을 만나 몇 마디 나누고 사진을 찍고는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돌아갔다. 나는 다 이해했다. 왜냐하면 행사라는 건 대개 사진을 찍는 게 주목적이니까.

하지만 40대 한국인 여직원이 홀로 남았다.
그녀는 고불을 다시 도와줄 수 없는지 새삼 물었다. 물론 나는 그녀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고불은 안타깨비와 찰거머리를 합친 것 같은 인간형인데, 이런 유형에게 걸리면 전화로 한없이 닦달을 당할 테니까.
"왜 끝까지 안 도와줘요?"
또한 고불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대전 출입국도 가고 천안 노동부도 가고 경우에 따라서는 법원까지 쫓아다녀야 하는데, 대사관 직원이 무슨 열성으로 대전 출입국과 천안 노동부와 법원까지 같이 가주겠는가?
나는 그녀의 부탁을 거절했다. *다시 받아주었다간 소신껏 일을 할 수 없을 테니까.

마침 식사 시간이라 그녀를 우리가 점심을 대놓고 먹는 만호식당으로 안내했다. 가난한 센터에서 그 이상의 대접은 할 수 없기에.
5천 원짜리 가정식 백반을 먹으며 그녀가 뜻밖의 얘기를 꺼냈다.
"참! 전국의 외국인 센터에 한 가지 희망적인 소식이 있어요. 모범적인 센터 열 곳을 뽑아서 매년 한 곳 당 300만원씩 지원하기로 했거든요."
바로 이거였구나. 00국 대사관이 까닭 없이 고자세라고 생각했는데, 다 까닭이 있었구나. 바로 이 돈 때문에 민간단체를 하부기관 대하듯 했단 말인가?
내가 물었다.
"돈 받으면 뭘 해드려야 하나요?"
그녀는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매월 보고는 해주셔야죠. 물론 간단한 내용이지만."
나는 웃으며 말했다.
"발안 센터는 뽑지 마십시오."
"왜요?"
"꼬리표 달린 돈 안 받습니다."

점심 후 최초로 찾아온 00국 근로자는 손가락 끝이 약간 잘린 산재환자였다. 환자는 사장님이 산재보험으로 처리하지 않고 공상으로 처리했다며 이게 맞는 것인지 물었다. 이때 그녀가 끼어들었다.
"공상으로 처리하는 게 나아요."
남의 상담에 끼어들다니 실례 아닌가? 상담을 진행하던 우리 직원이 열 받아서 말했다.
"노동자에게는 산재로 처리하는 게 절대 유리합니다."
그녀가 다시 고집을 피웠다.
"이런 경우 산재가 유리한 건 장애보상 뿐인데, 이 정도 가지고는 장애등급이 나오기 어렵거든요."
"장애등급 판정은 의사가 하는 일 아닌가요? 왜 직접 판정을 하시죠?'
"사실은 제가 대사관에서 산재를 담당하거든요."
보다 못해 내가 나섰다.
"행정관님, 노동자한테 일방적으로 권고하시면 안 됩니다. 산재로 하든, 공상으로 하든 노동자가 선택하게 내버려두세요. 노동자는 친구도 없는 줄 아십니까? 뭐가 유리한지 그들이 더 잘 압니다."
그제서야 그녀는 수그러들었다. 나는 그녀가 왜 공상 처리를 선호하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재사건을 처리할 때 가장 큰 유혹은 사장님과 노동자 사이에서 적당히 타협을 보는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그렇지만 강자와 약자가 타협을 보면 항상 강자에게 유리한 쪽으로 결론이 나게 마련이다. 그게 바로 공상이다. 공상으로 처리하면 강자는 불만이 없으니까 아무 소리 안하고 약자는 주눅이 들어 아무 소리 못하니 조용해서 좋지 않은가? 조용하니까 중간에 선 사람이 보기에는 기막히게 잘 처리된 것처럼 보이겠지! 그래서 조용한 걸 좋아하는 상담원은 무의식중에 공상으로 처리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것이다. 회사의 산재보험료도 올라가지 않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용각산처럼 소리가 나지 않으니까!

오후 3시쯤 되어서 그녀가 본론을 꺼냈다.
"목사님, 체불임금 받아주는 소송 많이 하시죠?"
"예, 좀 합니다."
"우리 대사관에 들어오는 소송 건을 대신 좀 맡아주실 수 있나요?"
바로 이거구나! 이게 그녀가 남아 있는 주목적이구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거절했다.
"보십쇼, 우리 직원은 단 3 명입니다. 왜 직원이 20 명, 30 명 있는 센터에 도와달라고 하지, 우리같이 조그만 센터에 부탁을 하십니까?"
"소송까지 도와주는 데가 없거든요."
"하지만 생각 좀 해보세요. 지금 이 인원으론 우리가 맡은 소송도 다 감당하기 힘듭니다. 그리고 00국 대사관에는 자문 변호사가 없습니까? 도와주는 법무법인이 없습니까? 그런 데다 부탁하세요."

그녀는 그래도 남았다. 아직도 남아 있을 이유가 있나?
그녀는 우리 직원들이 퇴근하는 5시 반까지 남았다가 그날 방문한 00국 근로자의 이름을 적어갔다. 하지만 그날은 *날씨가 몹시 추워서, 그녀가 이름을 적어간 00국인은 14명에 불과했다.

*공교롭게도 :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격이라고나 할까? 시간상의 전개로만 보면 고불 사건 때문에 대사관 직원들이 방문한 것 같지만, 두 사건 간에는 아무 연관이 없다. 00국 대사관 직원들의 방문은 고불 사건 이전에 이미 확정되어 있었다.

*다시 받아주었다간 : 만일 고불 같은 고자질쟁이를 다시 받아주었다가는, 대사관에 일러바쳐 일선 센터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외국인이 속출할 것이다. 그러면 독립적으로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날씨가 몹시 추워서 : 동남아시아 인들은 날씨가 추우면 웬만해선 움직이려 들지 않기 때문에 추운 날은 상담 인원이 대폭 줄어든다. 따라서 그날 방문하여 상담한 외국인 노동자는 총 36명에 불과했고 그 중 00국 노동자는 14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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