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가냘프고 얼굴도 작고 갸름하지만, 눈망울이 커서 온통 눈밖에 안 보이는 필리핀 여성이 찾아왔다.
처음 들어와서는 웃음기가 좀 있었는데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점점 슬픈 표정으로 변하더니 급기야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린다. 사연은 이렇다.
그녀는 벽지를 만드는 회사에서 10개월 일했다. 출국 전에 3개월 그리고 재입국하고 나서 7개월. 벽지 공장은 화학약품을 많이 써서 냄새가 좀 났지만 임신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냄새가 심한 줄은 몰랐었다. 하지만 임신하고 나니 냄새가 점점 역겨워져서 도저히 못 참을 정도가 되었고 유산할지도 몰라 두려웠다. 과거에 두 번 유산한 경험이 있으니까. 사장님에게 회사를 옮기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사장님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회사를 나왔다.
"언제 나왔어요?"
"열흘 전에요"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은 비교적 합리적이고 차분한 분이었다.
"갑자기 나간다고 하니 당황했죠. 예고 없이 나가면 라인이 서거든요. 그래서 다른 근로자를 구할 때까지 2주일만 더 일해달라고 부탁했고, 그것만 지켜주면 풀어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걔가 일방적으로 약속을 깼어요. 월요일에 무단결근하더니 화요일날 나타나서는 무조건 나가겠다고 하더라구요. 황당했죠. 근로자가 너무 고집이 세고 일방통행이에요."
"혹시 언어 소통이 원활하지 못해서 생긴 오해는 아닐까요?"
"아닙니다. 저희 회사는 무역도 겸하고 있어서 영어 잘하는 사원이 꽤 있습니다. 서로 충분히 얘기하고 납득했거든요. 2주만 더 근무하기로!"
"임신 초기라 예민해서 그런 건 아닐까요?"
"아무리 임신이라고 해도 2주를 못 참습니까?"
사장님은 격앙되어 있었다.
"하긴 그러네요."
"출국 기한이 3개월밖에 안 남아서, 어떤 회사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애를 우리 회사가 받아주었습니다. 거기다가 재입국까지 시켜주었는데 회사가 아무리 싫어도 최소한의 신의는 지켜줘야죠."
"혹시 고용지원센터에 신고는 하셨습니까?"
"예, 무단이탈했다고 닷새 전에 신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불법체류자가 된 상태다.
나는 조심스럽게 타진했다.
"지금이라도 복귀할 테니, 이탈 신고를 철회하실 생각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하지만 내 오랜 경험으로 근로자가 찾아가서 잘못을 빌면 사장님이 용서해줄 것 같다는 느낌이 왔다. 한국 사람은 비는 데 약하니까.
그 길밖에 없다!
전화를 끊고 필리핀 여성에게 당부했다.
"합법 되려면 사장님에게 사과해야 되요. 가서 빌래요?"
그녀는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빌어요."
그녀는 선택했다.
나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