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과거 네 차례 화폐 개혁 중 세 차례를 화폐 교환 시작 당일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을 통해 발표했다. 이와 달리 이번에는 실행 4일이 지난 후 <조선신보>를 통해 밝힘으로써 이번 조치가 그만큼 전격적으로 단행됐으며, 내부 반발을 의식하고 있다는 해석을 낳고 있다.
<조선신보>는 '조선(북한)에서 새 화폐 발행, 교환사업 진행' 제목의 평양발 기사에서 "11월 30일부터 국가적인 조치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은행이 발행한 새 화폐와 지금까지 써오던 낡은 돈을 바꾸는 화폐교환 사업이 전국에서 일제히 진행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또 "거주지에 조직된 화폐교환소에서 6일까지 사이에 진행된다"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새 돈을 발행함에 대하여'라는 정령을 발표했고 이를 집행하기 위한 내각결정도 있었다고 전했다. 결정 방법은 2~4차 화폐 개혁 때와 같은 셈이다.
'장롱화폐'와 저축액을 다르게 쳐주는 이유
<조선신보>의 보도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현금은 100대 1로 바꿔줬지만 개인들이 은행에 저금한 몫은 10대 1로 바꿔줬다"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 북한 중앙은행의 조성현 책임부원은 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저금을 한 사람이 혜택을 본 셈"이라며 "앞으로도 개인들이 돈의 여유가 생기면 저금할 것을 장려하고 국가로서는 경제건설에 필요한 돈을 동원하게 될 것이며, 이자율은 변동 없이 연리 3.6∼4.5%"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 신문은 화폐 교환 한도액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현재까지는 한도가 10만원에서 15만원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 전문가들은 한도 이상의 돈을 휴짓조각으로 만들어 시장 세력에 타격을 가한다는 이번 화폐 개혁의 주요 목적으로 볼 때 한도액은 있다고 보고 있다.
교환 한도액이 있다는 가정 하에, 북한 당국이 저축소의 돈을 수중의 현금보다 10배 더 쳐주겠다는 것은 교환 시한인 6일까지 이른바 '장롱화폐'를 최대한 흡수해 '경제의 달러화'라는 부작용을 막기 위한 고육책으로 풀이된다.
저축액이 교환 한도액보다 적을 경우 주민들은 더 큰 돈을 받기 위해 6일까지 장롱속에 있는 돈을 가지고 저금소로 달려가 한도액만큼 채워 넣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시중의 돈은 저금소로 몰리고 구(舊) 화폐를 달러나 위안(元)으로 바꾸는 규모가 다소나마 줄어들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저축 장려'는 사실상 '6일까지 저축 장려'인 것이다. 한도액 이상을 예금한 이들이 그만큼을 당국에 빼앗기는 건 변함이 없다.
☞ 교환 한도액 10만원일 경우의 예 : A가 가진 현금이 5만원이고 저축액이 7만원이라면 A는 3만원을 추가로 저축해 새 돈 1만원을 받고 수중에 남은 2만원만 달러나 위안화로 바꾸는 선택이 가능하다. 그러나 저축액도 현금과 똑같이 '100대 1'로 바꿔준다면 A는 저축액을 늘리지 않고, 수중의 5만원을 달러나 위안으로 바꾸려 할 것이다. ☞ 다른 가능성 : B의 저축액이 110만원일 경우 당국은 100만원을 몰수하고, 남은 10만원만 새 돈 1만원으로 바꿔준다. 그러나 저축액 110만원 전체를 '10대 1'로 계산해 새 돈 11만원으로 쳐준 뒤 10만원을 주고 나머지 1만원만 몰수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한도액이 100만원(구 화폐 기준)으로 오르는 셈이기 때문에 시장 세력 타격이라는 화폐 개혁의 취지와 어긋난다.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만약 그 방법을 쓴다면 주민들은 6일까지 구 화폐를 100만원까지 저금소에 채워 넣으려 할 수 있다. 100만원 이상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 타격을 입지만, 소수이기 때문에 화폐 개혁의 효과는 줄어든다. |
▲ 새로 발행된 5000원, 2000원, 1000원권 북한 지폐 ⓒ연합뉴스 |
▲ 500원, 200원, 100원권 ⓒ연합뉴스 |
▲ 50월, 10원, 5원권 ⓒ연합뉴스 |
▲ 새로 주조된 북한 주화들 ⓒ연합뉴스 |
2002년 제조 화폐 묵혔다가 푼 듯
새로 발행된 북한의 지폐는 5000원, 2000원, 1000원, 500원, 200원, 100원, 50원, 10원, 5원 9종류이다. 동전은 1원, 50전, 10전, 5전, 1전 5종류이다.
특이한 점은 50원, 10원, 5원권 지폐에는 발행일이 '주체 91 2002'로 되어 있고, 나머지 6종의 발행일은 '주체 97 2008'로 인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동전에도 1원, 50전, 10전에는 주조 시점이 '주체 91 2002'로, 1전과 5전에는 '주체 97 2008'로 새겨졌다.
이에 대해 이정철 숭실대 정외과 교수는 "화폐 개혁을 검토했던 2002년에 만들었던 것일 가능성이 높다"라며 "당시 결정만 떨어지면 실행하려고 준비했던 돈을 가지고만 있다가 이번에 내놓은 것 같다"고 말했다.
북한에서는 2002년 7.1 경제관리개선조처 때 화폐 개혁까지 해야 한다는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그 경우 돈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돈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보유 화폐의 일부를 달러로 바꾸게 되고, 그렇게 되면 경제의 '달러화'가 심해질 것 등을 우려해 화폐 개혁을 하지 않았다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북한은 이번 화폐 개혁에서도 몇 가지 부작용이 일어날 것을 예상했지만 이른바 '시장세력'에 대한 단속이 시급하다는 판단으로 교환을 단행한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이번 조치가 경제적으로는 무리수가 되어 북한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도 있다는 지적은 여전히 남는다.
아울러 지폐 6종과 동전 2종의 제조일이 2008년으로 되어 있는 것도 북한이 작년에 화폐 개혁을 하려고 했거나, 이번 조치를 1년가량 준비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시장 약화와 계획경제 강화, 인플레 억제 목적 분명히 밝혀
조 책임부원은 "화폐 교환 조치의 중요한 목적의 하나가 유통되는 화폐량을 줄이고 화폐의 가치를 높이자는데 있다"며 "항후 상품 가격은 나라가 가격조정 조치를 취한 2002년 7월의 수준이 될 것인데, 당시에는 쌀의 국제시장가격을 기준으로 삼아 상품가격을 설정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북한 사회에 만연한 외화 사용에 대해 "앞으로 상점, 식당 등에서 외화로 주고받는 일은 없어지게 될 것"이라며 "외국인이나 해외동포들이 가는 상점, 식당에서도 화폐교환소에서 외화를 조선돈으로 교환해 쓰게 되어 있다"고 덧붙였다.
이어 그는 "지난 시기 국가가 기업소의 생산 활동에 필요한 물자를 계획한 만큼 보장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시장의 이용을 일부 허용했다"며 "(그러나 이번 조치로) 국가의 능력이 강화됨에 따라 보조적 공간의 기능을 수행하던 시장의 역할이 점차 약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조치의 목적이 시장경제 요소를 제거하고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기능을 강화하는데 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앞으로는 경제 활동의 많은 몫이 시장이 아니라 계획적인 공급·유통 체계에 따라서 유통되게 되며 이렇게 되면 계획경제 관리 질서를 더욱 강화할 수 있는 것으로 예견한다"는 조 책임부원의 말은 그 같은 분석을 뒷받침한다.
그는 또 "시장에서의 물가의 평균 수준은 2002년 7월 1일 직후보다 떨어질 것으로 예견한다"며 인플레를 잡기 위한 목적도 있었음을 보여줬다.
러시아 언론 "북한군, 소요 사태 대비 전투 준비 태세"
<조선신보>는 "이번 조치가 전격적으로 취해졌으나 궤도전차, 지하철도 등이 운영되고 있어 시민들은 정상적으로 출근길에 오르고 있다"며 "4일부터 평양시내 상점, 식당들도 새 가격이 설정되고 정상 운영되고 있다"고 전했다.
조 책임부원은 "순간에 공포했기 때문에 하루 이틀 정도는 혼란이 조성될 수 있다는 걸 예견했다"면서 "국영상점, 식당들에서는 가격이 3일에 나왔다. 4일부터는 봉사망이 정상 가동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주민들의 반응에 대해 그는 "이번 조치는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 성실하게 일하고 노동 보수를 받는 근로자를 우대하는 조치로 되고 있다"며 "노동자, 농민, 사무원 등 절대 다수의 근로자들로부터 이번 국가조치가 매우 옳다고 환영과 지지를 받고 있으며 좋은 반영(반응)들이 들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화폐 교환에 따른 혼란이 있고, 손해를 보는 이들의 반발도 만만찮다는 보도는 계속되고 있다.
러시아의 경제일간지 <코메르산트>는 이날 북한 내 외교 소식통들을 인용해 북한의 여러 도시에서 이번 화폐 개혁을 '강도와 같은 정책'이라며 비판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고, 이 때문에 당국은 소요 사태 발생에 대비해 군에 전투 준비 태세를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소식통들은 또 화폐 개혁 기간 북한의 모든 상점이 문을 닫아야 하고 주민들은 그동안 모아뒀던 돈을 쓸 수 없게 되면서 크게 당황하고 있다면서, 북한에 파견된 많은 외교관들이 북한 당국의 화폐 개혁을 되돌리려고 여러 모임을 갖고 있다고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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