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관광 재개를 위한 선결 조건에 대해서는 불명확하거나 까다로운 태도를 보이고 있어 회담이 성사되더라도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공식 채널로 제의하면 받겠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25일 기자간담회에서 '북한이 공식적으로 관광 문제와 관련한 회담을 제안하면 수용할 것이냐'는 질문에 "그렇게 해석해도 된다. 그렇게 할 것이다"라고 답했다.
이는 북한의 회담 제의시 수용 여부에 대해 '가정을 전제로 한 질문에 답할 수 없다'고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열린 자세로 있다'는 식으로 막연하게 대응했던 것에서 한 걸음 나아간 것이다.
북한은 최근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 및 관광 재개 문제와 관련해 남측이 제시하고 있는 이른바 '3대 선결 조건'을 수용하는 것은 물론, 당국자들의 사고 현장 방문까지도 협의할 용의를 표명해 왔다. 3대 조건은 사망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 관광객 신변 안전 보장이다.
그러나 북한의 그 같은 대화 제의는 정부간 공식 채널이 아닌 현대아산을 통해 통일부에 간접적으로 전해졌다. 이에 통일부는 "민간을 통한 제안이어서 인정할 수 없고, 북한이 진정성을 가지고 관광 재개를 희망한다면 당국간 채널을 통해 회담을 제의하라"고 대응한 바 있다.
고위 당국자는 또한 "북핵 진전이 남북관계의 전반과 연계되는 게 틀림없지만, 금강산 관광의 선결 조건은 아니다"고 말했다. '북핵과 금강산은 별개'라는 기존의 입장을 재확인한 것이다.
▲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동해선 남북출입사무소 ⓒ연합뉴스 |
현물 지급 및 사과 요구 가능성 남겨 둬
하지만 북한이 실제 회담을 제의하고 남측이 받아들여 대화테이블이 마련되더라도 정부가 몇 가지 조건을 추가로 제시할 가능성이 있어 관광 재개까지는 험난한 길이 놓여 있다.
우선 정부는 '3대 조건' 외에 북한에 주는 관광 대가를 현금이 아닌 현물로 지급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7월 "대북 지원이 북한의 핵무장에 전용된 의혹이 있다"고 말한데 따른 것이다.
현물 지급 문제에 대해 고위 당국자는 "적극 검토한 바는 없다"면서도 "현재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 제재 결의 1874호가 이행되고 있는 상황에 (현금 지급이) 일부분 조금 걸려 있다"고 말했다. 정부 당국자가 관광 대가와 안보리 결의를 연관시켜 공개적으로 거론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상황에 따라 현물 지급을 요구할 가능성을 열어 놓은 것이다.
이와 관련해 지난 8월 방한한 필립 골드버그 당시 미 국무부 대북제재 조정관은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은 유엔 제재와 무관하다고 밝힌 바 있다. 따라서 만약 정부가 현물 지급 을 밀어 붙이려 한다면 북한은 골드버그 발언 등을 근거로 강력 반발할 것으로 보인다.
관광객 사망 사고에 대해 사과부터 하라는 요구도 덧붙여질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10일 언론사 정치부장단과의 간담회에서 "북한의 사과도 필요하다. 이게 되지 않으면 금강산 관광을 재개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사과 문제에 대해 고위 당국자는 "모든 문제는 국민들이 '아, 그 정도면 됐다'고 할 정도로 상식적인 수준에서 해결할 방법이 있을 것이다"고 모호하게 답했다. 이 역시도 또 하나의 카드로 쓸 수 있는 여지를 남긴 것이다.
北, '민간 합의'에 대한 이중적 태도 공박
정부가 이처럼 이중삼중의 조건을 제시하며 관광 재개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가 이어진다면 8월 이후 그럭저럭 회복해 오던 남북관계는 또 한 차례 격랑을 맞을 공산이 크다.
북한은 이미 25일 남북 경협 담당 기구인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 대변인 담화를 통해 "통일부를 비롯한 남측 당국의 속셈은 금강산 관광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라며 포문을 열었다.
아태 대변인은 "남조선 당국이 민간업자와의 합의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금강산 관광 사업은 처음부터 남조선 당국과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아태가 남측의 현대와 시작하고 오늘까지 이어온 사업"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통일부는 민간과 한 합의는 인정할 수 없다면서 지난 8월 아태와 현대 사이의 합의 가운데 이산가족 상봉 문제만은 적십자를 내세워 받아 물고 추석을 계기로 전격적으로 진행했다"고 공박했다.
남측이 정치적으로 득이 되는 이산가족 상봉 관련 회담은 아태-현대 합의를 근거로 먼저 제안했으면서도, 금강산 관광 관련 회담은 민간을 통한 제안이라며 무시하는 데 대한 공격이다.
아태 대변인은 또 관광 재개의 '3대 조건'에 대해서도 "우리는 인도주의와 동포애적 견지에서 즉시 유감 표시를 하고 진상에 대한 해명도 했다"며 "지난 8월 우리 최고 수뇌부(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별지시에 따라 금강산 관광객들의 신변안전과 재발방지 문제에 대한 담보까지 해줬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관광 대가를 현물로 지급하는 것에 대해 "세계 그 어디에 관광객들이 관광료를 물건짝으로 지불하면서 관광하는 데가 있는가"라며 "해괴한 발상"이라고 일축했다.
관광 대가가 대량살상무기(WMD) 개발에 전용됐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우리가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기 이전에 핵동력 공업의 기초를 축성하고 인공위성 '광명성 1호'를 쏴올려 오늘의 핵강국 지위에까지 오르게 됐다"고 반박했다.
또 "남조선 현 당국은 관광 재개 문제를 통해 화해협력 방해자의 정체를 드러냈다"며 "현인택과 같은 반통일분자들이 통일부에 틀고 앉아 있는 한 금강산 관광이 재개될 수 없고 북남 관계도 개선될 수 없다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고 경고했다.
여지 남겨 놓은 南·北…북미 양자대화 이후 주목돼
이처럼 남북관계의 최대 쟁점인 관광 문제에 대해 양측이 기싸움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곧장 관계 경색으로 돌아서지는 않을 전망이다.
우선 남측은 개성공단과 관련된 유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고위 당국자는 "개성공단을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공단으로 만들어 나가려면 국제시장에서 통용되는 시장 절차와 제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며 "개성공단 발전을 위해 내달 중순께 남북이 공동으로 해외공단을 시찰하기로 했으며 북한과는 협의가 돼있는 상태"라고 밝혔다.
이번 시찰은 정부가 지난 6월 제2차 남북 개성공단 실무회담을 통해 제의한 내용을 북측이 수용한 데 따른 것이다. 남북은 개성공단 개발 초기에도 유사한 시찰을 한 바 있다. 시찰단은 남북 각각 10명으로 구성되며, 시찰 기간은 내달 12일부터 열흘 정도로 예상되고 있다.
이 당국자는 "시찰지는 중국과 베트남 공단 정도를 생각하고 있다"며 "이번 해외시찰이 잘 이뤄지면 이를 바탕으로 3통(통행, 통관, 통신), 남북간 출입·체류, 공단 북측 근로자용 기숙사, 출퇴근 도로 등의 문제가 더 진전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북한도 최근 이명박 정부를 다시 '괴뢰'라고 부르고 현인택 통일부 장관을 실명 비난하고 있지만, 아직은 수위를 조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태 대변인도 25일 담화에서 통일부를 공격하면서도 "금강산 관광은 화해와 협력, 통일을 바라는 민족의 염원을 반영한 것으로서 반통일 분자가 제동을 건다고 하여 그만 두게 될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여전히 관광 재개를 희망하고 있다는 사인을 보낸 것이다.
관계 경색이냐 개선이냐 갈림길에 놓인 남북관계는 결국 미국의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내달 북한에 다녀온 뒤에야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
북미 양자대화에서 뚜렷한 진전이 보일 경우 정부는 모호하게 남겨 둔 부분을 슬그머니 치우면서 대화 국면으로 나아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 관광 재개를 위한 남측의 추가 요구가 구체화되고 북한이 반발하면서 남북관계는 다시 냉각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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