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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자냐고? 나는 금속노동자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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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자냐고? 나는 금속노동자일 뿐"

[화제의 책] 이성형 <대홍수 : 라틴아메리카, 신자유주의 20년의 경험>

이성형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HK 교수는 한국에서 손꼽히는 중남미 전문가다. 한 정치학자는 그에 대해 "가장 현지화된 연구자"라는 평을 한 적이 있다.

중남미 지역에 수없이 가보고 살아 보면서 언어는 물론 정치·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 통달했다는 뜻일 터인데, 지역 연구자에게 보내는 찬사치고 그보다 더한 게 있을까 싶다.

이성형 교수가 최근 세상에 내놓은 <대홍수 : 라틴아메리카, 신자유주의 20년의 경험>(그린비 펴냄)은 1992년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 연구를 또 한 차례 매듭 짖는 역작이다.

▲ <대홍수 : 라틴아메리카, 신자유주의 20년의 경험>(이성형 지음, 그린비 펴냄) ⓒ프레시안
이 교수가 중남미를 사례로 신자유주의를 파헤친 책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8년 <IMF 시대의 멕시코>를 시작으로, 99년 <신자유주의의 빛과 그림자>라는 명저를 낸 바 있고, 2002년에는 <라틴아메리카, 영원한 위기의 정치경제>를 썼다.

특히 <신자유주의의 빛과 그림자>는 신자유주의 바람이 뜨겁던 99년의 한국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미국발 '워싱턴 컨센서스'가 도깨비 방망이인 양 주창하는 공기업 민영화와 금융 개방으로 초토화된 중남미의 현실이 잘 그려져 있었다.

이 교수는 중남미의 신자유주의 물결을 프랑스 왕 루이 15세의 일화를 빗대 '대홍수'라고 묘사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빛과 그림자>는 그 홍수가 만수위에 올랐을 때를 논했다면, 10년 뒤 나온 이번 책은 범람했던 물이 거의 빠지고 난 뒤 드러난 참상에 대한 기록이다.

물난리가 한창일 때는 쓸려 내려가는 건물이나 가축을 보고 피해를 파악한다. 그러나 물이 빠지면서는 남아 있는 가옥의 상태는 어떠하며, 쓸 만한 물건은 무엇이며, 복구 작업은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를 보게 된다.

<대홍수>는 후자의 상황에서 쓴 책이다. 그러다 보니 우울한 진단과 전망도 있지만 새로운 희망을 언급하는 부분도 눈에 띈다. 일부 대목에서는 신자유주의가 가져 온 '긍정적인' 효과를 이야기하는 듯한 인상을 받기도 했다. 저자에게 신자유주의를 재평가하는 거냐고 물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신자유주의 정책이 인플레이션을 잡고 경제를 안정화시켰던 측면이 없지 않았다. 서민들에게는 인플레이션이 가장 나쁘다. 재정에 손을 대서 사회정책을 하면 안 된다는 컨센서스가 좌파들 안에서도 생겨났다.

문제는 그런 '개혁'이 각 나라의 산업구조를 고도화시켜 산업정책을 쓸 여지를 없앴고, 국가를 축소시켰다는 점이다. 글로벌 경쟁 체제 안에서 중남미의 산업은 자꾸 저부가가치 산업으로 갔다. 일자리가 없어지고 양극화가 극심해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물이 빠진 후 보니까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신나게 때려 고쳤던 부분은 더 많이 깨져 있었다.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멕시코의 에너지 민영화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브라질의 경우는 에너지 부문에 손을 안 댔고 금융도 안 빼앗겼기 때문에 지금 '대박'이 날 수 있는 상황이 찾아왔다.

또한 2000년 이후 중국의 부상으로 인해 국제정치의 새로운 흐름이 만들어지면서 중남미에 활로가 생겼다. 그런 차원에서 긍정적인 상황을 말한 것이지, 신자유주의에 대한 평가를 바꾼 건 아니다."


홍수는 애초에 나지 않는 게 상책이었지만, 기왕에 일이 벌어졌다면 뭘 건져내고 뭘 버려야 하는지를 따져봐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반드시 버려야 할 것은 예컨대 전력·가스 등 '망(網) 산업'의 민영화 같은 정책이다.

특히 전력의 경우 민영화는 독과점화에 따른 가격 상승, 공급 부족으로 인한 잦은 단전 같은 심각한 폐해를 낳았다. 이 교수는 칠레, 아르헨티나의 사례를 통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그는 "민영화로 경쟁과 전력 공급량 증대가 이뤄져야 가격이 하락한다는 것이 민영화론자들의 대표적인 주장이지만 칠레의 사례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고 말했다.

▲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시의 체 게바라 생가앞에서 쓰레기 처리작업을 하는 파라과이 이주노동자 가족 ⓒ프레시안 손문상

<대홍수>는 이처럼 중남미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깊숙이 해부하는 책이지만, 거기에만 초점을 맞춰 읽는다면 책의 절반만 맛보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꼭 챙겨보고 곱씹어 봐야할 점이 적잖기 때문이다.

첫째, 어떤 정책을 평가하는 데 있어 '비교의 관점'을 한 순간도 놓지 않는 것은 평가 그 자체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을 저자는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성형 교수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멕시코 미친 영향, 그것이 한미자유무역협정(FTA) 주는 함의를 논하면서 특히 그 점을 강조했다. "멕시코가 그런 경로를 걸었다고 해서 반드시 우리의 경험도 이를 답습하리라는 주장은 양국의 능력의 차이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멕시코와 한국은 다르다'는 전제는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FTA 뿐만 아니라 모든 논란이 정치적으로 양분되는 한국 사회에서 '비교의 관점'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강조되어야 한다. 물론 멕시코의 사례를 들어 FTA를 찬성했던 관변 학자들은 '비교'에 앞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눈부터 필요하지만 말이다.

NAFTA와 멕시코 문제뿐만 아니라 이 교수는 워싱턴 컨센서스를 수용했지만 브라질은 칠레나 아르헨티나와 왜 다른 길을 갔는지 추적하며 브라질에는 발전주의 전통의 경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브라질의 그 노선은 반미 민중주의를 택한 베네수엘라와 어떻게 다른지 등을 수시로 비교하며 어느 하나도 섣불리 일반화할 수 없음을 강조했다.

둘째, 중남미 좌파의 변신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교수는 이를 '에스프레소 좌파'가 '카푸치노 좌파'로 바뀌었다는 감각적인 표현으로 묘사한다. 중남미 유권자들이 신자유주의라는 홍수의 피해를 복구하는 일꾼으로 좌파를 선택하게 된 데에는 좌파들이 세계화, 시장경제, 대의민주주의와 같은 대세를 수용하며 유럽형 사회민주의 전략으로 선회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신은 공산주의자냐, 사회주의자냐, 아니면 사민주의자냐?'라며 끊임없이 정체성을 물어오는데 대해 "나는 금속노동자일 뿐"이라고 답한 룰라 브라질 대통령의 말을 보자.

"우리들은 사회주의란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우리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우리 현실에 적합한 브라질 모델만 원할 뿐이죠. 선거 캠페인에서 레닌과 트로츠키의 논쟁에 관심을 기울이는 노동자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이런 일과는 정반대의 일을 할 겁니다. 사람들을 조직하고 다음 프로그램을 작성합니다. 이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선택할 권리를 가져야 합니다."

셋째, <대홍수>는 중남미를 연구 대상으로 삼은 책이지만 거기에 나타난 중국의 부상은 괄목할 만했다. 이런 책에서 중국을 재발견하게 됐다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남남협력의 강력한 동인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에너지와 식량을 찾아 공세적으로 접근하는 중국의 투자와 무역의 흐름이다. 이 때문에 브라질을 위시한 제3세계 각국은 그만큼 미국과 글로벌 금융에 대한 의존도를 줄일 수 있게 되었다.

미주의 뒤뜰에서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쿠바가 미국과 IMF에 큰소리치는 것도, 브라질이 미국의 미주자유무역지대안에 맞서는 남미국가공동체를 구체화한 것도 1990년대 보다는 다극화된 지경학적 변화의 산물이다."

비단 남미뿐인가. 중국은 이미 오래 전 아프리카 대륙을 통째로 삼키면서 국제질서의 상당 부분을 새롭게 짰다. 북핵 문제 등 동북아 국제정치라는 좁은 안경을 벗고 본 중국은 미국에 '채무 관리 좀 제대로 하라'는 충고를 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가진 거인이었다.

넷째, 포괄적이고 근본적인 해법의 '마술'이다. 한반도 문제를 풀기 위해 '북핵 제거'만이 아니라 냉전구조를 해체해야 한다고 말할 때 자주 언급되는 포괄적 접근, '제국의 무덤' 아프가니스탄 문제를 해결할 때 견지해야 한다는 근본적인 해법은 사실 세상의 모든 골치 아픈 문제를 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미국의 대(對) 콜롬비아 마약전쟁이 코카 생산량을 더 늘리고 인권문제와 폭력을 양산하고 있는 상황을 소개하며 저자가 내놓은 해법도 바로 그것이다.

"보다 훌륭한 정책은 증후군을 보고 처방하지 않는다. 훌륭한 마약 퇴치 전략은 마약 생산의 '원인들'에, 미국에 난무하는 마약 소비의 '원인들'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하지만 레이건, 부시, 클린턴, (아들) 부시, 오바마로 이어지는 안데스 마약정책은 여전히 공급측면의 압박 전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외에도 <대홍수>는 특정 지역을 연구한 책이지만 사람 사는 세상의 복잡한 문제를 일반화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눈을 제공한다.

카스트로가 죽으면 쿠바 체제도 붕괴할 것이라는 '피델 중심주의' 분석에 대한 비판에서는 '포스트 김정일' 시대의 북한을 점칠 수 있게 한다. 미중 수교를 열렬히 반대했던 재미 중국인 사회가 중국의 개방 국면에서 보였던 행태를 소개하는 부분에서는 쿠바의 체제가 전환되면 마이애미의 쿠바계들은, 북한이 변할 때 탈북자들은 어떻게 변할지를 예상케 한다. 물론 중국과 쿠바와 북한은 다르지만 말이다.

<대홍수>는 이처럼 진실에 대한 치열한 추구, 한시도 놓지 않는 비교의 관점, 보편성과 특수성의 변증법을 한꺼번에 보여준다. 그것은 결국 사회과학 하는 즐거움이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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