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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프로'들 모르게 북쪽 프로들 만나다가 사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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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프로'들 모르게 북쪽 프로들 만나다가 사고난다

[정세현의 정세토크] 정상회담 장소 문제, 동·서독 방식서 해법 찾아야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해서 남북의 고위급들이 동남아에서 접촉했다는 사실이 청와대 관계자에 의해 확인됐고, 그 국면이 마무리되어 가는 과정에서 몇 가지 우려 되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우선, 북한의 특사 조의방문단이 8월 23일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초청했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건 별로 신빙성이 없다고 봅니다.

북한이 그런 식으로까지 말하진 않은 것 같고, 다만, 갖다 부친다면 그런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정도의 말은 두루뭉술하게 했을 수는 있어요. 북한의 화법이 원래 그렇습니다. 그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자아비판, 상호비판을 하면서 자라서 그런지, 나중에 다른 사람들한테 책잡힐 수 있는 말을 하지 않는 화술에 능합니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 성급하게 얘기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그렇다면 평양 초청 얘기는 대체 어디서 나왔을까 추정해보면, 원자바오 중국 총리가 10월 초에 평양에 다녀오는 과정에서 나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원자바오 총리는 김정일 위원장이 남쪽이나 일본하고도 관계를 좋게 하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는데, 그 보도를 뜯어보면 김 위원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기보다 원자바오의 권고에 김 위원장이 반응하는 식으로 그런 얘기가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아, 뭐, 만날 용의가 있습니다. 남쪽에서 뜻이 있다면 이명박 대통령이 평양에 오는 것도 좋고...' 이런 식으로 말했을 겁니다. 그걸 중국이나 미국이 좀 과장되게 해석한 거라고 봅니다.

청와대 사람들 막말부터 막아야

본론으로 들어가서...이번 정상회담설에 대한 정부의 태도에서 가장 큰 문제는, '정부 당국자'니 '청와대 관계자'니 하는 사람들이 익명으로 여러 번 말을 했는데, "북한이 몸이 달아 있다", "정상회담을 하자고 매달리고 있다"는 식으로, 마치 다시는 만날 생각이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막말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여러 번 말했지만, 북한이 지금 남쪽을 향해 화해 제스처를 쓰는 것은 어떻게 해야 미국과의 대화가 잘 돌아갈까에 대한 나름대로의 전략을 가지고, 그 전략을 달성하기 위한 전술의 일환이라고 봐야 합니다.

남북관계 개선은 미국의 요구가 상당히 작용했다고 봅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동맹국을 중시한다고 했기 때문에 미국도 처음부터 한국을 떼놓고 가기엔 부담이 있어요. 미 국방부 차관보가 MB 평양 초청 얘기를 한 것도, 미국이 남북관계 개선 상황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북한은 미국의 요구에 부응하는 차원에서 남북관계를 주동적으로 풀어나가려고 하는 건데, 우리가 쌀·비료를 안 주니까 배고파서 저런다고 해석을 하면 틀린 겁니다. 틀릴뿐만 아니라 북한을 자극해서 앞으로 남북이 접촉할 때 신뢰의 문제라거나, 우리 정부가 즐겨 쓰는 용어인 '진정성'의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어쨌든 청와대는 앞으로도 정상회담과 관련한 접촉을 계속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을 했어요. 안할 것처럼 잘라 말하진 않았어요. 그게 성공하려면 청와대 사람들의 입단속부터 시켜야 합니다.

청와대 비서진들이 국내에서 저지른 불미스러운 일들만 단속할 게 아니라, 남북관계처럼 상대방이 있는 문제에서 상대의 자존심을 극도로 상하게 만드는 말을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매달리고 있다' '몸이 달아 있다'는 말로 나중에 옥신각신할 꼬투리를 만들 필요가 없어요.

의연하게 상황을 주도하려면 책잡힐 수 있는 빌미를 주면 안 됩니다. 남북이 만나면 우리가 상황을 주도할 수 있고, 레버리지도 가지고 있고, 위상도 더 높은데 왜 그런 몇 마디 말 때문에 북한이 신경질적으로 나올 수 있는 여지를 쌓느냐는 겁니다.

▲ 현인택 통일부 장관(정면)이 23일 국회에서 통일부 국정감사가 열리기 전 통일부 관계자들과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날 현 장관은 남북 정상회담 추진 관련 물밑대화에 대해 '아는 바 없다'고만 말했다. ⓒ뉴시스

'핵은 북미 사이의 문제'…미국도 인정

정상회담을 염두에 둔 남북의 동남아 접촉은 결국 의제와 장소 때문에 무산된 걸로 나오는데, 우리는 아마도 핵문제를 의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을 거고, 장소는 6.15 공동선언에서 약속했던 대로 이제는 김정일 위원장이 내려와야 한다고 말했을 겁니다.

우선 의제 문제와 관련해서...북한의 일관된 입장은, 핵문제는 미국과 풀어야 할 문제라는 겁니다. 그리고 사실이 그렇습니다.

1993년 북한이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선언하면서 1차 북핵 위기가 발생하자마자 미국은 곧바로 북한과 양자 접촉을 시작했어요. 핵 비확산에 사실상 책임을 지고 있는 미국이 굉장히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해서 나선 거였고, 결국 94년 제네바 합의가 체결되고 2002년 12월 31일까지 북한의 핵 활동은 중단됐습니다.

제네바 합의에서 북한이 핵 활동을 중단하는 대가로 받아낸 건, 경수로 제공도 있지만, 미국과의 수교 협상을 개시한다는 거였습니다. 핵문제는 미국과의 문제라는 걸 미국도 인정한 증거입니다.

2005년 9.19 공동성명도 결국 핵심은 미북수교입니다. 9.19 공동성명 4항에 한반도 평화체제 문제를 논의하자고 되어 있는데, 그것 역시 미북간 군사적 대결 상태를 어떻게 종결하느냐에 관한 얘깁니다.

핵문제는 미북간의 문제라고 북한이 주장하니까 그게 옳다는 게 아니에요. 북한은 미국이 깊이 연관된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핵카드를 들고 핵실험까지 한 겁니다. 그러니까 남북이 그걸 해결해야 한다는 건 과욕이고 조금 비현실적이에요.

핵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건 물론 우리이기 때문에 우리 정부와 대통령이 지대한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한 도리이지만, 그러나 그걸 남북간에 해결하자고 하면 북한으로서는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겁니다.

또, 핵문제를 남북이 협의해서 해결한다면 6자회담은 무의미해집니다. 6자회담은 6자회담대로 중요하니까 하자고 하면서, 핵문제를 남북간에 먼저 해결해야 한다면, 논리적으로는 6자회담 무용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북한이 핵을 남북 정상회담의 의제로 삼을 수 없다고 얘기했을 거예요.

2차 북핵 위기가 터졌던 2002년 10월, 나는 8차 남북 장관급회담을 하러 평양에 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이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는 기사가 에 나면서 2차 북핵 위기가 시작됩니다. 미국이 장관급 회담 이틀 전에 슬그머니 흘려서 소동을 일으켰다는 건 다분히 의도성이 있었다고 봅니다. 남북관계에 속도를 조절해보겠다는 계산이죠.

그래도 나는 평양에 갔고, 그 문제를 따지기 위해서 김정일 위원장을 직접 만나야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김 위원장이 지방에 가 있어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까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만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50분 정도 김영남 위원장을 단독으로 만났는데, 김 위원장은 '남쪽이 관심을 갖는 건 이해하지만, 현실적으로 미국과의 문제다. 남쪽은 문제가 잘 풀리도록 협조해주는 게 바람직한 거지 장관급회담에서 그걸 따져봐야 한계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8차 장관급회담 이후 14차까지 매번 장관급회담 합의문 1항에는 핵문제에 관한 조항이 들어갑니다. '우려를 표하고 평화적 해결을 위해 협조한다'는 식으로...그런 정도로 밖에 할 수 없는 게 북핵 문제의 특성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핵문제만 논의해야 한다고 고집하면 접점이 안 생기는 거죠.

보수적인 분들은 1차 북핵 위기 때부터 남북대화를 하려면 핵을 최우선으로 얘기해야 한다고 고집합니다. 물론 거기에 어떤 악의가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북한은 무조건 악(惡)이고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핵 문제에 대한 답을 확실히 받아 놔야 한다는 노파심에서 그렇게 말한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나 핵문제'만' 논의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건 적절치 않습니다.

장소 논란, '에어프루트-카셀 방식' 벤치마킹할 수도

정상회담 장소 문제도 그래요. 김정일 위원장이 답방을 한다고 6.15 공동선언에 들어가 있긴 합니다. 조항 번호 없이 그냥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고만 돼있어요.

김대중 전 대통령한테 들은 얘긴데...김 위원장이 한사코 답방 약속을 안 하니까 DJ가 "나이 많은 내가 평양에 왔는데, 나보다 젊은 당신이 대접 차원에서라도 내려와야 하는 거 아니냐"고 밀어 붙였대요. 그러니까 김 위원장이 "아, 그럼 일단 넣어 놉시다"고 해서 들어간 문구입니다.

그 뒤에 김용순 대남 비서가 특사로 내려와서 김정일 위원장 답방을 위한 사전답사까지 하고 갔지만, 결국 나중에는 김영남 위원장이 먼저 오고 그 후에 필요하면 김정일 위원장이 온다는 식으로 합의됐어요.

북쪽 사람들이 가장 걱정하는 건 시큐리티(경호) 문제입니다. 나 역시 장관급회담에서도 여러 번 말을 했어요. 그때마다 북쪽 사람들은 '우리야 당국에서 준비하면 인민들이 다 협조하지만, 남쪽은 여러 가지 목소리가 있는 곳이고, 정부의 말도 잘 안 듣는 단체도 있다. 그런데 국방위원장이 서울에 내려갔다가 망신이라도 당하면 실무자들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6.15 선언에 들어갔어도 그런 현실을 감안해서 너무 압박하지 마라'는 말을 여러 번 했어요.

그런데 6.15 공동선언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6.15 선언 말미에 있는 김정일 답방만은 꼭 지키라고 하는 건 아이러니입니다. 그건 마음에 드나보죠? 계속 요구하는 걸 보니까? 하하 정말...이 정부도 그 조항에 근거해서 답방하라는 식으로 말을 했겠죠.

그런데 김정일 위원장이 밖으로 나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건 앞으로도 접점을 찾기 힘들 거예요. 만약 정상회담을 통해 북핵 문제 해결도 촉진하고 남북관계를 지금보다 나은 상태로 정말로 개선하고 싶다면, 장소 문제를 고집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김영삼 대통령이 직접 한 말이니까 참고가 될 것 같아서 소개할게요. 94년에 남북 정상회담을 평양에서 하기로 합의했는데, 김영삼 대통령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평양 방문을 결심했어요. '나이 많은 김일성이 서울에 와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느냐. 차라리 내가 가는 게 낫지.' 김영삼 대통령이 후일담으로 직접 한 말입니다.

사실 그런 문제도 중요해요. 이 정부 주변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 문제를 놓고 별 추측과 전망을 다 하고 북한 급변사태에 대비한다면서 개념계획 5029를 작전계획으로 격상하자고까지 하지 않앗습니까? 그랬는데 김정일 위원장을 서울로 불렀을 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할 겁니까?

김영삼 대통령의 선례도 있으니까...그분이야 말로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으면 김일성이 먼저 와야 한다고 했을 텐데, 자기가 먼저 가겠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장소는 고집하지 말아야 해요.

굳이 남쪽에서 해야겠다면 시큐리티 문제에서 우리 정부가 좀 수월해질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도라산역 같은 데...거기 홀이 상당히 넓어요. 2002년 2월 부시 대통령이 왔을 때도 김대중 대통령하고 같이 연설을 해도 될 정도로 잘 꾸며져 있습니다. 휴식공간도 있고. 또 개성공단 내 남북경협협의사무소 회담장도 있어요.

70년대 초 동서독이 정상회담을 할 때, 빌리 브란트 서독 수상은 처음에 기차를 타고 동독 지역으로 넘어가서 나오는 첫 번째 역인 에어프루트 역에서 정상회담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동독 정상이 기차를 타고 서독 쪽으로 넘어와서 카셀이란 역에서 회담했습니다. 평양에 또 가는 게 정 자존심이 상한다면, 독일의 '에어프푸르트-카셀 방식'으로 '도라산-개성공단 방식'을 만들면 됩니다.

北 의도 알기 위해서라도 정상회담을 하라

남북 정상회담에서 특정한 의제를 한정하지 않는 이유는 남북관계의 현실 때문이에요. 1, 2차 정상회담 때도 의제 없이 했는데, 할 말 많은 남북의 정상이 만나서 어떤 특정한 문제에 대해서만 회담을 할 수는 없는 겁니다.

중요한 남북대화에서는 언제나 '상호 관심사를 얘기하자'는 식으로 의제를 정해요. 그러면 우리는 우리 우선순위대로 말하고, 저쪽은 저쪽대로 자기네 우선순위대로 말을 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접점이 생기는 거예요. 정상들이 4시간이고 6시간이고 폭넓게 대화하다 보면 자연히 핵문제도 나오게 돼있어요.

그러다 보면 처음부터 핵문제만 얘기하자고 한정하면서 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의미 있는 답변을 북한으로부터 들을 수 있는 겁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보면 우리의 레버리지를 가지고 북한의 확고한 결심을 끌어 낼 수 있어요. 그런 식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그렇게 의제와 장소에 대해 융통성을 보이면서, 이왕에 정상회담 추진 움직임을 보였으면 반드시 성사시켜야 합니다. 지금 국면에서 꼭 필요합니다.

그랜드 바겐 때문에 한미간에 불편한 상황이 있었고, 중국도 사실상 거부했고, 일본 총리는 서울에 와서는 좋다고 하더니 베이징에 가서는 '접근방법에 차이가 있다'고 했습니다. 즉, 미·중·일로부터 별로 지지를 받지 못한 건데, 그런데도 이명박 대통령은 10일 한·중·일 정상회담에서 "기회가 닿으면 언제든지 북한에 대해 그랜드 바겐 구상을 설명하고 협력을 구하고자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정상회담을 하라 이겁니다.

이 대통령은 또 25일 태국 동아시아 정상회의에서 "아직 북한의 의도가 불투명하며 핵을 포기하겠다는 결단을 내렸다는 징후도 보이지 않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북한의 의도를 잘 모르겠다면, 그걸 알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남북관계에서 핵문제가 최우선이라고 생각하고 핵 폐기를 설득하겠다면, 그걸 관철시키기 위해서라도 정상회담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프로와 아마추어의 만남은 '위험'

또 한 가지...대통령의 동아시아 순방을 동행 취재하는 기자들이 청와대 참모진들과 직접 상대해서 남북 접촉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버렸는데, 통일부 장관은 국회에서 '전혀 아는 바 없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국회의원들은 '통일부 장관이 몰라도 되느냐'고 힐난조의 질문을 했고, 그래도 통일부 장관은 '아는 게 없다'고 답했던 걸로 봐서, 이번 접촉 과정에서 통일부가 좀 소외를 당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남북관계의 특수성 때문에 수면 아래에서 비공개 접촉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나중에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일을 책임져야 하는 부처의 장(長)을 그 과정에서 배제하거나 소외시키면 나중에 공식적인 남북대화로 넘어갈 때 별로 도움이 안 됩니다.

이번에 보니까 95년에 북한에 쌀을 지원할 때하고 비슷한 대목이 있더라고요. 그때도 비선이 움직여서 쌀을 주기로 합의했는데, 통일부도 몰랐고,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도 몰랐습니다. 심지어 안기부도 모르게 시작됐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쌀 지원이 공식 결정되고 이행되는 기간 내내 당시 통일부 장관은 불편한 심기를 지우지 못하더라고요.

결국 비선이 움직여서 급하게 일을 하더니 사고가 났습니다. 청진항에서 쌀 하역을 하던 씨 아펙스호가 인공기를 올리고 작업을 하게 되면서 터진 '인공기 게양 사건'이 바로 그겁니다. 저쪽은 남북관계의 프로들이 나왔는데, 이쪽에서는 전혀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나가서 대충대충 합의를 하니까, 그런 일이 터진 겁니다. 선박이 입항할 때 깃발을 어떻게 할 거냐의 문제는, 물론 합의를 하긴 했지만 우리 쪽에서 저쪽에 몇 번을 확인하고 또 다짐받아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사고가 날 수 있다는 감각이 없었기 때문에, 좋은 뜻으로 시작한 대북 지원이 국내적으로 역풍을 맞았고, 김영삼 정부 후반 남북관계의 디딤돌이 되지 못했습니다. 쌀만 15만 톤 없어졌고, '쌀 주고 뺨 맞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반북 정서만 커졌어요.

그런 사고를 막기 위해서라도 대화가 수면으로 올라오기 전에 통일부에 얘기를 해줘야 하는 겁니다. 현인택 장관이 모른다고 한 건. 아는데도 그냥 잡아뗀 것 같지는 않았어요. 이 정부 들어 통일부가 소외됐던 적이 몇 번 있었죠. 작년 4월인가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에 가서 남북 연락사무소 설치를 제안했을 때도, 당시 통일부 장관은 모르고 있었거든요.

2000년 정상회담을 추진할 때 우리는 미국 백악관의 고위층이라거나, 국무부의 최고위층한테는 사전에 알려 줬습니다. 하물며 외국한테도 그러는데, 합의가 이뤄지면 그걸 이어받아 공식적으로 회담을 추진해야 할 통일부의 고위 당국자들한테 말을 안 해줘서 국회에서 그렇게 답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건 청와대 일처리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저쪽에서 프로가 나오면 이쪽에서도 프로가 개입해야 실수가 없어요. 초기 접촉에서 저쪽의 고수들이 솔직히 무슨 복선을 깔아 놓을지 모르잖아요. 2000년 접촉 때도 박지원 당시 문광부 장관이 제3국을 돌아다녔지만, 그 분야 실무 전문가들을 항상 데리고 다녔습니다.

물론 이번에도 그렇게 했을지 모르지만,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나 원동연 (아태평화위원회) 실장 같은 선수들이 나와서 뛰는데 남쪽의 비당국자가 아무리 친(親)MB 인사라고 해도 남북관계에서는 초보일 텐데 적절하게 대응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매번 실무 보좌진한테 물어보고 얘기를 주고받을 수도 없잖아요. 그러니 통일부를 저렇게 배제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김양건 부장하고 원동연 실장이 베이징 공항에서 TV 카메라에 잡힌 건 그냥 실수로 그렇게 된 게 아니에요. 그전에도 자주 그랬듯이 얼마든지 눈에 안 띄게 계류장에서 바로 빠져 나갈 수 있었어요.

북한의 리근 미국국장을 취재하려고 카메라들이 진을 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두 사람이 공항에 등장한 건 한국과 미국을 향해, 특히 미국을 향해 '우리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움직인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뜻이 있었다고 봅니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 프로답게 움직이는 걸 그때그때 해석하고 대응하는 남쪽의 프로들이 개입하도록 해야 합니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 최형락

* '정세토크'는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김대중평화센터 부이사장, 북한대학원 석좌교수)이 한반도 문제에 관해 자신의 경험과 견해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격주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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