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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같은 남북 정상회담, 정치적 영양가는 '만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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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같은 남북 정상회담, 정치적 영양가는 '만점'

[기자의 눈] 불확실한 보도 속 휘파람 부는 이명박 정부

남북 정상회담 추진설이 '뭔가 있다'는 지극히 비(非)저널리즘적인 언어로 유포되고 있다.

지금까지 나온 팩트 중 확인된 것은 북한의 대남 총책인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이 원동연 아태평화위원회 실장과 함께 15일 베이징 공항에 나타났다는 것뿐이다. 그들의 모습은 TV 카메라에 잡혔다.

김 부장 일행은 15일부터 20일까지 중국에 머물렀다고 '알려지고' 있다. 현재는 대남 업무를 맡고 있지만 원래는 중국통인 김 부장은 사실 종종 베이징에 간다.

▲ 김양건 부장과 원동연 실장이 베이징 공항에 나타난 모습 ⓒ 뉴스데스크 화면 캡쳐
이어 김 부장이 이명박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의원을 만났다는 <MBC>의 20일 보도가 있었고, <KBS>는 김 부장 일행이 싱가포르에서 남측의 고위 관계자를 만났다는 사실이 확인됐다고 22일 전했다. 그러나 만남의 장소와 남측 인물에 대해서는 다른 보도들과 엇갈리고 있어 '확인'이라는 표현에도 거품이 낀 듯하다.

정상회담 추진설에 관한 최근 보도들의 특징은 모두 '소식통'을 인용하고 있다는 것인데, "뭔가 움직인다"는 <조선일보>의 22일 기사 제목처럼 막연하기 짝이 없다.

극도의 보안을 유지해야 하는 이슈의 특성상 소식통이라고 밖에 쓸 수 없다는 게 이해되는 구석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번에는 언론들이 통상 소식통이라고 쓸 때의 도를 넘어선 기사도 눈에 띈다. 그런 기사를 과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의문일 뿐이다.

남들이 쓰니까 일단 '걸쳐놓고' 보자는 식으로 작성된 것도 있어 보인다. 근거는? 다른 언론의 보도다. 한국 언론의 북한 관련 보도가 일본으로 건너가 과장되고 다시 한국으로 와서 부풀려지는 이른바 '부메랑 효과'가 연상된다.

더욱이 일부 언론은 연내 정상회담이 이뤄지기는 쉽지 않고 내년 지방선거 후에 이뤄질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고 전하고 있다. '8개월 뒤 열릴 수 있다'는 걸 과연 알맹이 있는 보도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정도 떨어진 시점에 있을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가능성이 있다'고 쓸 수 있다.

남북 고위 관계자들이 만났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턱없이 부족한데, '만났다면'이란 가정 하에 무엇이 논의됐을지에 대한 추정으로 지면의 대부분을 채우는 기사도 허망하긴 마찬가지다. 전반부엔 뭔가 있는 것처럼 쓰다가 후반부에 가서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다'고 빠져 나가는 양다리 걸치기 기사도 단골손님이다.

안개속 사태 전개, 정부 정책 홍보에는 그만

이처럼 누가 만나 뭘 얘기했는지에 확인하기 어려운 보도의 연속이지만, 이명박 정부는 이번 논란 속에서 적잖은 정치적 이득을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KBS>와 <연합뉴스> 등은 북측이 먼저 요구해서 이번 만남이 이뤄졌다고 보도하고 있는데, 여기에 담긴 의미가 만만찮다. 북한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엄한' 자세가 드디어 북한의 고개를 숙이게 했고, 이제는 더 이상 배고픔을 참지 못해 정상회담을 애원하는 처지가 됐다는 뜻이 담겨 있다.

대표적으로 <연합뉴스>는 23일 "정부의 한 핵심소식통은 '북한이 지금 몸이 달아 있는 상황'이라며 '경제 문제와 권력이양, 김정일 위원장의 자연적 수명 등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 남북관계 개선과 정상회담을 위해 매달리고 있다'고 분석했다"고 전했다. 이런 논리가 적극 퍼져나가면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마치 성공하고 있는 것처럼 그려질 수 있다. 때마침 북한은 남북 당국간 대화를 연일 강조하고 있다.

둘째, 북한이 먼저 만남을 요구했다는 언급 뒤에는 "북핵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정상회담이 이뤄질 수 없다"는 정부 당국자의 발언이 언제나 뒤따른다. 이 역시도 정치적 고려가 담긴 포석이다.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보수층의 반발을 차단하고, 정부의 '원칙'을 홍보하는 효과로 그만인 것이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움직이고 있다'는 보도가 계속 나가는 건 이명박 정부에 싫지 않은 사태 전개다. 북한의 연이은 유화 공세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를 도외시해 향후 북미 대화국면에서 한국이 따돌림을 당할 것이라는 비난을 막는 방패막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미국을 향해서도 괜찮은 신호가 된다. 미국이 남북 정상회담을 요구하고 있다면 그걸 받아들이는 모양새를 낼 수 있다. 반대로 '당신들이 우리를 물리치고 북한과 대화를 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먼저 남북 정상회담을 해버릴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주는 효과도 있다.

넷째, '버르장머리 없고 부당한 요구나 하는 북한', '그런 북한에 끌려 다닌 김대중·노무현 정부'란 이미지를 퍼뜨리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예컨대 <KBS>는 22일 "(이번) 접촉에서 남측은(…) 정상회담이 경제적 지원을 전제로 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이런 말들이 언론을 통해 계속 되풀이된다면 과거 정상회담은 돈을 썼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논리가 기정사실화할 수 있다.

또한 청와대의 핵심 참모는 21일자 <조선일보>에 "북한이 먼저 나서서 사실상 정상회담을 제안하는 단계에 이른 것만 해도 과거 정권과는 크게 달라진 점 아니냐"고 말했다. 이번 일을 과거 정권과의 차별화를 꾀하는 도구로 이용하겠다는 의도가 짙게 깔린 말이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의 23일 발언도 마찬가지다. 그는 "만약에 정상회담을 하면 다부지고 의미 있게 해야 한다"며 "쇼를 하듯, 이벤트를 하듯 하지는 않겠다. 만남을 위한 만남도, 정략적이거나 전술적인 만남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를 뒤집어 보면 과거 정상회담이 '다부지고 의미 있게' 되지 않았으며, '쇼를 하듯, 이벤트를 하듯, 정략에 따라 만남을 위한 만남'에 불과했다는 말이 된다.

남측 정상이 평양에 두 번 갔으니 이번에는 김정일 위원장이 내려와야 한다는 장소 논란도 정상회담의 필요성과 의미 보다는 전 정부와의 차별화에 집착하는 태도를 읽을 수 있다.

김영남 부장과 이상득 의원이 만났다는 <MBC>의 보도를 "소설 같은 얘기"라고 일축했던 정부 당국자들은 22일 밤부터 태도를 바꿨다. 각종 남북 접촉설에 "아는 바 없다" 혹은 "확인할 수 없다"는 식으로 답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 만남이 있는 느낌이지만 자신들도 확실치 않기 때문에 그러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유령과도 같은 정상회담 보도의 행렬이 정치적으로 득이 되고 있다는 판단도 깔려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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