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적인 장면을 보여주지 못한 운동권
사람들은 지금 희망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전의 엄혹한 군사 독재정권 때는 "민주화만 되면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겠지"라는 희망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87년 6월, "이제 좋은 세상이 왔구나!"라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이른바 '진보 정권' 10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대를 모두 접어야 했습니다. 불신과 좌절이 온 사회에 확산되었고, "믿을 놈 하나도 없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희망을 포기한 대중들은 모두 "어떤 수단을 쓰든지 우선 나부터 잘 살아야 한다."는 정신으로 무장하게 되었고 우리 사회에는 극단적 이기주의가 팽배해졌습니다. '진보정권'이 역설적으로 대중들의 '희망'을 상실하게 만든 이 현실을 겸허히 인정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김대중, 노무현 정부, 이렇게 거듭 두 번씩이나 '진보' 정권을 탄생시킨 것은 역설적으로 이 땅의 민중들이 얼마나 민주주의를 갈망하고 있는가를 웅변해주는 증거였습니다. 기대가 컸기에 좌절도 그만큼 컸습니다.
'진보 정권'이 좌절하면서 우리들은 먼저 그간의 실패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해야 했습니다. 기회란 반성의 토대위에서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대중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싸우고 그러다가 쓰러지는 모습을 너무도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 눈에는 민주화 진영이 항상 싸우기는 하지만 자신들의 당과 자신들의 이른바 '이너서클'의 이익만을 위한 싸움으로 비쳐졌습니다. 만약 집권 시기에 여당을 포함한 정권 담당자 중 한두 명이라도 대중을 위하여 투쟁하다가 희생된 사람이 존재했다면 대중들의 신뢰는 여전히 강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러한 경우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고(故) 조영래 변호사 같은 인품과 능력 그리고 지도력을 갖춘 분이 일찍 타계하신 것은 참으로 운동진영으로서 커다란 손실이었습니다. 고 김병곤, 고 이범영, 고 박관현 선배도 마찬가지이지요. 하늘이 재주 많은 것을 시기하셔서 빨리 데려간 것인지 생각할수록 안타깝습니다.
사람들이란 자기가 감동을 받았던 영화의 한 장면씩은 가슴에 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 운동권은 대중들에게 그런 감동적인 장면을 남겨 주는 데 실패했습니다. 사람들은 말이 아니라 행동을,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인 정책과 조치를, 당이 아니라 대중을 위하여 헌신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던 것이지요.
대중에 대한 '섬김'의 실종
제가 잘 아는 선배분이 계십니다. 학생 시절부터 평생 '운동'에 몸담아 오시고 지금은 작지만 사업체도 몇 개 가지신 분이지요. 운전 면허증도 없고 이제껏 혼자 사시는 그 분은 서울 근교에 15평짜리 허름한 아파트에 전세로 살고 있었는데, 그것조차도 "그 넓은 곳에 자기 혼자 살고 있어서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참으로 우리 운동권이 이러한 정신과 태도를 견지해왔다면 최소한 대중들의 신뢰를 이토록 잃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지요?
최소한 초심을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물론 운동 경력을 발판으로 삼아 '출세'를 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운동에 접근한 사람도 있기는 하겠지만 그야말로 극소수일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운동권 출신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고자 한다면, 운동을 처음 시작할 때의 순수한 그 열정과 조국과 대중에 대한 봉사 정신을 항상 가슴에 품고 살아야 했었습니다. 저는 유학 시절 학비가 부족하여 식당을 열고 몇 년 동안 장사를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배운 것은 무엇보다도 사람에 대한 서비스 정신이 중요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장사도 결국 서비스가 중요하고, 이를테면 정치도 서비스 정신이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운동이 지향했던 것도 결국 대중에 대한 서비스, 즉 '섬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대중에 대한 이러한 서비스 정신, '섬김'이 부족했기 때문에 운동이 무너진 것 아닐까요?
'현장론'의 재강화
각자 운동 시기 지녔던 '현장 중심의 사고방식'으로써 자기가 지금 발을 딛고 살고 있는 바로 그 삶터로부터 시작하여 그곳 현장 대중들과 당면 문제의 해결을 위한 지속적인 실천을 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로부터 출발하여 환경 문제, 각종 제도 개선 문제 등 공익(公益) 문제에 평소 자기가 관심을 가지고 있고 또 자신(自信)이 있는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여 자기 몫을 다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비록 작아보일지라도 그 총화(總和)는 엄청난 힘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와 반대로 우리는 언제나 거대 담론만을 얘기하고, '투쟁'도 예를 들어 反한나라당 투쟁이나 조중동 투쟁 혹은 反검사집단 등 오직 '스케일 큰' 정치 투쟁만 해왔습니다. 그 '투쟁대상'들을 하루에 몇 번씩 비난하면서 스스로 '운동권'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지켜온 셈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스케일 큰 '정치 과잉'의 투쟁만이 계속 되다 보니 필연적으로 구체성, 즉 현장성과 대중성이 결여되어 갔던 측면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운동권에서는 항상 '정치투쟁론'과 '현장론'의 양대 노선 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왔습니다. 지금은 '과잉된' 정치투쟁 일변도를 넘어서 '현장론'이 강화되어야 할 시기로 보입니다.
예를 들어, 현재 부가가치세는 일률적으로 10%의 세율을 징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10%를 그대로 납부하고서 이윤을 내며 장사를 해나갈 수 있는 업소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여러 탈법이 생길 수밖에 없게 되지요. 이는 사실상 전 국민을 범죄자로 만드는 제도입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제도는 세무 공무원의 재량권을 지나치게 확대하여 세무 행정의 비리와 부패를 초래하지요. 이러한 불합리한 법제도를 고치는 운동을 우리가 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물며 정권을 10년이나 잡고서도 이러한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시키지 못했다는 점은 정말 정책능력의 측면은 물론이고 철학과 사고방식, 지지기반 등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문제점이지요.
저는 지인을 통하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일종의 '집현전'을 만들어 정책과 방향에 대한 모색을 해나가는 방안을 몇 차례 제안하기도 했으나 아무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박정희'를 넘어서지 못한 운동
박정희에 저항하여 목숨을 걸고 싸웠던 주위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희한하게도 박정희를 이제 어느 정도 평가해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이는 박정희의 개발독재를 인정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발 지상주의와 성장 지상주의 신자유주의에 포섭되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이는 '초심'을 잃게 만들고 정체성을 상실하게 만든 중대한 요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박정희의 반민주성만이 아니라 반인간화의 측면을 동시에 반대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인간주의란 삶의 가치를 지향하는 생명존중 사상으로서 자연주의요 환경보호이며, 개발 독재에 대한 반대를 중심 내용으로 하는 것이겠지요.
한국인의 특성을 얘기할 때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바로 "빨리 빨리"입니다. 그런데 '빨리 빨리'의 반대어 '천천히'는 '川川'으로부터 비롯된 말로 추정됩니다. 즉, 유유히 흘러가는 냇가의 물처럼 느긋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지요.
한나라 양웅(揚雄)의 《太玄·難》에 "大車川川, 上輆迂山, 下觸迂川."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즉, "커다란 마차는 천천(川川)하여, 위로는 산에 거리끼고, 아래로는 내에 닿는다."라는 뜻이지요. 즉, "천천(川川)이라는 말은 '무겁고 느릿느릿한 모습'을 의미합니다. 정말이지 냇가의 흘러가는 물은 여유롭고 유유히 굽이굽이 흘러 내려가는 것이지요. 앞뒤를 다투는 일 없이 차례차례 함께 더불어 흐르고, 그러면서도 결코 쉬지 않고 내려갑니다. 하지만 냇물이 흘러가는 모습으로부터 비롯된 '천천히'라는 말은 단순히 '서서히', '느릿느릿'의 의미만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계곡을 우당탕퉁탕 격하게 부딪치는 격류로 되기도 하고, 구불구불 흐르다가 또 거꾸로 역류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냇물은 대부분의 시간을 유장하게, 즉 '천천히' 흘러가지만, 그것은 동시에 언제든지 격동과 파격과 역류로 전화될 수 있는 것이지요.
창덕궁의 정원을 살펴보면 우리 선인들이 자연과의 조화를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전국의 사찰 역시 마찬가지이고, 조선 왕릉 또한 자연과의 조화를 가장 큰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기실 우리 민족문화의 전통은 자연과의 조화의 추구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전통은 일제 식민지 시대와 박정희의 개발 독재를 거치면서 철저히 붕괴되었습니다. 정치·관료·재벌의 소수특권층 지향적인 '근대화와 개발'이 '근대화'나 '경제 성장'의 이름으로 평가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파괴, 단절 그리고 죽음으로 연결됩니다. 이제 자연과의 조화가 복원되어야 합니다. 자동차로 상징되었던 속도 위주와 인간 위주의 사고방식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아파트로 상징되는 개발과 탐욕의 사고방식을 떨치고 과연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본원적인 성찰을 해야만 할 때입니다.
공공재의 사유화
돌이켜 볼 때, 가장 아쉽게 생각되는 점은 운동 진영은 항상 제도권 정당과 '제휴'와 '연대'를 주장했지만, 정작 '제휴'와 '연대'의 주체는 세워내지 못한 채 결국 소수의 명망가들이 제도권 정당으로 '흡수, 영입, 수혈'되면서 운동은 위축되고 축소되어갔다는 사실입니다. 제도권 정당으로 옮긴 그 명망가들이 얼마나 '출세'했는가의 '높이'가 그 노선과 방향이 얼마나 정확했는가의 척도로 둔갑되기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운동 진영은 제도권 정당에 '진입' 하기 위한 경쟁의 장으로 되었던 점을 뼈아프게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수십 년 간 이런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운동진영은 '출세'가 목표로 되는 본말전도의 현상을 피하기 어려웠고, 이러한 상황에서 운동 진영은 갈수록 왜소화해지고 초라해졌다고 봅니다.
사실 민주화는 운동권만의 투쟁에 의하여 성취된 것이라기보다는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유형무형으로 보내준 지지와 도움에 의하여 함께 이뤄낸 일종의 공공재(公共財)였습니다. 그러나 운동권 진영은 이를 너무 빨리 사유화한 셈이지요.
저는 박정희, 전두환 정권 때 6년 넘게 수배를 당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TV에 크게 수배 사진을 보여주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끝내 잡히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민중들의 보호 덕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이다"라는 말을 믿고 싶습니다. 비록 우리의 목표가 꼭 성공을 거두지는 못할지라도, '사(私)'와 '당(黨)'을 버리고 대중과 함께 '공(公)'을 행하는 실천을 전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그것이 '운동권'이라는 그 이름을 헛되이 만들지 않고 正名을 실천하는 길이며, 우리의 자존심을 위하여 그리고 민주화운동으로 살아온 그 자부심을 위하여 남겨진 마지막 임무가 아닐까요?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섹시한' 길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붙이겠습니다. 최근 어느 유망한 한 젊은 교수가 진보진영이 전진하기 위해서는 "진보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섹시한 사람, 매력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제가 볼 때는 그렇게 가는 것이야말로 '진보 세력'이 정말 죽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시류'에 영합하려는 사고방식에는 이미 '혼'을 잃고 '입신양명'만 노리는 '무늬만 진보'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진보 세력'이 가야할 길은 어떠한 영역에서든 대중과 함께 가려는 '섬김'의 정신과 '헌신하는' 소박한 삶의 자세가 기본적인 전제조건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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