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과 '원칙'이 있는 사회를 위하여
사회란 다양한 개인과 집단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사회가 원활하게 그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의사소통의 체계가 정립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 사회든 그 구성원들은 일정한 규범에 의하여 제정된 언어를 수용하여 강제적으로 따르게 되는데, 이 의사소통의 매개인 언어를 바로 규약의 체계, 즉 코드(code)라고 한다. 개인은 이 사회적 규약에 토대를 둔 언어에 근거하여 언어생활을 영위하게 되며, 이러한 언어의 국가 사회적 규범을 지배하는 것이 바로 '표준(標準)'이다.
우리 사회에서 '기본'과 '원칙'이 충실히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점은 오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갖가지 문제를 야기시킨 근본적인 요인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준(基準)'이나 '표준(標準)'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영어 'standard'는 원래 '군기(軍旗)'라는 뜻으로서 중세시대 전쟁에서 병사들이 전투를 벌이는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꼿꼿하게 박아놓고 병사들로 하여금 결전을 치르도록 하는 의미가 있었다. 이 군기가 쓰러지면 병사들은 더 이상 전진을 하지 못하고 패퇴해야만 했다. 따라서 'standard'라는 단어는 전쟁터의 용사들이 적의 어떠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꼿꼿이 버티는 자세에 적용되어, '최후의 저항, 반항, 확고한 입장'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김현권, "언어를 둘러싼 표준 이야기"). 결국 '기준', 혹은 '표준'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standard'는 사회의 최후의 버팀목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기준'이 무너지게 되면 전체 사회가 붕괴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기준'과 '원칙'을 나타내는 'principle'의 어원은 라틴어 'principium'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그 의미는 '시작', 또는 '근원'이다. 사실 '법'을 뜻하는 'law'의 어원도 'origin'으로서 '근원'이다. '규칙'을 말하는 'rule'의 어원은 "똑바로 가다"에서 비롯되었다. '시작' 또는 '근원'이 없으면,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다. 이렇듯 '기준'이나 '원칙'은 '근원' 혹은 '똑바로 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공자가 필생의 사업으로『춘추(春秋)』를 기술한 목적은 바로 '천하의 표준'을 삼고자 함에 있었다. 공자는 노나라의 사구(司寇)로 일했는데, 제후들에게 시기를 받았고 대부들에게 배척을 당하였다. 그는 끝내 자기의 말이 채택되지 않고 자신의 학술은 실행될 수 없음을 알고『춘추』를 통하여 역사의 시비(是非)를 평론함으로써 '천하의 표준'으로 삼아 제왕을 비판하고 제후를 질책하였으며 대부(大夫)는 성토하였는데, 그 목표는 왕도(王道)를 달성하는 데 있었다.
실로 사회의 '원칙'과 '기준'이 무너지면 그 사회는 결코 존립할 수 없게 되고 스스로 근저로부터 붕괴되는 것이다.
지켜야 할 진정한 '가치'와 '권위'를 결여하고 무엇을 '보수'해야 할지도 모르는 보수, 그리고 지향해야 할 진정한 '가치'와 '대안'을 확신 있게 제시하지 못하는 진보 모두 먼저 스스로 뼈아픈 반성으로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우리 사회는 항상 이른바 '거대 담론'과 '정치문제'에만 몰두한 채 나름대로 사소하다고 간주되는 주제에 관하여 진실에 대한 천착과 규명의 노력을 너무나 쉽게 일축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사실 이 세상에서 작은 문제들의 해결 없이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인가?
대다수 문제의 경우, 이른바 작은 문제와 큰 문제는 상호 연결되어 있다. '구체적인 정책적 의제의 해결을 모색하고 추구하는' 작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체제 차원의 규칙을 확립시키려는' 큰 문제의 해결에 직면하게 된다. 과연 큰 문제와 작은 문제의 해결이 그 순서가 있어야만 하는 것인가?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그 문제가 크고 작다는 판단은 과연 누가 내리는 것일까? 도대체 그러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이 가능할까? 또 반드시 모든 사람이 큰 문제에만 모조리 매달려야 할까?
각자 자신이 서 있는 그 현장에서 자신이 겪고 있는 현안 문제를, 그것이 작든 크든, 해결하려는 자세가 곧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실천 정신이다. 버트런드 러셀도 "세계에 유익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부당한 특권을 옹호하는 데 시간과 정열을 낭비하는 대신 세계 전체를 행복하게 하고 경제적 탐욕의 갈등이 줄어들게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건설하려는 충동에 기반을 두고, 언제나 실제로 해야 할 실질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다."고 말하였다. 추상과 모호함의 수렁에서 벗어나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으로 구체적으로 실질적 문제의 실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렇게 하여 '제2의 실학운동'을 전개해야 할 시점이다.
棄黨立公, '黨'을 버리고 '公'을 행하라
옛말에 "군자는 의(義)에 즐거워하고, 소인은 이(利)에 즐거워한다."고 하였다("君子喩迂義, 小人喩迂利",『論語 · 里仁』). 인류의 역사는 '공(公)'과 '사(私)'의 투쟁사라고 할 수 있다. 역대 대다수의 권력들이 '공(公)'과 '의(義)'를 추구하지 않고 '사(私)'와 '이(利)'만을 추구했기 때문에 민심이 이반되어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이고, 멸사봉공(滅私奉公)이 아니라 '멸공봉사(滅公奉私)' 그리고 '선공후사(先公後私)'가 아니라 '선사후공(先私後公)'의 방향으로 가는 이 땅의 정치인 집단이나 자칭타칭 '고위층'들의 모습으로 인하여 대중들로부터 철저히 배척받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진보 진영도 과거 '공(公)'을 추구했던 투쟁기를 거쳐 제도권에 진입한 뒤 어느덧 '사(私)'에 연연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의 뒤안길로 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진보세력의 조락은 이념과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실천과 자세에 있어서 '공(公)'을 실현하지 못함에 기인한 바 크다고 있다고 평가될 수 있다). 진보 진영은 상층부의 연대 혹은 제휴라는 전술만으로 점철되어 왔던 그간의 관성, 즉, 진보진영 집단의 틀과 사고방식 안에 갇힌 '당(黨)'의 차원을 극복해야 한다. 그리하여 다시 이 땅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대중과 함께 '공적(公的) 가치'와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지향하고 실현하는 풀뿌리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개인적 이익으로서의 '사(私)'만을 추구하고<하지만 사(私)를 모두 배격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개인의 이익은 사회의 근본이고 인간의 본성으로서 개인적 이익의 추구는 사회 진보와 역사 발전의 추진력이다. 다만 이러한 사적인 이익 추구는 어디까지나 정당한 방법으로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추구되어야 할 것이지 결코 범죄, 착취, 편법에 의하여 추구되어서는 안 된다.> 온갖 '편법(便法)'과 '불공정(不公正) 경쟁'에 의해 자기가 속한 집단의 기득권 및 특권의 유지와 확대에만 몰두하는 '당(黨)'의 차원을 넘어서서 사회 구성원 전체의 이익으로서의 '공(公)'을 실현하고 '좋은 규칙과 법'을 만들어가며 '공정(公正)'을 추구하는 운동을 전개해나가야 한다.
여기에서 '공(公)'이란 단순히 '전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사회의 민주화와 평등을 지향하는 주체적 시민, 혹은 공민으로서의 개념을 동시에 가진다. '공민(公民, citizen)'이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즉 참정권(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졌으며 동시에 국가권력에 대한 감독권을 지닌 사람들을 지칭한다. 이 '공민'의 '공(公)'이란 우리나라에서 '국민 전체' 혹은 '국가'의 '전체'라는 측면만을 강조하여 사용되고 있지만, 기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으로서 자각을 하고 사회에 참여한다."는 주체적인 개인주의의 인간관이 강력하게 반영되어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른바 '전체(全體)'는 책임과 의식을 지닌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성립된 것이다. 그리하여 공민이라는 개념은 자신의 사적 이익과 함께 공공의 이익도 동시에 추구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공민으로서의 주체성이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실천의 과정을 거칠 때만이 비로소 보편적인 공민 의식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며, 그러한 의식의 토대 위에서 비로소 공민의 권리가 실현될 수 있다. 따라서 '공(公)'을 중심으로 한 지행합일의 실천 정신이 가장 중요하다. 이신작칙(以身作則), 먼저 자신이 실천하는 자세로써 추상적인 발언이 아니라 자기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공익을 위한 활동을 전개해야 한다. 좋은 제도가 좋은 미덕을 만든다는 신념으로 이 사회에 좋은 법률과 제도를 만드는 실천 활동을 바로 나 자신부터 한 걸음 한 걸음 실천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구체성이 결여된 허명(虛名)을 배격하고 허장성세의 공론(空論)을 지양하며, 이 사회를 진정으로 '이름'과 '실제'가 부합하는 그러한 사회로 만들어나가야 한다.
앙시앙 레짐으로부터의 독립운동
많은 사람들이 경험해 본 적이 있겠지만, 검찰이나 경찰은 힘 있는 사람에게만 법이 통하고 그것이 집행된다. 그리하여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증명이 필요 없는 공리(公理)로 된지 이미 오래이다. 지금은 이름이 국민권익위원회로 바뀐 이전의 국민고충처리위원회도 민원을 제기해봤자 담당부서가 돌고 돌아 결국 아무런 효과도 없이 민원인의 기운만 빼놓기 일쑤였다. 그래서 오죽하면 국민고충위원회가 국민에게 '고충'을 주는 기관이라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적 신뢰는 그 근본으로부터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언론, 정치권, 국가기관, 시민단체 등등 모든 기존 제도권들이 '공(公)'과 담을 쌓고 있으니, 이제 모든 제도권 세력, 혹은 기득권 세력과 담을 쌓고 독립적으로 일종의 '인디 운동'을 전개할 수밖에 없는 사정으로 되었다. '인디'란 영어 'Independence'의 준말이다. 음악이나 영화에서 사용되는 용어로서 상업화에 동조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이나 영화를 제작하고 발표하는 부류를 지칭한다. '독립영화'란 다른 말로 '인디영화'라고도 하며, 이윤 확보를 1차 목표로 하는 일반 상업영화와는 달리 창작자의 의도가 우선시되는 영화로서 여기에서의 '독립'이란 자본과 배급망으로부터의 독립을 뜻한다. 또 '인디음악'이란 메탈이나 힙합 같은 구체적 장르를 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와 창작성 그리고 자율성에 치중하여 활동하는 대중문화의 '아웃사이더'를 통칭한다.
이제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메시지를 가슴에 담고서 '인사이더'들이 독점, 농단하는 사회 제도와 관념을 단호하게 뛰어넘어 창의적이며 자율적으로 사고하고 실천하는 '아웃사이더'들이 많아져야 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독립(인디) 운동'이 보다 폭넓고 깊이 있게 각 분야에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재 독립영화 '워낭소리'가 200만 관객을 돌파하고 장기하의 인디 음악이 대중들에게 상당한 정도로 어필하고 있는 현상은 자못 흥미로운 시대의 징후가 아닐 수 없다.
독립(인디) 운동이란 일체의 '앙시앙 레짐' 및 그것의 표상으로서의 '사(私)'와 '당(黨)', '불공정' 그리고 '반칙'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한다. 그것은 기존 정당과 기존 공무원 시스템과 제도언론 등 '구체제'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사(私)'와 '당(黨)'을 넘어 '공(公)'을 지향하고 '말'과 '사회'의 '기본'을 지키는 운동이며, 동시에 단일과 단색(單色)을 극복하는 다원과 다양성을 지향한다. 또 그것은 최상위층 이익 추구의 틀로서의 신자유주의로부터 독립하여 공평(公平)이 실현되는 사회를 지향하며, 약속(信)이 지켜지고 '이름'과 '실제'가 부합하는 신뢰의 사회에서 모두가 함께 환경을 지키며 공존할 수 있는 좋은 법과 제도를 만들어가는 운동이다.
다만 우리가 싸워야 할 상대는 이 땅에서 '시간 끌기'와 '모르쇠'의 유명한 전문가이며 또 그 주변이 모두 '초록은 동색'으로 단단한 네트워킹이 되어 있는 집단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깊이 명심해야 한다. 그리하여 아무쪼록 상대보다 더 끈질기게 고래심줄처럼 지속적으로 문제제기하고 주변에 뜻이 통하는 사람들을 규합하여 목소리를 더욱 크게 해야 할 것이다. 인터넷 매체를 비롯하여 시민단체나 언론매체 등 각종 유용한 수단을 활용하는 방안도 모색해야 한다. 이 사회에는 의외로 '공적(公的)인 가치'를 갈망하고 그것의 실현에 동조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따라서 '사(私)'와 '당(黨)'을 버리고 '공(公)'과 '의(義)'를 실현하는 운동은 그 전도가 결코 어둡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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