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法)'이라는 말은 원래 무슨 의미를 띠고 있을까?
법(法)이라는 말은 원래 고대 한자어 '灋'라는 글자로부터 비롯되었다. 물 '수(水)'와 해치 '치(廌)' 그리고 갈 '거(去)'라는 세 글자가 합쳐진 글자이다.
우선 물 '수(水)'는 두 가지 함의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법률과 법도가 물과 같이 공평하고 불편부당(不偏不黨)해야 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다른 하나는 실천적인 의미로서 원시시대 부락공동체는 골짜기나 강(江)으로써 경계를 삼고 살았으며, 사람들은 그 공동체를 벗어나 살아갈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동체로부터 공동체 밖의 '강가'로 '축출'되는 것은 곧 사형선고와 다름없었다. 이렇게 하여 강이란 형벌의 위엄을 지니게 되었고, 당시 공동체 생활의 준칙을 의미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해치 '치(廌)'는 흔히 알고 있는 해태로서 전설에 나오는 뿔이 하나 있는(일각수, 一角獸) 신령스러운 짐승이며, 그 모습은 소나 양, 사슴, 곰 그리고 기린과 비슷하였다. 그런데 이 신령스러운 동물은 시비곡직을 분별할 줄 알아 안건을 심리할 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뿔로 받는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해치는 공정과 위엄의 상징으로서 법을 의미하게 되었다. 갑골문에도 '어치(御廌)'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그것은 법 집행을 담당하는 관리를 뜻하고 있다.
그리하여 중국 한나라 시기 이후 법 집행을 담당했던 어사(御史)는 머리에 쓰는 관을 해치의 형상을 본떠 만들었다. 또한 해치의 형상은 법을 집행했던 관리의 묘벽(墓壁) 위나 제왕 능묘의 통로에 조각되어 있거나 혹은 황궁의 비첨(飛檐; 처마) 위에 앉아 인간 속세를 굽어보는 길상(吉祥) 동물로 모셔졌다(우리나라에 있는 해태상은 본래의 해태와 달리 모두 뿔이 없는 형상으로 조각되어 있다. 더구나 법과의 관련성이라는 의미는 퇴색된 채 화재 예방 차원으로 격하되었다. 국회 입구에 있는 해태상 역시 '법과 전혀 무관하게' 월탄 박종화 선생의 제안으로 화재 예방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하여 법(法) 자에서 해치 '치(廌)'는 사회 권위 기구의 상징을 나타냈다.
마지막으로 '거(去)'는 '버리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去'의 고자(古字)는 화살 '矢'와 활 '弓'이 아래위로 합쳐진 글자였다. 원시시대 사람들은 사냥으로 잡은 짐승의 귀속 문제로 분쟁이 자주 발생하였고, 이때 해결의 방법은 사냥으로 얻은 짐승에 꽂혀있는 화살과 사람이 가지고 있는 활과의 관련성 여부였다. 그리하여 화살과 활은 가장 믿을 수 있는 증거로서 '거(去)'라는 글자는 이렇게 '증거'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진시황의 진나라 이후 법(法)이라는 개념은 두 가지 특징을 보였다. 하나는 법이란 '공의(公意)'의 체현으로서 "친소(親疎)와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일체 법에 의하여 처리한다."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법의 두 번째 특징은 '형(刑)'과 결합되어 "안으로는 칼과 톱으로, 밖으로는 군대로써 시행한다."라는 표준으로 되었다는 점이다.
'형(刑)'이라는 글자는 '정(井)' 자와 '도(刀)' 자가 합쳐진 글자로서 '정(井)은 법도나 조리(條理)를 의미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형(刑)'이란 '법'과 '칼'이 합쳐진 글자로서 '처벌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한편 '헌법(憲法)'이라는 말의 '헌(憲)'이라는 글자는 무슨 뜻일까?『당운(唐韻)』을 보면, "법을 걸어놓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헌(憲)'이라 한다. '해(害)'와 '목(目)' 그리고 '심(心)'이라는 글자가 합쳐져 법상(法象)을 보고 사람들로 하여금 '불선(不善)'의 해(害)를 알게 하며, 눈(目)으로 보고 마음(心)으로 두려워하여 범하지 않게 하다."는 뜻으로 풀이되어 있다.
'죄(罪)'의 고어(古語)는 원래 '辛' 위에 '自'가 있던 글자로서 "죄를 지은 사람이 코를 찡그리고 고통을 당하는 괴로움"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진(秦)나라 때 황제 '皇'과 글자 모양이 유사하다는 이유로 '罪'라는 글자로 바꾸도록 하였다.
'벌(罰)'은 '도(刀)'와 '리(詈)'가 합쳐진 글자로서 '리(詈)'는 '욕하다'의 뜻이고 '도(刀)'는 형법(刑法)을 의미하여 징벌과 처벌을 뜻한다.
"법이란 천하가 같이 지켜야 한다"
『사기· 장석지풍당열전』에는 법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법률을 집행하는 관리의 자세는 과연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음미할 만한 글이 있다.
중국 한나라 문제(文帝) 때, 하루는 황제가 나들이 행차를 나가 다리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한 사나이가 다리 밑에서 급히 나와 황제가 탄 수레를 끄는 말이 놀라 껑충 뛰었다. 호위병들이 즉시 그 사나이를 잡아 정위(廷尉: 형벌을 집행하는 관리) 장석지(張釋之)에게 넘겼다. 장석지가 그를 취조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저는 장안에 살고 있사온데, 오늘 이 거리를 지나다가 행차 소리가 들리기에 얼른 다리 밑에 숨었습니다. 얼마가 지나 이제는 지나가셨겠구나 생각하여 나왔는데, 아직 수레와 말이 보여 급히 달아났던 것입니다."
잠시 후 장석지는 판결을 내렸다. 혼자 행차를 범한 것이므로 벌금형에 해당된다는 판결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황제는 매우 화가 났다.
"그 놈은 내 말을 크게 놀라게 했던 놈이다. 다행히 내 말이 순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까지 부상당할 뻔했다. 그런 놈을 겨우 벌금형에 그치다니 말이 되는가!"
그러자 장석지는 황제를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
"법률이란 천자와 백성들이 똑같이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법률에 의거하여 마땅히 이렇게 판결해야 합니다. 만약 중하게 처벌하게 되면 법률은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이미 신뢰를 잃게 됩니다. 이번 사건만 해도 폐하께서 만약 그 자리에서 즉시 죽이셨다면 그만이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그를 정위의 심리에 넘겨주신 것이며, 정위란 천하 법률 집행의 표준입니다. 정위가 한번 편향하게 되면 천하의 모든 집행 관리도 마음대로 경중을 적용시키게 되어 백성들은 도대체 어디에 손발을 놓아야 하는 것입니까? 폐하의 신중한 고려를 바라옵니다."
한참을 생각하던 황제는 "정위는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법률의 생명은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취급하며 각자에게 그의 몫을 찾아주는 데 있다. 이를 위해 법률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를 끊임없이 분별한다. 과연 법률이란 천자와 백성이 똑같이 지켜야 하는 것이다. 만약 법률을 마음대로 적용되게 되면,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이미 신뢰를 잃게 된다. 또한 법을 집행하는 관리는 천하의 법률을 집행하는 표준이다. 이들이 마음대로 법률을 집행하게 되면 백성들이 수족을 놓을 곳을 찾지 못하고 천하가 어지러워진다.
『관자』는 "법이란 천하의 정식(程式; 규격, 격식)이며 만사의 의표(儀表)이다"라고 하였다. 법률이란 사회의 각종 행위를 측정하는 기본 규범이라는 의미이다. 또『신자(愼子)』는 법률 제도를 설치하는 목적은 '입공기사(立公棄私)'라 하였다. 즉, 법률의 목적은 바로 '공(公)'을 세우고 '사(私)'를 버리는 데 있다는 것이다. 한편『주역』은 법률과 관련 있는 개념을 감(坎) 괘로 보는데, 이 감괘는 물(水)을 상징하며 수(水)는 '평(平)'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법률은 '평(平)'을 기본 특성으로 하여 물과 같은 공정 무편향성을 지니며, 따라서 선악판단과 시비판별의 표준으로 된다.
"법이란 공의(公意)의 선포이자 행위이다"
영국의 저명한 사상가 존 로크는 "사회에 있어서의 사람의 자유는 인민들의 동의를 거쳐 국가 내에서 제정된 입법권 이외에 어떠한 다른 입법권의 지배도 받지 아니하며, 입법기관이 위임하는 것 이외에 그 어떤 의지의 관할 혹은 어떠한 법률의 제약도 받지 아니한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법률은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며, 결코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법률이란 각 개인의 자유의지를 포함하고 있는 공동의지이며, 각 개인의 정당한 이익을 포함하고 있는 공익(公益)으로서 법률과 자유는 하등 대립될 이유가 없다.
한편 루소는 법률이란 '공의(公意)'의 선포이며 동시에 '공의'의 행위이고 또한 공동의지의 확정 행위이자 사회계약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 자신의 의지의 기록이라고 파악하였다. 그는 "법률이란 전체 인민이 전체 인민을 위해 만든 규정이며, 인민 자신의 의지의 기록이다"라고 천명하였다. 이렇듯 법률이란 공의(公意)의 체현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법률에 복종하는 것은 자신에게 복종하는 것일 뿐이다. 법률은 이처럼 의지의 보편성과 대상의 보편성을 결합시키고 있으므로 그 어떤 사람이 자의적으로 내린 명령은 결코 법률이 될 수 없다. 설령 통치자가 개별 대상에 내린 명령 역시 결코 법률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명령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주권적 행위가 아니라 행정적 행위일 뿐이다.
'일가지법(一家之法)'이 아니라 '천하지법(天下之法)'을
"어느 시대이든 기존 체제에 저항하는 소수의 창조적인 정신은 존재한다."
전체주의의 철저한 속박 속에서 법치주의의 토양이 척박했던 중국에서도 황종희라는 인물이 존재한 것을 보면 이 말은 역시 사실인 듯하다.
황종희(1610 - 1695)는 중국 역사에서 보기 드물게 진보적인 민권사상가였다.
황종희는 명나라 말기부터 청나라 초기에 살았던 인물로서 만년에 이르러 스스로 자기의 경력에 대하여 "처음에는 당인(黨人)이었고, 그 다음에는 유협이었으며, 마지막에는 유림으로 되었다"라고 소개하였다.
그는 군주 1인에게 입법, 사법, 군사, 행정 등 모든 권한이 집중되었고, 이것이 일가지법(一家之法)의 폐단이었다고 강조하였다. 이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천하지법(天下之法)'으로써 군주의 전횡을 제한하고 약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황종희는 "따라서 천하의 모든 태평과 혼란은 결코 한 집안의 흥망인 것이 아니라 만민의 고락(苦樂)인 것이다"고 갈파하였다.
나아가 그는 "법이 아닌 법(非法之法)은 오직 천하 사람들의 수족을 속박할 뿐이고, 오로지 천하의 법으로 될 때 진정한 의미의 '법에 의한 다스림'이 있으며, '법에 의한 다스림'이 존재할 때 비로소 법에 의해 일을 처리할 수 있고,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라면서 무엇보다도 법이 "한 집안의 법, 즉 일가지법(一家之法)으로부터 천하의 법, 즉 천하지법(天下之法)으로 바뀌어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선진시대의 '법은 권세에 영합하지 아니 한다'는 사상을 계승하여 모든 사람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사상으로까지 발전시켰다. 그는 천하를 천하 사람의 천하로 만들고 천하 사람에게 공평한 법이 존재할 때만 비로소 법치를 시행할 수 있고, 동시에 천하의 일을 공정하게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으며, 사람들이 천하를 군주의 개인소유로부터 빼앗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법은 반드시 '천하의 공(公)'에 따라야 한다
황종희와 함께 중국의 진보적인 사상가로 왕부지(王夫之, 1619-1692)를 들 수 있다.
그는 개인의 이익을 위한 모든 통치와 그 법률제도는 '부정(不正)'이며, 거기에서는 그 어디에도 이른바 정통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그는 법치에 대해 사(私)에서 공(公)으로 발전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에 의하면, 진나라 진시황이 후세의 지탄을 받는 이유는 그의 입법이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법은 반드시 '천하의 공(公)'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대공(大公)'으로써 '대사(大私)'를 대체해야 하며, 이것이 역사적인 필연 법칙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에 따르면, 법률은 황제 1인을 위하여 복무하는 어용 수단도 아니고, 또한 하나의 왕조를 위하여 복무하는 '한 시기만의 제도'가 아니다. 법률이란 마땅히 '고금(古今)의 통의(通義)'를 체현하는 '천하의 공기(公器)'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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