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한국 사회에서 공무원 개혁은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면, 제대로 된 시도조차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간 우리나라에서 역대 정권이 정부의 근간인 공무원 조직을 개혁해내지 못한 것은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내고 발전시키지 못한 가장 큰 요인 중의 하나였다.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의 '진보 정권'이 집권했을 때에도 오히려 공무원 관료집단을 '전문가집단' 및 '권력의 기반'으로 간주하면서 철저히 의존했고 결국 그들에게 이끌려 '업혀간' 성격이 강했다.
우리나라 사회처럼 정부 주도형의 중앙 집중 성격이 강한 사회일수록 공무원 관료집단의 권력은 막강해진다. 뿌리 깊은 관존민비 사상의 토양 위에서 이러한 경향성은 강화된다. 하지만 공무원 관료집단의 힘은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채 과소평가되고 있다.
오죽하면 정권은 잡았으되 곳간 열쇠와 부엌살림은 계속 공무원 집사에게 맡기는 '청와대 하숙생 신세'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권력은 5년마다 바뀌지만, 관료들은 바뀌지 않은 채 언제나 그 핵심적인 자리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정권이란 전체 공무원조직에서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이제 물 속에 담겨 있는 거대한 이 공무원 관료 조직을 효율화시키지 않고서는 이 나라와 민족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공무원 조직은 한 나라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틀이며 魂이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도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고 국가 발전에 혼신의 힘을 다하는 공무원도 적지 않게 존재한다. 필자도 개인적으로 그러한 사람들을 알고 있다. 핵심적 문제는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모순에 존재한다.
'공(公)'이란 무엇인가?
'공(公)'이라는 한자는 '八'과 '厶'가 합쳐진 글자로서 '八'은 "서로 등을 돌리다, 서로 배치되다"라는 뜻이고, '厶'는 '私'의 본자(本字)이다. "韓非曰"에는 "스스로 경영하는 것을 厶라 하고, 厶와 배치되는 것을 公이라 한다."고 풀이하고 있다. 그리하여 '공(公)은 "私와 서로 등을 돌리다 혹은 배치되다", 즉 "공정무사(公正無私)하다"는 뜻이다. 한편 '사(私)'란 '禾'와 '厶'가 합쳐진 글자로서 '벼(禾)'나 '농작물(農作物)'를 의미하였는데, 즉, 개인의 수확물이나 소유물을 의미한다. <'공(公)'과 '사(私)'는 항상 대립되는 의미로서 사용되어 왔는데, 이는 한자어에서도 나타난다. 즉, '병공집법(秉公執法)'은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다"는 뜻인데, 반대어는 '순사왕법(徇私枉法)'으로서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법을 왜곡하다"는 의미이다>.
한편 독일에서 '공무(Öffentlicher Dienst)'이라는 용어에 포함되어 있는 'öffentlich(공공)'라는 용어는 '열린'이라는 뜻의 'offen'으로부터 형성되어 모든 것이 은폐된 것이 아니라 "모두의 눈으로 보아 명확하게 보이는 것처럼 열려있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이 형용사는 프랑스 계몽사상의 정신을 받아들여 19세기 독일에서 슬로건처럼 많이 사용되었고, 현대의 하버마스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사회 시스템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여기에서 '공공(公共)의 것은 결코 권력자에게 귀속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어느 누구에게도 열려있다'는 개념을 뜻하고 있다. 그리하여 'öffentlich'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로부터 비롯하여 '공개된, 투명한'이라는 뉘앙스를 지니고 된 단어이다. 이는 공무원이 정당한 이유 없이 직무상의 정보를 국민에게 은폐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음을 의미하고 있다. 'öffentlich'의 반대어는 'privat'로서 원래 "모두의 눈으로 보아 흠결이 있다"는 뜻으로서 이로부터 "닫혀있다"는 의미를 거쳐 '사적인'의 의미로 확대되었다. 또 '공(公)'의 의미로 사용되는 영어 단어 'public'은 고대 라틴어로부터 기원했는데 본래 'people'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강현철, "재미로 풀어보는 법령용어").
민주주의가 아니라 '官'주주의인 나라
철옹성으로 여겨지던 일본 자민당이 붕괴되었다. 일본은 그간 '민주주의'가 아니라 '관(官)주주의'라 불릴 만큼 관료 집단의 힘이 막강했다. 기실 자민당 의원들도 관료들에 의하여 조종되는 대상일 뿐, 실제 국가는 관료들의 손에 완전 장악되고 있었다. 실로 일본 국민들은 자민당식 관료주의에 명백한 반대 의사를 표현한 것이다. 정작 중요한 사실은 일제시기부터 모든 제도를 이식받았고, 해방 후에도 일본에 대한 모방, 학습에만 열중해온 우리나라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공복(公僕)인 공무원에 대한 감독 기능이 극도로 취약한 상황에서 공무원 관료집단이 대중에게 봉사하기는커녕 오히려 전 사회의 지배 구조를 장악하면서 대중 위에 군림하는 본말이 전도된 현상은 우리 주위에 너무도 일반화되어 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 사회는 그간 치열한 고민과 실천이 너무나 결여되어 있었다.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는 한, '한국호'의 미래는 결코 밝을 수 없다.
科擧 제도와 완전히 동일한 고시제도
무엇보다도 전 근대적인 고시(考試) 제도를 철폐해야 한다. 사법고시를 비롯하여 행정고시, 외무고시 그리고 입법고시 등 단 한 번의 시험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며, 이 시험을 제외하고 다른 방법으로는 공무원 시스템에 진입할 수 있는 대체 방안이 전무하다는 점에서 현재의 고시제도를 포함한 공무원시험제도는 전근대적인 과거(科擧)제도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전히 동일하다.
그간 우리나라의 상위직 공무원은 거의 대부분 고시라는 획일적인 경로를 통하여 충원되어 왔다. 그리고 이러한 고시제도는 항상 기수(期數)로 묶어지면서 관료집단의 자기 세력 확대재생산의 제도적 토대로서 효과적으로 기능해왔다. 이렇게 상위 공직자의 충원이 고시 출신자의 내부 승진만으로 독점됨에 따라 우리나라 고위 공직 사회는 폐쇄성이 강하게 나타나며, 이에 따라 복잡다양하고 전문화된 행정수요에 대응하기 어려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 특히 행정고시, 외무고시, 기술고시 그리고 입법고시 등 현행 5급 공채, 즉 고시제도는 공무원 채용에 있어 사실상 일반 행정가 선발을 그 핵심 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다양하고 전문화된 각 부처의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 외무고시를 예로 들어보자.
현재 외교관 충원의 대표적인 방식인 외무고시는 특정 과목을 집중적으로 준비하여 규정된 형태의 문제에 대한 답안을 일정한 방식에 의해 써야 합격할 수 있는 전형적인 암기형 시험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의 공부는 외교 일선에서 요구되는 실질적인 외교관의 능력과 큰 관계가 없다.
외무공무원은 국가의 기타 관료 시스템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이들에게 요구되는 조건은 급변하는 국제 사회에 대응할 수 있는 탄력적인 사고와 세련된 감각, 다양성을 인정하는 시각 등이다.
외교관의 능력이란 해박한 국제법 지식, 뛰어난 국제정치적 감각, 그리고 유창한 외국어 실력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세 가지 조건 중 그 어느 능력도 현재의 외무고시를 통해서 정확하게 획득되어진다고 보기 어렵다. 이렇게 이전 시기에 통용되던 방식으로 선발된 외교관들에게 질적으로 심화되고 양적으로 급팽창한 오늘날의 외교를 맡기는 데서 우리나라 외교의 갖가지 문제가 빈발하고 있는 측면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외무고시는 일부러 합격자를 소수로 제한함으로써 자신들만의 엘리트주의를 극대화시켜 왔다는 비판을 듣고 있고, 심지어 외교 관료가 세습화되고 있다는 비난조차 존재하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인구 500만 명에 지나지 않는 덴마크는 127개 재외 공관에 1,676명의 외교관이 포진하고 있다. 세계화에 있어 가장 성공적 국가로 평가되고 있는 네덜란드의 경우, 인구는 우리의 3분의 1밖에 안되지만 재외 공관 수 145개에 외교관 수는 3,051명에 이른다. 이에 비하여 우리나라의 경우 2008년 현재 재외 공관 수는 146개에 외교관 수는 2,138명에 불과하다.
따라서 현재의 외무고시 제도 폐지를 포함하여 외교관 충원 제도가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재와 같은 폐쇄적인 외교관료 시스템을 개선하여 국제 감각을 갖춘 유능한 인재들을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과감히 채용하고, 지역과 기능에 걸맞은 인원들을 충원하여 각 부서별 전문성을 제고시켜야 한다.
이를테면 미국 국무부는 주재국 현지 사정에 밝은 건설업체 직원을 외교관으로 특채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능력을 지닌 인재는 해외 교민 사회를 비롯하여 우리나라에도 대단히 많다. 또한 국내외의 수많은 대학원에서 매년 거의 모국어 수준의 영어와 제2 외국어를 구사하며 국제법, 국제정치, 국제경제 등의 이론적 배경을 포함하여 선진국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수준 높은 국제 감각을 지닌 한국 국적 졸업생들이 다수 배출되고 있다.
'대통령 임명직' 인사는 오히려 더욱 확대되어야
이른바 '낙하산 인사' 문제가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고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자면, 역설적으로 이렇게 철저하게 독점적이고 외부에서 거의 진입할 수 없도록 장벽을 높다랗게 둘러친 정부공무원 조직의 경직되고 폐쇄된 시스템은 시급히 개혁되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국에서는 오히려 이러한 정무직 임명 범주가 훨씬 넓다. 대통령과 정부가 바뀌면 정부 국장급까지 정무직(political appointees)으로서 모두 대통령이 임명하게 된다. 미국 대통령이 임명하는 최고위층 공무원은 EL-Ⅰ에서 EL-Ⅴ까지 5등급으로 분류된다(EL= Executive Level).
EL-Ⅰ: Secretary(장관)
EL-Ⅱ: Deputy Secretary(부장관)
EL-Ⅲ: Under Secretary(차관)
EL-Ⅳ: Assistant Secretary(차관보)
EL-Ⅴ: Deputy Assistant Secretary(국장급)
프랑스 역시 중앙부처의 국장, 임명직 도지사, 교육감, 대사 등 500여 개의 직위가 정치적 임명직(자유재량 임명직)으로서 국무회의 심의 심사를 거쳐 특별 채용하는 등 대통령은 총 7만 여 개의 직위를 임명할 수 있다. 프랑스 헌법 제13조,「국가공무원지위에 관한 법률」제25조 및 동법 시행령은 "중앙 행정부 국장은 국무회의에서 임명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대통령이 실제로 국장급 이상의 직위를 모두 직접 임명한다는 의미이다. 사실 이 정도의 규모로 바뀌어야(자기 사람을 심어야) 비로소 새롭게 들어서는 정권이 정부의 공무원 조직을 '관리·통제'할 수 있고, 자신의 정책을 힘 있게 추진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정무직의 임명은 오히려 더욱 획기적으로 '집단 투입'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어느 부처의 장관 한 명 바뀌어봤자 '거대한 바다에 돌 하나 던져지듯이' 고립무원의 허허벌판으로 '투입'되어 실제로는 아무 일도 못하게 된다.
실제 관료 출신의 차관이 해당부처 조직을 기반으로 하여 실권을 가지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이들 관료집단은 정권이나 정치가 등 강력한 외부세력을 견제, 통제하면서 자신들의 지배구조를 관철시켜 나가는 치밀한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개혁 성향의 장관이 부임하게 되면 일부러 외부 행사나 기관장 회의 등으로만 스케줄을 잡아 아예 내부 문제를 생각할 시간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국회공무원 역시 마찬가지이다. 상임위원장을 장관, 수석전문위원을 차관으로 생각하면 된다).
일본 민주당이 정권을 장악한 뒤 第一聲은 바로 일본 관료집단의 실세인 사무차관의 자리에 100여명의 민주당 의원을 '하방'시켜 배치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실세' 자리에 대규모로 투입하지 않고서는 관료주의를 혁파할 수 없다.
대통령이 정무직을 임명할 때도 '소수의 '정예 특공부대'가 아니라 선거공약 및 국책 사업을 정확히 수행할 수 있는 다수의 강력한 집단이 투입되어야 비로소 '섬멸' 당하지 않고 '대중에게 봉사하는' 그 임무를 수행해낼 수 있게 된다. 미국의 저명한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도 "대통령의 정무직 공무원 임명권을 제한하는 것은 통상 변화와 개혁에 저항하는 세력인 기존 경력직 공무원의 강력하고 뿌리 깊은 관료주의를 강화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할 뿐"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 말단 직급에서 차관이나 장관까지 올라가는 '입지전적 인물'이 많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 공직 사회의 후진성의 반영이기도 하다. 차제에 우리나라도 (탁월한 능력을 보유한 관료 등 소수의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고는) 미국이나 프랑스처럼 국장급 이상의 고위직군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정무직으로 구성하는 방안이 책임정치를 구현하는 차원에서도 타당할 것이다.
권력의 낙하산 인사가 오늘날 이토록 악폐를 끼치고 있는데,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는 반문이 당연히 존재할 것이다. 물론 이제까지 '투입된' 낙하산 인사 들 중 대부분의 경우는 자질이나 정당성의 측면에서 결함이 분명히 존재하였다. 사실 그간 드러난 이러한 자질 문제와 측근 인사의 보은(報恩)적 인사, 코드 인사 등의 문제점들은 반드시 개혁되어야 한다. 특히 이제까지 낙하산으로 '투입된' 후 해당 부임지의 올바른 개혁을 추진한 적이 거의 없었던 점은 반드시 개선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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