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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에서 외교 당국자로 산다는 것

[기자의 눈] 외교부 장관의 '반공웅변'이 있던 날

'대통령의 가이드라인도 지켜야 하고, 왕따가 되어서도 안 되고…'

외교 당국자들에게 9월 18일은 꽤나 힘들고 혼란스러웠던 날로 기억될 것 같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 상황 때문에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할지 고민스러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다 할 외교 비전도 없이 보수 진영의 눈치만 살피며 급변하는 정세를 따라기에 급급한 이명박 정부의 곤혹스런 처지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하루였다.

▲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18일 오전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최근 한반도 주변정세와 북핵 문제 전망'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연합뉴스

시나브로 멀어져 가는 한국과 미국

포문은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열었다. 그는 아침 8시 대한상공회의소 강연에서 냉전 시대 반공웅변을 방불케 하는 발언을 쏟아 놓으며 '매파 본색'을 드러냈다.

"북한의 핵무기는 남한을 겨냥한 것이다."

"북한의 목표는 적화통일이고 그런 수단으로 핵무기를 개발한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북핵 문제가 미국과의 문제이고 남북한이 잘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하다."

"북한에 대한 정책의 주안점은 비핵화에 주어질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남북관계가 북핵문제에 비해 우선순위를 가진 적도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북핵문제 해결에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


북한의 비핵화가 남북관계 개선의 전제조건이라는 이른바 '핵 연계론'이야 이 정부 들어 수없이 들어본 말이니 일단 논외로 하자.

그러나 들어본지 참으로 오래된 단어 '적화통일'을 위해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했다는 단순논리를 거리낌 없이 구사한 대목에서는 예사롭지 않다는 반응이 나왔다.

유 장관이 이명박 정부 외교안보팀의 수장으로서 뭔가 의도를 가지고 어떤 상대를 향해 준비된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외교부의 한 관계자가 전날 기자들에게 '장관 강연을 많이 취재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사실과 더해지면서 그 해석은 힘을 얻었다.

누구 들으라고 한 소리였느냐에 대한 추측이 무성했다. 설왕설래 끝에 시선은 미국 쪽으로 모아졌다. 한국이 북핵의 직접 당사자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머잖아 이뤄질 북미 양자대화에 한국의 입장도 반영돼야 한다는 점을 못 박고 나섰다는 것이다.

이는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15일 언론 인터뷰에서 최근 북미 직접대화 움직임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내비친 것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인터뷰에서 "북한이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다소간 대미, 대남, 대일 유화책을 쓰고 있는데, 현재로서는 북한이 핵을 포기하겠다는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같은 날 북한과의 적극적인 협상 의지를 드러냈다. 미국은 한국과 분명 다른 흐름으로 가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힐러리 장관은 "북한을 회담 테이블로 복귀시키는 방안의 하나로 (비핵화에) 상응하는 대가와 인센티브가 무엇인지를 북측에 직접적으로 분명하게 설명하는 방식도 모색될 수 있다는데 (한·중·일과) 인식을 같이 했다"고 말했다.

유명환 장관이 18일 북한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드러낸 것은 대통령의 의중을 이어 받아 미국의 움직임에 불만이 있다는 메시지를 미리 던진 것으로 분석된다. 그는 내주 미국에서 열리는 유엔 총회와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에 대통령을 수행해 참석한다.

외교 당국자가 갑자기 기자실을 찾은 까닭

여기까지는 상황이 비교적 간단하다. 그런데 이날 오후 들어 문제가 꼬였다. 한국과 미국의 미묘한 신경전에 북한 변수가 개입됐기 때문이다. 북한이 지난 5개월 동안 거부해오던 6자회담에 다시 참가하겠다고 전격 선언한 것이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이날 중국의 다이빙궈(戴秉國) 외교담당 국무위원을 만나 "북한은 비핵화의 목표를 계속 견지할 것이며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수호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면서 "이 문제를 양자 및 다자 대화를 통해 해결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이 '6자회담'이 아니라 '다자 대화'라는 표현을 쓰자 '혹시나' 하는 반응이 나왔다. 회담 진전에 별 도움이 안 되는 한국을 빼고 싶다는 의미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그런 요구를 받아들일 리 없고, 대남 유화전략을 펴고 있는 북한의 최근 태도로 볼 때 그런 분석은 과도한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분명한 것은 다자 대화를 하겠다는 김 위원장의 발언으로 인해 북미 직접대화에 대한 한국의 불만이 생뚱맞은 것이 돼버렸다는 점이다. 양자 대화를 먼저 하겠지만 6자회담에도 나오겠다는데 거기에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는 환영하는 게 맞다.

그러자 외교부는 고위 당국자를 오후 6시 15분 기자실로 내려 보냈다. 유명환 장관의 발언부터 톤다운 시킴으로써 한국의 입장이 그리 뾰족하지 않음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분위기 파악을 못한 한국이 동북아의 '왕따'가 되고 있다는 말을 막으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장관의 발언에 대한 보도가 너무 한 방향으로 갈 것 같아 내려왔다"고 운을 뗀 이 당국자는 "상공회의소의 강연 초청에 응한 것일 뿐 혹시 추정하듯 미국 방문 전 메시지를 내기 위해 그런 말을 의도적으로 한 건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들으라고 한 소리 아니냐'는 질문에 "전혀 아니다"라며 "질의응답 과정에서 나온 말이지 특별히 뜻을 가지고 마음먹고 한 발언은 아니다"고 거듭 부인했다.

하지만 그걸 액면 그대로 믿는 기자들은 별로 없어 보였다. 특히 이 당국자는 '이명박 대통령의 15일 발언과 같은 맥락이다'는 지적에 대해 "같은 정부 안에서 같은 정책을 다루니까 맥락은 유사할 수 있다"고 답했다. 장관의 발언이 대통령의 강경한 시각과 흐름을 같이 함을 인정한 것이다.

원하는 대로 돼도 웃을 수 없는 처지

이어 기자들은 다자 대화에도 참여하겠다는 김정일 위원장의 발언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물었다.

정부는 6자회담의 복원을 원해 왔고 핵 협상의 주도권이 북미 대화로 넘어가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따라서 김 위원장의 말에 긍정적인 논평을 할 법도 했다. 그러나 이 당국자의 반응은 그런 판단을 빗겨났다.

"김 위원장의 말은 언론 보도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확대해석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다자 대화는 무엇을 뜻하는지, 양자 대화와 다자 대화의 시퀀스(순서)는 어떻게 되는지, (대화 참여의) 조건이 뭔지 너무나 모호하다. 긍정적인 시그널로 보기에도 정보가 너무 적다."

이런 반응에 대해 대개는 '신중하다'는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이 당국자의 신중함은 곤혹스러움에 가깝다는 느낌이었다. 청와대의 분위기를 감안할 때 상황 진전을 마냥 환영할 수도 없고, 미국의 의중도 살펴야 하며, 동북아의 외톨이가 된다는 비난도 피해야 하는 외교부의 고민이 배어 있었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드러날 수밖에 없는 그 복잡한 속내의 뿌리에는 물론 이명박 대통령이 15일 내려 보낸 '지침'이 있다. 이명박 정부에서 외교 당국자로 산다는 것은 이렇게 쉽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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