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회제는 청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국회의 '돌담'을 무너뜨리고 잔디밭을 개방하는 것이 열린 국회로 나아가는 본질은 아닐 터이다. 특히 대의민주주의의 위기로 표현되고 있는 한국의 현 상황에서 온라인, 오프라인상의 민의(民意)를 의회에 반영하는 것은 직접민주주의 성격을 대의제도에 적극적으로 반영시키고 투사시킴으로써 대의 민주주의의 약점을 결정적으로 극복하는 계기를 만든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측면에서 국회 내에 청원실을 설치하여 대중들의 청원을 적극적으로 의회의 입법 활동에 반영하도록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국민에게 부정적 이미지로 비쳐지고 있는 현재의 국회상(國會像)에 실질적인 대중적 민의(民意)를 결함시켜낼 수 있는, 그리하여 국회가 문자 그대로 '국민의 대표'로서 기능해내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 국민이 진정으로 국회의 주인으로 되는 중요한 방안 중의 하나가 바로 국회청원제도의 문을 국민에게 활짝 여는 것이라 하겠다. NA는 'National Assembly'의 약칭이기도 하지만 'National Agora'의 약칭일 수도 있다.
청원권은 시민적 법치국가에 있어 가장 고전적인 권리로서 인식된다. 청원권의 인정과 더불어 의회제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그 무엇보다 청원권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주고 있다. 의회제의 선구인 영국이 '권리청원'과 '권리장전'으로 청원권을 보장한 역사적 사실은 의회제라는 발상이 청원의 통로라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청원권(Right to Petition)의 연원은 입헌주의 이전부터 찾을 수 있다. 즉, 청원의 근원은 영국에서 1215년 국왕이 귀족들의 강압에 의하여 승인한 대헌장 제61조에서 비롯된다. 그 뒤 1628년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에서 처음으로 보장되었다. 이어 청원권은 미국연방헌법 수정제1조를 비롯하여 스위스헌법(제57조), 바이마르헌법(제126조) 그리고 1791년 프랑스헌법 등 세계의 많은 국가 헌법에서 규정되었다.
청원(請願)이란 국가 또는 지방공공단체의 소관 사항에 대하여 일정한 요구 사항을 진술하는 것으로서 국민의 기본 권리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 헌법 제26조는 "①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기관에 문서로 청원할 권리를 가진다. ②국가는 청원에 대하여 심사할 의무를 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재판제도가 정비되지 않고 의회제도가 확립되지 아니한 전제정치 시기에는 청원(권)이 국가 또는 군주에 대하여 자기의 권익을 보호받기 위한 호소의 수단과 권리침해의 회복 및 구제수단으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국민의 요구 사항이나 민정(民情)을 통치자에게 알리는 중요한 방법으로 되었다.
그 뒤 의회제도의 발전에 따라 국민들의 참정권이 실현되고 국민의 기본권으로서의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었으며, 사법제도의 확립으로 권리침해의 구제수단이 한층 더 유효한 토대를 가지게 되면서 현대적인 의미의 청원은 권리구제 수단으로서의 효용은 감소되고 국민의 요구사항을 국가에 제기하는 수단으로서의 의미가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주권재민과 권리구제의 실현
하지만 청원제도가 여전히 각국에서 계속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이 제도에 의하여 국가 또는 공공기관에 국민의 의사와 요구사항을 자유롭게 제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 기관은 이를 수리, 심사한 뒤 그 결과를 청원인에게 통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주권재민(主權在民)이라는 국민주권주의의 실현과 기본권 보장의 확립이라는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법부의 재판청구권이 사후구제 수단인 것과 달리 청원은 권리침해의 우려가 있을 때 사전 구제수단으로 행사될 수 있고, 사법수단보다 그 절차가 용이하다는 점에서 여전히 권리구제의 수단으로서의 유효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의회제가 역사적으로 청원으로부터 비롯되었지만 의회와 청원의 관계는 여전히 중요성을 지닌다. 무엇보다도 청원에 대한 심사와 정당한 처리는 의회가 지니고 있는 고유기능인 행정통제로 이어지며, 청원에 포함된 내용은 의회의 정책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입법정보에 접하는 계기로 된다. 또한 청원의 내용은 사회 상황의 축소판이라 할 만큼 사회상을 그대로 반영한다. 따라서 국민 여론을 가장 잘 반영하는 청원의 의회에 의한 심사는 의회와 국민 여론이 직접 접촉하는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주로 선거 기간에만 집중되는 국민과의 접촉을 통시적(通時的)으로 가능하게 하며, 나아가 청원의 의회 심사만으로도 일반 대중의 소외를 해소시키는 데 기여하게 되고 여론의 수렴과 참여 확대에도 큰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청원의 폭주로 인하여 의회가 '민원처리장화' 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청원을 억제하거나 경시하는 견해도 있지만, 이는 의회의 활성화에 정면으로 어긋난다. 의회가 참으로 행정통제와 국민의 권익침해에 대한 구제 및 여론의 수렴에 관심을 경주한다면 청원의 폭주는 오히려 환영해야 할 일이다. 현재 국회의 청원 처리 현황은 열악하기 그지없다. 예를 들어 2006년 국회 상임위원회에 접수된 청원 건수는 총 278건인데 그 중 단지 1건만이 채택되었다.
청원의 '국회의원 소개 조항' 폐지해야
청원의 심사와 정당한 처리는 의회가 갖고 있는 행정통제 기능으로 연결된다. 청원에 포함된 내용은 의회의 정책 자료로서 역할함은 물론 입법정보로 전화(轉化)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전문성 보완의 가능도 수행한다.
시민참여의 효과성은 참여를 위한 제도적 장치만이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수용자 측의 반응성(反應性, responsiveness)과 책임성(accountability)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며, 시민참여란 참여자의 정치적 효능감(效能感)이 뒤따를 때 비로소 그 효과성이 실현될 수 있다.
국회에 설치되는 청원실은 직접민주주의의 국회 수용의 차원에서 제도 개선 및 정책 제안과 관련된 집단 온라인청원의 활성화에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개인적인 진정(陳情), 특히 공권력 피해에 대한 진정은 소극적으로만 접수하는 원칙을 취하여 배제하지 않으며, 특히 '공직부패' 관련사항은 진정이라도 적극 수용해야 할 것이다.
또한 청원을 온라인 및 오프라인 양 측면에서 모두 접수할 수 있도록 하고, 청원제도를 실제로 유명무실하게 만든 '국회의원의 소개' 의무 조항은 향후 폐지되어야 할 것이다. 청원이 반드시 국회의원의 소개를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하도록 규정되어 있는 현재의 '국회의원의 청원 소개' 규정은 사실상 대중들의 청원권을 크게 위축시키는 것이다. 접수 · 수리된 청원사안의 심사를 위하여 국회 내에 청원심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한다. 여기에서 청원특별위원회는 사안의 심사를 위하여 정부 기관에 관련 자료 및 문서 열람 및 정보요청의 권한을 가진다. 청원심사의 결과에 기초하여 해당 기관에 시정 권고를 할 수 있으며, 정책 입안사항일 경우에는 해당 소관위원회에 회부한다. 청원은 어디까지나 대중과 함께 결합되어야 할 것이며, 따라서 청원과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온라인상에서 제공하고 국민들의 서명을 접수하며, 나아가 내용에 대한 지지나 비판 의견을 제시하는 숙의 혹은 평의(deliberation)의 과정을 거치도록 한다. 또한 접수된 청원은 그 처리과정을 접수인이 항상 확인할 수 있도록 온라인상으로 투명하게 공개되고 (전자)우편으로 중간에 처리과정을 고지하도록 한다.
한편 주요 정책에 대해 심의하고 토론한 뒤 청원실에 권고안을 제시하는 온라인 시민배심원 제도의 도입을 모색할 수 있다. 참고로 프랑스에서는 온라인 시민배심원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10~15명으로 구성된 시민배심원들은 정책결정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으나 정책에 대해 심의하고 토론한 후 정책당국에 주요 권고안들을 제시한다. 한편 노르웨이의 '민주주의를 위한 청년포럼(Youth Forum for Democracy)'은 전국 각지에서 청년단체를 대표하는 16명의 대표로 구성되며, 이들은 청년층의 정치참여 확대 방안과 사회활동 참여 방안 등에 대한 정책안을 만들어 아동가족부 장관(Minister of Children and Family Affairs)에게 제출한다. 협력자로서의 이러한 정책결정 참여의 경우 비록 최종적인 결정권은 갖지 못하지만, 대표성을 지닌 참가자들이 토론과 합의를 통해 결정한 권고안은 정부의 정책 방향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그리고 100만 명 이상이 서명한 청원은 청원특별위원회에의 회부를 의무화하고 청원특별위원회는 이를 심의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의 신설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하며, 이 경우 서명인원에 따른 의무 경중(輕重)의 구분을 고려한다. 참고로 미국 켈리포니아주의 경우, 헌법 개정에는 그 현재 시점의 직전에 치러진 주지사 선거 유효투표수의 8%에 해당하는 주민 서명이 필요하고, 법률 개정에는 6%의 서명이 필요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독일 의회의 청원실
참고로 독일 의회에 설치되어 있는 청원실을 소개하고자 한다. 독일 의회에 설치된 청원실은 효율적으로 운용되고 있는 의회 청원실의 모델로서 우리로서는 벤치마킹할 필요성이 있다.
독일 청원실은 의회 내에 구성되어 있고, 청원위원회 사무과와 4개의 청원과로 이루어져 있다. 직원의 수는 약 80명이며, 신규 채용은 판사 자격증이 있는 사람을 채용한다.
연방의회 청원위원회는 청원을 접수, 토의하여 연방의회에 결의안을 제출할 의무가 있다. 청원실은 청원위원회에 대한 전문적이고 행정적인 지원을 담당하며, 청원위원회를 위하여 사건 규명과 민원처리에 대한 제안을 마련한다. 접수된 청원은 연방의회 청원위원회 사무과(事務課)의 사전 심사를 거쳐 4개의 청원과로 이송된다. 이 사전 심사 과정에서 접수된 청원의 약 1/4이 탈락하게 된다. 직원들은 도움말이나 안내, 소개 또는 각종 정보자료 우송 등 가능한 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모욕적인 내용에는 회답을 하지 않는다.
4개의 청원과는 각기 담당하는 정부 부처나 혹은 직접 민원 대상이 된 기관의 입장을 알아보고 검토한다. 결정 단계에 이르면 근거가 첨부된 결의안을 만든다. 그리고 두 명의 서로 다른 당 소속의 위원회 의원들(보고자)에게 위원회 결의문 채택을 위한 제안으로서 이송한다.
청원위원회는 매년 연방의회에 활동보고서를 제출한다. 2004년 보고서에 의하면, 2004년에 접수된 청원은 17,999건이고 종결 처리된 것은 15,565건이며 개별적으로 처리된 것은 264건이다.
한편 공개 청원은 2005년 9월 1일부터 시험적으로 도입되었다. 청원의 내용이 청원위원회 소관 사항이고 일반의 관심이 될 수 있는 사안이며 공공의 토론에 적합하다고 간주되는 경우 청원실의 심사를 거쳐 청원위원회의 인터넷 사이트에 게재된다.
한편 스코틀랜드에서는 일반 시민들이 의회홈페이지의 메뉴를 통하여 전자청원(e-petition)을 할 수 있다. 전자청원 사이트는 제안된 청원의 취지와 관련 자료를 제공하고, 이에 찬동하는 시민들은 서명을 함으로써 지지 의사를 밝힐 수 있다. 청원이 완료되면 관련 서류가 의회에 교부되고 공공청원위원회(Public Petition Committee)에서 청원안 상정 여부를 최종적으로 결정한 뒤 청원 절차를 밟게 된다. 이러한 전자 청원은 시민들에게 의정 참여의 기회를 제공함과 동시에 청원 내용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과 이해를 높일 수 있으며, 나아가 의원들의 반응성과 책임성도 더욱 제고시킬 수 있는 장점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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