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가 우승하려면 승엽이가 와야 한당께. 승엽이 아버지도 호남 분이니께."
한때 프로야구를 호령했지만 그 뒤에는 종이 호랑이로 전락한 타이거즈의 처지가 얼마나 답답하면 일본에서 잘 뛰고 있는 이승엽까지 생각했을까.
2009년 아마 '해태 아줌마'는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 기아는 단독 선두를 질주 중이다. 내심 열 번째 한국시리즈 패권을 꿈꾸고 있다.
▲ 18일 광주 무등경기장에서 열린 2009 프로야구 기아 타이거즈와 히어로즈의 경기에 앞서 선수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며 묵념하고 있다. ⓒ연합뉴스 |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타이거즈는 모두 호남의 상징체. 또한 두 상징체는 전두환 정권의 대표적 우민화 정책으로 평가되는 프로야구 개막을 5공화국의 자충수로 몰고 간 주인공이다.
호남야구의 성장과 김 전 대통령의 신드롬은 매우 비슷한 시기에 이뤄졌다. 정치적인 '호남 차별'이 본격적으로 대두되는 시점에서 고교야구 영호남 라이벌 시대도 활짝 열렸다.
이효상 씨도 힘을 보탠 경북고 야구 전성시대
70년대 고교야구 영호남 라이벌 시대를 이해하려면 우선 경북 야구 전성시대를 살펴봐야 한다.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 고교야구는 경북고와 대구상고(현 대구 상원고)의 독무대였다. 두 학교는 67~75년 사이에 펼쳐진 32차례의 4대 전국 고교야구 대회에서 모두 20회 우승을 합작했을 정도. 그 중에서도 경북고는 고교야구 최고의 팀으로 불렸다.
65년 근 10년 만에 다시 생겨난 경북고 야구부는 67년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한다. 경북 최고의 인문계 고교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던 경북고의 야구가 목표로 삼았던 것은 동향의 대구상고를 넘어서는 것. 당시 이효상 경북고 동창회장은 동문들과 함께 300만 원의 성금을 모아 야구부를 도왔다.
우수 선수들도 속속 경북고 야구부로 몰려 들었다. 이효상은 국회의장 신분으로 1971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후보가 낙양의 지가를 올릴 때 '경상도 대통령론'을 내세워 지역감정을 자극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런 경북고의 노력은 곧바로 결실을 맺었다. 이효상이 말했던 '경상도 대통령' 박정희의 시구와 함께 67년부터 시작된 대통령배에서 경북고는 연달아 우승을 차지했다. 69년 한 해를 제외하면 72년까지 다섯 번 우승을 했다. 대통령배는 경북고를 위한 대회처럼 보였다.
고교야구 전국화의 진원지 군산
이 사이 군산에서는 향후 한국 야구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중요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1968년 만월표 고무신으로 유명한 경성고무를 운영하던 이용일은 사재 2000여 만 원을 털어 군산상고 야구부를 만든다.
훗날 프로야구의 밑그림을 그렸고 한국야구위원회 사무총장을 역임하게 되는 그는 '불모지 군산의 발전을 스포츠에서'라는 캐치 프레이즈를 내세웠다. 그는 치밀했다. 이미 62년 군산에서 초등학교 야구부 4팀의 창단을 이끌어 냈고, 그 뒤 2개의 중학교 야구팀 창단을 도와 튼튼한 하부구조를 조성했다.
군산상고는 1971년 봉황대기에서 경북고와 운명적인 일전을 펼친다. 군산상고는 연장접전 끝에 0-1로 석패했다. 마치 같은 해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박정희 후보에게 약 95만 표의 차이로 석패했던 것처럼.
관중석에서는 군산상고 선수들에게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프로야구 원조 홈런왕 김봉연(당시 군산상고, 현 극동대 교수)의 자서전에 따르면 팬들은 "너희(군산상고)가 경북고 보다 낫다"라고 환호하기도 했다.
우승을 밥 먹듯 하는 경북고 야구에 대한 반감은 이렇게 나타났다. 당시 최고의 투수로 손꼽히던 경북고 남우식도 "경북고가 지는 꼴을 보려고 야구장에 온다는 팬들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71년은 경북고가 전국 4대 고교야구 대회를 석권했던 해였다.
이듬 해 군산시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부산고를 꺾고 군산상고가 황금사자기를 거머쥐었다. 군산상고는 4-1로 뒤지던 9회말 5-4의 역전극을 이뤄내 이 승리를 더 극적으로 만들었다.
군산은 인구 12만 명의 소도시. 하지만 무려 6만 명의 시민이 금의환향한 군산상고 야구부를 보기 위해 모여 들었다. 군산의 이 같은 야구열기는 그들이 호남에서 가장 큰 박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군산시사(群山市史)>의 지적과 맥이 닿아 있다.
군산은 일제에 의해 목포, 원산과 함께 대표적 미곡 수출항으로 발전에 가속도가 붙은 도시였지만 박정희 정권 이후 낙후된 항구도시의 전형이었다.
광주로 번진 호남 야구 열풍
군산의 야구 열풍은 순식간에 광주로 번졌다. 광주일고 동문인 전남일보의 김종태(전 광주일보 사장)씨가 일고 야구의 부활을 위해 전력을 다했다. 광주일고는 1972년 고교 최강 군산상고와의 친선경기에서 2-2의 무승부를 기록하며 자신감을 얻었다.
김종태 씨는 충청도와 호남 팀이 참가하는 대회도 열었다. 서울, 부산, 대구, 인천 등에 비하면 경기 경험이 일천했던 대부분의 충청도와 호남 고교야구 팀들은 이 대회를 통해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75년 광주일고는 정상에 섰다. 그것도 김윤환 선수가 경북고를 맞아 결승에서 3연타석 홈런의 신기원을 기록하면서. 한 일간지는 군산상고에 이은 광주일고의 전국제패로 고교야구의 무게 중심이 서서히 호남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고교야구의 전국화는 77년 공주고, 80년 천안 북일고의 전국제패로 완성됐다. 이는 서울, 인천, 영남권 학교들의 전유물이었던 고교야구가 국내 최고의 스포츠로 굳건히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됐다. 훗날 강한 지역 연고제를 통해 프로야구가 성공한 기본적 바탕도 이때 이뤄진 셈이다.
공화당의 정치적 노림수, 영-호남 친선 고교야구
<영남일보>는 호남 야구가 득세하자 '경북고 10년 신화는 이제 사라지는가'라는 제하의 기사를 내며 "대구 지역 고교 야구팀이 줄어들고, 시민들의 관심도 예전과 같지 않다"고 꼬집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국무총리기쟁탈 영-호남 친선 야구대회가 생겨났다. 흥행, 친선도모, 대구 야구 재부흥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쫓던 <영남일보>의 아이디어는 정치권의 호응을 얻는다.
공화당의 박준규 정책위의장과 길전식 사무총장은 75년 김종필 총리와 만난 자리에서 <영남일보>가 추진 중이던 친선 야구대회를 화제에 올렸다. 결국 JP의 강력한 지원 아래 대회가 시작됐다. 영호남 지역감정이 골칫거리였던 공화당으로서는 이 대회가 친선도모에 도움이 되리라는 정치적 노림수가 배경이 됐다.
하지만 75년 1회 대회부터 영호남 친선야구는 라이벌 의식으로 과열됐다. 친선야구 대회가 펼쳐진 광주에서는 10년 전 광주 전국체전에 몰려든 인파를 방불케 하는 대혼잡이 다시 일어났을 정도. 두 고장의 관심사는 대통령배 결승에서 자웅을 겨뤘던 광주일고와 경북고의 경기에 집중됐다. 3연타석 홈런의 주인공 김윤환은 또다시 경북고의 에이스 성낙수를 울렸다.
고교야구가 흡수한 영호남 지역주의
공화당의 친선야구를 통한 영호남 화해는 정치적 제스처에 불과할 뿐, 실효를 거두기엔 역부족이었다. 지역차별에 민감했던 호남 사람들에게 이 대회는 단순한 친선야구가 될 수 없었다. 현실이 그렇지 않았다.
76년 '역광선 파동'은 지역차별에 대한 호남 사람들의 민감한 반응을 잘 대변한다. <중앙일보>는 호남 지역을 제외하고 가뭄이 해갈되자 3행짜리 촌평란인 <역광선>을 통해 "중부, 영남, 영동은 해갈, 호남은 빼고, 천심의 푸대접을 어찌할꼬… ." 라고 썼다. 차별, 푸대접에 신물이 난 호남 사람들은 '중앙일보 안 보기와 삼성 제품 불매 운동'까지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고교 야구에서도 지역주의는 불을 뿜었다.
친선대회의 아이디어를 낸 <영남일보>는 1회 대회가 끝난 뒤 "시세가 대구의 반밖에 안 되는 전남도의 경우에도 무려 고교야구팀이 6개나 있다"며 "전남도처럼 체육진흥회비를 거두고 체육특기교와 유수 기업체가 자매결연을 해야 과거의 영광을 찾을 수 있다"고 역설했다.
호남에서도 영남 야구는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었다. 군산상고를 76년 대통령배 우승으로 이끈 김용남 투수는 경기 뒤 72년 이래 단 한번도 이기지 못했던 영남 팀을 이기고 패권을 차지한 사실을 강조했다. 이 대회 준우승 팀은 대구상고였다.
고교야구의 인기가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던 77년 같은 해에 경북고를 모델로 한 신성일(경북고 동문) 주연의 야구영화 <영광의 9회말>과 군산상고 스토리를 영화화 한 하명중, 진유영 주연의 <고교결전, 자 지금부터야>가 개봉된 것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 삼성 팬들에 의해 불타버린 해태 타이거즈 버스 |
불탄 해태 버스, 영호남 지역주의 그림자
86년 광주에서 열린 해태와 삼성의 한국시리즈 1차전. 해태에 역전패를 당한 삼성의 김영덕 감독은 "7회말 삼성 투수 진동한이 해태 팬이 던진 병에 머리를 맞아 교체해야 했다"고 말했다. 은근슬쩍 이 사건이 경기의 승패를 바꿨다는 점을 얘기하는 듯 했다.
훗날 <한국 야구사>는 진동한이 "수건으로 머리를 싸매고 덕아웃에 드러누워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다시 등판하지 못할 정도의 중상은 아니었다"는 표현을 했지만 대구의 삼성 팬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리는 만무했다.
대구에서 열린 시리즈 3차전에서 삼성이 패하자 1000여 명의 삼성 팬들은 해태 구단 버스를 불태워 버렸다. '(해태) 김응룡 감독이 진동한에게 병을 던진 해태 팬을 대신해 사과하라'는 구호와 함께.
문자 그대로 불붙은 지역감정 때문에 다음 경기를 대구가 아닌 중립지역 서울에서 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나왔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야구위원회(KBO)는 대구에서 경기를 강행했지만 추가 사고가 이어졌다.
시리즈 4차전에서 삼성이 패하자 홈 팬들은 병을 경기장에 던졌고, 1차전에서 나온 해태 팬의 '빈병 투척 사건'에 대해 강력히 항의했다. 경기장 주변으로 투입된 2000명 가량의 경찰들은 무려 7발의 최루탄을 발사해야 했다.
선동렬, 해태 그리고 광주 민주화 운동
80년도 대통령배 고교야구는 광주가 휩쓸었다. 동향의 광주일고와 광주상고(현 동성고)가 사이 좋게 우승과 준우승을 나눠가졌다. 광주일고에는 '무등산 폭격기'로 성장하게 되는 초고교급 투수 선동렬이 있었다. 광주일고 시대가 활짝 열릴 것으로 언론은 내다 봤다.
하지만 선동렬은 다음 대회인 청룡기에 출전할 수 없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들은 광주에 갇혔다. 대신 이 대회는 박노준, 김건우 등이 있는 선린상고의 품으로 돌아갔다.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여파로 잠시 동안 광주야구는 '휴화산'이 된 셈이다.
프로야구가 개막된 뒤 5월 18일에는 한동안 광주에서 경기를 하지 못했다. 예기치 못 할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프로야구 원년인 82년 전두환 정권은 5월 15, 16일 광주에서 펼쳐질 예정이었던 경기를 하지 못 하도록 한국야구위원회(KBO)에 요구한 적도 있다. (하지만 당시 이 경기는 예정대로 치러졌고 불상사는 없었다.)
비록 해태는 원정경기를 해야 했지만 5월 18일을 '승리의 날'로 만들었다.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은 해태는 83년부터 94년 사이 5월 18일 경기에서 7승 무패를 기록했다고 적고 있다.
부메랑이 된 프로야구 우민화 정책
1986년 3월 30일 광주에서는 신민당 이민우 총재, 김영삼 고문과 광주민주화 운동 유가족 대표가 참가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정부는 이 집회의 파괴력을 최소화 시키기 위해 프로 야구를 활용했다. 광주 시민들의 관심을 집회로부터 돌리기 위해 무료 입장을 시켰다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야구 경기 뒤에는 콘서트도 계획됐다.
하지만 이 전략은 실패였다. 당시 한 일간지는 광주 시민들은 해태와 OB의 프로야구 경기보다 집회를 선택했다는 점을 은연 중에 보여 줬다. "무등 경기장에서 열린 야구 경기에는 외야석이 거의 비어 있는 등 관중 수는 많지 않은 편이었다."
실제로 그랬다. 3월 29일 경기에는 1만5000여 명이 입장했지만 집회가 열린 30일의 관중 수는 약 9600명. 프로야구 때문에 국민들이 정치에 무관심 해졌다는 세간의 평가와는 사뭇 다른 결과다. 그들이 단지 현실을 도외시한 채 야구에만 빠진 '우민(愚民)'이 아니었다는 증거다.
이 한 경기로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적어도 86년을 기점으로 전두환 정권의 프로야구 우민화 정책의 효과는 반감된다. 부메랑을 맞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0년대 지방 명문고들이 고교야구의 춘추전국 시대를 이루면서 고교야구의 지역화가 뿌리를 내렸고, 프로야구는 이를 그대로 흡수했다. 87년 부산과 광주 등의 경기장에서 김영삼, 김대중 이라는 지역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의 이름이 민주화 바람을 타고 자주 연호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히 광주에서 열린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경기에서 해태 팬들은 응원가인 목포의 눈물과 함께 '김대중~'을 목청껏 외쳤다. 당시 광주 무등 경기장은 선거 유세장을 방불케 했다. 역시 스포츠나 대중문화는 지배계층이 제 멋대로 쓸 수 있는 '백지 노트'가 되지는 않았다.
공정한 심판만 있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
89년 프로야구는 제8구단 창단을 위한 시동을 걸었다. 후보는 경남과 전북. 한일합섬 마산을 연고지로 희망했고, 쌍방울은 전주를 내세웠다.
연고지 문제로 롯데와 해태는 한일합섬과 쌍방울의 움직임을 껄끄럽게 생각했다. 전라도 전체를 기반으로 했던 해태를 예를 들면 전북에 구단이 생기면 아무래도 신인 선수 수급 등의 측면에서 불이익을 볼 게 뻔해서다.
이 와중에 쌍방울의 제8구단 계획에는 영남 정권의 음모가 깔려 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해태가 왕좌의 자리를 지키며 호남 사람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되자 이를 꼴 사납게 여긴 영남 정권이 쌍방울을 통해 이를 분열하려 한다는 가설이었다. 꽤 많은 호남 사람들은 그 동안 그들이 겪어야 했던 실질적 핍박과 피해의식 탓에 이를 기정사실화 했다.
당시 KBO 사무총장인 이용일 씨의 증언에 따르면 제8구단 선정이 어려움에 부닥친 시점에 전북 김제 출신의 최낙도 평민당 의원이 찾아와 김대중 총재가 팀을 호남에 유치하는 것도 좋다는 뜻을 밝혔다고 전해왔다. 이를 계기로 해태의 반대도 수그러 들었고, 호남 사람들도 '음모론'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쌍방울 창단 음모론'에서 보듯 호남 사람들에게는 영남 정권은 공정하지 않은 심판의 대명사였다.
그래서 그들은 공정성에 대한 갈망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해태는 호남 사람들의 한(恨)을 분출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줬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정한 규정만 뒷받침 된다면 호남 사람들도 충분히 훌륭한 실력을 뽐낼 수 있다는 강한 자부심을 줬다는 점이다.
타지방에 비해 호남 지역 수재들은 사법고시에 더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다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차별을 받을 여지가 그래도 다른 직업보다 적어서다. 이미 1966년 <전북일보>가 인사차별 등을 이유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공개 편지를 보낼 때부터 이런 현상은 있었던 것 같다.
"정부 요직에 호남 인사가 없는 것은 호남에 인재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사법고시를 통해 선발되는 법률가는 호남 인사가 상당히 많지 않습니까?"
그런 그들에게 김대중은 '공정한 심판'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그의 세례명은 토마스 모어. 모어는 그 누구보다 공명정대한 사건처리로 신망이 높았던 법조인이기도 했다. 70, 80년대 호남 야구가 그들에게 무거운 현실의 굴레와 차별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유토피아로 기억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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