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그 통지문에 "방문 날짜는 유가족과 임동원·박지원 선생의 의향에 따르겠다"는 말도 넣었다. 자존심 강한 북한이 이런 표현을 썼다는 것은 임동원이 어떤 인물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김대중 통일·외교·안보 정책의 동반자이자 분신.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
지금으로부터 '겨우' 14년 전인 1995년 처음 만나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2000년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을 이끌어 내며 한반도의 냉전구조를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임동원은 김대중 정부 시절 대통령 외교안보수석비서관, 국정원장, 통일부 장관, 대통령 특보를 역임하며 그 모든 과정을 관장했다.
19일 김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된 연세대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임동원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이사장을 만났다.
북한이 조문단을 보내는 것에 대해 "김대중 대통령은 이렇게 세상을 떠나서도, 죽어서도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기여하고 있다"고 말하는 그로부터 고인에 대한 추억과 최근 한반도 정세에 대해 들어 봤다.
▲ 생전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연합뉴스 |
"'필요하다면 1박 2일 조문'에 담긴 뜻 읽어야"
프레시안 : 북한이 조의방문단을 파견하기로 했다. 의미는 무엇인가.
임동원 :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6.15 공동선언을 이끌어 냈고, 불신과 대결의 시대를 넘어 화해·협력의 시대를 열었다. 그런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즈음해 북측이 진심으로 애도를 표하고 조문 사절을 보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바로 이 시기에 조문단을 보내는 의미를 특히 강조하고 싶다. 요즘 북쪽은 그동안 경색됐던 남북관계를 점차 풀어보겠다는 의지를 비치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난 16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회동하면서 보였던 주도적인 모습에서는 그걸 읽을 수 있었다.
이번에 조의방문단을 파견하는 것을 보니, 서거 상황을 남북관계 개선의 계기로 삼아 보려는 북측의 의도가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당연히 이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한다.
프레시안 : 북측은 남측 정부가 아니라 김대중평화센터의 임동원 전 장관 앞으로 조의방문단 파견 통지문을 보냈다. 그러면서 북한이 남측의 민간과는 교류하고 당국은 따돌리는 이른바 '통민봉관'(通民封官) 전략을 쓰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임동원 : 꼭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지금은 관과 관 사이가 꽉 막혀 있기 때문에 북측으로서도 어떻게 할 재간이 없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과거에도 그런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너무 과대 해석할 필요가 없다.
국민의 정부가 막 들어섰을 때에도 관과 관의 대화는 막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민간의 접촉을 시작으로 당국간 협상의 길을 연다는 '선민후관', 쉬운 일을 먼저 하고 어려운 일을 나중에 한다는 '선이후난', 경제 교류를 먼저 하고 정치 협상은 나중에 한다는 '선경후정', 먼저 주고 나중에 받는다는 '선공후득' 같은 접근법을 썼다. 현대와 북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가 합의해 금강산 관광 등 여러 경제협력을 추진하게 했는데, 그게 결국은 당국간 접촉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 정부 들어 남북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이번엔 북한이 선민후관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국민의 정부가 그랬듯이 당국 대 당국 회담의 길을 열고 싶은 마음에서 나오는 접근 방법의 하나라고 본다. 분명히 그런 의도가 있을 것이다.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북측이 '특사 조의방문단'이라는 용어를 썼다는 사실이다. 특사라는 말에는 우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파견한다는 의미가 있는데, 동시에 우리 정부하고도 대화할 수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본다.
또한 이번 통지문에서 북한은 "체류 일정은 당일로 하며 필요하면 1박 2일로 예견하고 있다"고 했다. 왜 하룻밤을 잘 수도 있다고 말했겠나? 그 역시도 북측이 남측 정부와의 대화 물꼬를 트고 싶다는 신호라고 생각한다. 우리 정부는 이번 기회를 활용해서 폭넓게 받아 들였으면 좋겠다.
고위급 조의사절단이 오기 때문에 우리 정부도 도착 현장에 나가서 북측의 인사들을 접견해주고 그러면 대화의 물꼬를 트는데 도움이 되지 않겠나 싶다. 특사 조의사절단은 북측 최고위층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에서는 조문단을 못 받을 이유가 없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더라도 방문단을 거부할 명분은 물론 없다.
"DJ, 대통령 취임 첫해와 2차 북핵 위기 때 가장 힘들어 해"
프레시안 :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생을 정리한다면?
임동원 : 김대중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와 남북의 화해,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일생을 살아오신 분이고, 남과 북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숭앙을 받는 우리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였다.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어떻게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적 통일을 이룩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실현에 옮겼고, 진전을 봤던 업적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분단 극복이라는 과제는 우리 세대의 역사적 사명인데, 그러기 위해 남북이 화해·협력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정책을 폈다.
프레시안 : 임 이사장께서는 1995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을 처음으로 만나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을 완성하는데 기여했다. 당시에 가장 기억나는 일이 있다면?
임동원 : 내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만난 것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95년 당시 나는 이미 40여 년 간 공직에 있다가 은퇴했고 더군다나 김대중이라는 인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에 같이 일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그분은 내가 노태우 정부 시절 남북 고위급회담 대표로 3~4년간 모든 회담에 참여하면서 남북 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만들 때 얻은 현실감각을 높이 샀던 것 같다. 그래서 같이 통일문제를 연구하자고 나를 불렀다.
그래서 결국 95년 아태평화재단 사무총장이 됐는데, 그 때부터 정권을 잡을 때까지 3년간 같이 대북정책을 연구하며 많은 토론을 했다. 특히 최초 1년 동안은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을 출판하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토론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냉전 붕괴 후의 상황을 반영해 자신의 3단계 통일론을 재구성하기 위해 많은 학자들과 논의 끝에 초안을 잡았는데, 영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나 역시도 마음에 안 드는 게 많았다. 학자들의 생각이라 그런지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이고 이론적이었다.
그래서 일단 책 만드는 작업부터 먼저 하기로 했고, 나는 초안에서 근본적으로 고쳐야 할 점 10가지를 꼽아 제시했다. 그리고 그 주제를 가지고 동교동 사저에서 수없이 토론했고, 그것도 모자라 그랜드힐튼호텔에서 숙식을 같이 하면서 토론했던 일도 몇 번 있었다.
밤늦게까지 엄청난 논쟁을 했다. 나는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없다' '이런 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많이 했다. 그래서 의견 충돌이 많았는데, 대부분 대화와 토론을 통해 해소했다.
김 대통령은 굉장히 학구적이면서도 고집이 셌지만 상대방의 주장을 경청했고, 그게 맞다고 생각하면 즉시 받아들이는 위대한 장점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을 존경했고 '정말 인물이다. 이런 분이 지도자가 돼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당시의 과정은 내 회고록 <피스메이커>에 정확히 정리되어 있다.
프레시안 : 누구의 의견이 더 많이 반영됐나?
임동원 : 10가지 문제 중에 1가지는 내가 김대중 대통령의 주장에 승복했고, 9가지는 김 대통령이 내 의견에 동의했거나 조정했다. 그 분은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현실 세계에서 약간 떨어져서 생각했던 부분이 꽤 있었다. 나보다 좀 더 이상적이었다. 그런데 그런 문제를 과감하게 받아들여 수정했다.
▲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 |
임동원 : 집권 첫 해인 98년에 남북대화가 이뤄지고 진전됐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는데 엄청난 장애에 부딪혔다.
남북 차관급회담을 시작했는데 우리는 인도주의적 사안인 대북 비료지원과 이산가족 상봉을 주고받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북한은 그걸 안 받아들였다. 인도주의는 조건이 없어야지 왜 다른 사안과 연계하느냐고 해서 회담이 깨졌다. 그걸 보면서 남북간에는 상호주의가 먹히지 않는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강경파들은 그해 북한의 금창리 지하 핵시설 의혹을 제기했고, 북한은 8월 말 미사일을 발사했다. 그걸 계기로 미국의 강경파들은 북한을 압박하고 응징해야 한다고 나섰다. 그런 와중에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는 건 굉장히 어려웠다. 그래서 큰 고민이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햇볕정책을 적극 지지했지만, 그해 11월 중간선거에서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은 클린턴의 대북 포용정책을 반대했다. 클린턴은 정부의 대북정책을 전면 재조정하라는 의회의 요구를 받아들여 과거 국방장관을 했던 윌리엄 페리를 대북정책 조정관에 임명했다.
페리는 1차 핵 위기 때 북한에 대한 군사공격을 주장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햇볕정책, 화해·협력정책이 힘들어질 것 같다고 우려했고 아주 긴장했다. 그러나 우리는 정공법을 택했다. 페리 조정관 팀을 상대로 한반도 정세와 화해·협력정책을 잘 이해시키고 미국도 그렇게 나가도록 주도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한반도의 주인은 우리라는 생각으로 페리를 설득했고, 결국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로 국면을 전환하게 됐다. 이런 일이 있었던 집권 첫 해가 가장 어려웠다.
또 2002년 10월 미국이 북한의 고농축우라늄 문제를 제기하면서 북미 제네바합의를 깼을 때도 고민을 참 많이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비록 임기가 다 끝나가지만 우선 부시 정부와 주변국, 그리고 특히 북한을 설득하려고 마지막 노력을 다했다.
당시 정세현 통일부 장관이 평양에서 장관급회담을 하면서 메시지를 전달했고, 나도 대통령 임기 한 달을 남기고 특사가 되어 평양에 갔다. 대통령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렇게 했다. 그때 참 어려웠다.
프레시안 : 대북 송금 문제에 관해 법원에서 결론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김 전 대통령 서거 후 나오는 외신들을 보면 여전히 '송금 스캔들로 인해 찬반이 있다'고 쓰는 데가 많다.
임동원 : 일부 보수 언론들이 자꾸 그걸 얘기하니까 그렇지 이미 재판에서 다 밝혀진 것이다. 검찰 공소장을 보면 현대가 소위 7대 경제협력을 위한 선불금으로 지급한 것이라고 다 나와 있다. 정부는 송금의 편의를 제공했을 뿐이다. 정부가 세금을 쓴 일이 없다. 재판 기록과 검찰 공소장에 나오는 내용인데 그걸 받아들이지 않고 악의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팩트는 팩트대로 얘기해야 한다.
"클린턴-오바마 만남, '보고' 아닌 '대책 논의' 자리였을 것"
프레시안 : 최근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평양에 다녀오고, 김정일-현정은 합의도 이뤄지면서 정세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평가가 있다.
임동원 : 클린턴 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3시간 넘게 한 대화는 분명 쌍방에 대단히 유익했을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도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했을 것이고, 한반도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미국인인 클린턴 역시 할 얘기를 다 했을 것이다. 공식적인 정부 입장은 아니라는 식으로 했겠지만, 오바마 정부 사람들하고 같은 생각을 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좋은 회담이 됐을 것이다. 위기 돌파에 대한 공통의 인식이 어느 정도 정립됐다고 본다.
클린턴은 귀국 후 먼저 관계 기관에 설명을 하고, 2주가 지난 18일이 되어서야 오바마 대통령을 만났다. 클린턴이 그 자리에서 또 다시 뭔가를 설명하고 보고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클린턴이 그간 보고한 얘기를 오바마는 이미 다 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번 만남에서는 대책 논의에 치중했을 것이다. 오바마가 클린턴의 자문을 구하는 자리였을 것이다.
오바마는 이를 토대로 결단을 해야 하는 때가 다가올 것이다. 변화를 구호로 내건 오바마는 60년 이상 이어 온 대북 적대정책을 끝내고 새로운 관계를 발전시키면서 한반도 문제에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접근을 하리라고 본다. 물론 그때까지 '쿠킹' 시간은 필요할 것이다.
앞으로 이렇게 할 거라고 본다. 미국은 그동안 '비핵화를 통한 관계정상화'를 얘기했다. 그를 위해 6자회담을 통한 점진적인 접근을 시도했는데 그게 굉장히 어렵다는 걸 알았다. 따라서 이제는 '관계정상화를 통한 비핵화'로 접근 방법을 바꿀 것이다.
물론 관계정상화라고 해서 한 번에 수교를 하지는 못하겠지만, 연락대표부를 만들고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절차에 들어가고, 대북 경제 제재를 해제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 비핵화를 추구하는 방식, 그리고 일괄타결 방식으로 전환하리라고 본다. 협상 시간이 1년이 될지 2년이 될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리라고 본다.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해결해야 할 역사적 사명을 수행해야 할 때가 됐다.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갈 것인가. 오바마 대통령은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고 그럴 능력도 있다. 의지와 능력이 있으니까 우리도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또 오바마 대통령은 북한 문제를 푸는데 동맹국들과의 긴밀한 협의를 강조한다. 그러나 북한 문제를 근본적이고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걸 가장 반대하는 게 일본의 아소 정부였고, 우리 이명박 정부도 반대했다.
오바마는 한반도 문제의 전문가가 아니니만큼 두 동맹국이 아니라고 하니까 자기도 주춤했다. 그리고 4월 인공위성 발사에 대해 과잉반응을 보였다. 북한은 그에 반발해서 2차 핵실험까지 해버렸다. 그렇게 문제가 꼬였는데 그걸 풀어가는 과정이 드디어 시작됐다.
이제는 한국 정부도 상황을 선도하지는 못할망정 엇박자를 내면 안 된다. 일본도 8월 30일 총선에서 정권이 교체되면 오바마가 그렇게 나가는 것에 대해 다른 태도로 대할 것이다.
또 중요한 것은 북한인데, 북한은 이미 미국과 한국에 대해 기동을 시작했다. 그러니 우리도 너무 낙관해서는 안 되지만 희망을 가지고 관찰할 필요가 있다.
북한의 핵무장은 절대 허용하면 안 되는데, 핵은 미국과 북한의 적대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에 미국이 대북 적대정책을 버리고 관계개선을 할 때만이 해결된다. 그런데 그걸 마치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남북관계와 핵문제를 연계하면 안 된다. 과거 우리 정부가 썼던 남북관계-핵 병행 전략으로 다시 돌아서야 한다.
▲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이 김대중 전 대통령 빈소에 들어오면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프레시안 |
프레시안 : 이번에 내려오는 조의방문단에 어떤 말을 할 생각인가.
임동원 : 일단 만나 봐야 안다. 북쪽에서도 얘기를 하려고 할 테니까 두고 보자. 미리 얘기하면 김빠진다. (웃음)
김대중 대통령은 이렇게 세상을 떠나서도, 죽어서도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기여하고 있는 셈이다. 남북이 대화를 할 좋은 기회를 만들어주지 않았나. 우리는 이걸 잘 활용해야 한다. 조문단이 오는 건 그런 뜻이 있다고 본다.
우리는 그런 김대중 대통령의 업적을 계승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그런 사명이 우리한테 부여됐다. 일단 자서전을 완성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김대중의 평화와 통일 철학을 어떻게 이어나갈지 고민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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