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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류협력 '입구' 막아 놓고 군비감축 '출구'를 어떻게 찾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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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류협력 '입구' 막아 놓고 군비감축 '출구'를 어떻게 찾나

[정세현의 정세토크] 8.15 경축사, 순서를 거꾸로 잡았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8월 초 북한에 갔다 온 뒤에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오가는 말들을 보면, 양측이 어떤 접점을 향해서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북한이 비핵화를 시작해야만 여러 혜택을 줄 수 있다'는 식으로 말했어요. 그런데 미 국무부의 필립 크롤리 공보담당 차관보가 14일 브리핑에서 하는 말을 보니까 "북한이 의무를 준수하고 대화에 참여하겠다는 북한의 정치적 약속이 있으면 된다"고 표현이 바뀌었거든요.

그런 걸 보면 클린턴 방북 이후 미국의 입장이 바뀌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클린턴 방북 중에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의무를 준수하겠다'는 말을 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대응으로 크롤리 차관보 같은 말이 나온 걸 겁니다.

북한은 그런 식의 약속을 지금까지 쉽게 했어요. 물론 조건은 있었겠죠. '미국이 대북 적대시 정책을 포기하거나 앞으로 그 정책을 추진하지 않는다면' 이란 조건 하에 '그럼 우리로서는 핵물질은 물론이고 핵무기까지 다 내놓을 수 있다'고 말했을 겁니다. 아니면 '미국하고 직접 만나면 얼마든지 그런 약속을 할 수 있다'고 했거나.

클린턴 방북을 수행했던 존 포데스타 미국진보센터 회장의 말 중에는 '김정일이 아주 직설적으로 말했다'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미국이 압살 정책만 안 쓰면 우리는 미국이 하라는 대로 다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했기 때문에 직설적이라는 표현을 썼던 거 아닐까요? 그렇지 않으면 굳이 "직설적으로 말하더라"는 얘기를 할 필요가 없었겠죠.

그리고 그 전에 이미 제임스 존스 국가안보보좌관이 9일 <폭스뉴스>에 나와서 "북한은 미국과 '새롭고 더 나은 관계'(a new relation, a better relation)를 원하고 있다는 점을 내비쳤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북한에서는 외무성 부상 중의 한 사람인 김영일이 10일 몽골에서 북미관계에 '중대한 진전'이 있을 거라는 말을 했습니다. 김영일은 아시아 담당이지만, 그래도 국제적으로 의사표시를 할 수 있는 자리니까, 그런 식으로 북한 당국의 입장을 공식 표명한 겁니다. 더군다나 김영일의 발언에 대한 첫 보도가 워싱턴발로 나왔다는 건 미국이 의미 있게 봤다는 간접적인 증거라고도 볼 수 있어요. 화답이라고 볼 수도 있고.

미국에서 나오는 말들도 그냥 지나가면서 하는 게 아니고, 일종의 교감 내지는 미 정부가 클린턴 전 대통령을 통해 전달받은 김정일 위원장의 메시지에 대한 검토가 끝나가고 있는 조짐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미국이 그런 식으로 한 마디씩 툭툭 던지지만 북미 뉴욕 채널을 통해서는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이 백그라운드 브리핑 형식으로 북한 쪽에 전달이 됐고, 그 결과 김영일이 몽골에 가서 그런 얘기를 했다고 봅니다.

▲ 이명박 대통령 8.15 광복절 경축사 장면 ⓒ뉴시스

8.15 경축사, '핵 포기 먼저' 입장서 못 벗어나

그런 상황에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10일 평양에 갔기 때문에, 그걸 계기로 남북관계에서도 뭔가 접점을 찾았으면 하는 게 많은 사람들의 희망이었습니다.

물론...허허...우리로서는 아쉬울 게 없으니 북한이 손 들고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분들은 현 회장의 방북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한반도 정세의 흐름으로 봐서 우리가 때를 놓쳐서는 안 되니까 그런 희망들이 나온 거겠죠.

왜 그러나면요. 북미관계 개선에 맞춰서 남북관계가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최소한 따라가기라도 해야지, 안 그러면 한미관계는 절대 순조로울 수 없어요. 북미관계가 진전돼도 한국이 가만히 있으면 미국으로서는 나쁠 게 없지만, 그렇게는 안 될 겁니다. 한국은 어쩔 수 없이 자꾸 미국의 행보를 조절하려고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많은 문제가 생깁니다. 김영삼 정부 시절에 그랬잖아요.

어쨌든 그래서 이명박 대통령의 8.15 경축사를 주목했는데, 막상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는 연설을 들으니까...아...저거 참, 여러 가지 근사한 말들은 나오는데, 당위성이야 있지만 현실성이 적은 얘기들이 있고, 그러니 북한이 긍정적으로 보고 남북관계 개선에 호응하거나 협조할 가능성이 있겠는가...쉽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째, "북한이 핵 포기 결심을 보여준다면 한반도의 새로운 평화구상을 추진할 것"이라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했는데, 개방을 조건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는 이 정부의 '비핵·개방·3000 구상' 보다 북한의 자존심을 존중한 측면이 있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그런데 역시 남북관계와 핵 문제를 연계하겠다는 겁니다. 개방이란 말만 살짝 미뤄 놨지 큰 틀에서 변화가 없는 거죠.

"경제, 교육, 재정, 인프라, 생활향상 분야에 걸친 대북 5대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하겠다"고 했는데 그것도 사실 작년에 이미 나왔던 얘깁니다. '비핵·개방·3000' 로드맵에 다 있어요. 그러면서 역시 '북한이 핵을 포기한다면'이란 전제를 깔았단 말이죠. 이건 미국 크롤리 차관보가 말한 "정치적 약속을 한다면"이란 것하고는 달라요.

클린턴 국무장관은 지난달 중순 ARF(아세안지역안보포럼)에서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관계정상화와 평화체제, 경제·에너지 지원을 논의하겠다'고 했는데, 그것도 겉으로 보기엔 핵 연계론이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그건 2005년 9.19 공동성명에 이미 다 나온 얘기를 다시 한 번 한 겁니다.

9.19 공동성명은 '행동 대 행동'의 원칙을 못 박았기 때문에 핵 연계론이 아니에요. 동시 병행으로 하자는 거죠. 북한이 핵을 먼저 포기라라고 하면 절대 9.19 공동성명을 받아들였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8.15 경축사의 대북 제안은 동시병행적 개념이라고 받아들일 수가 없게 돼있습니다. 철저한 연계론이고, 실제로 지난 1년 반 동안 그랬습니다. 그러니 북한이 8.15 경축사에 솔깃할 리가 없습니다.

교류·협력 → 정치적 신뢰 → 군사적 신뢰 → 군비통제 → 군비감축

'한반도의 새로운 평화구상'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그것에 대해서 뭔가 있는 것처럼 쓰는 언론도 있는데...대통령은 남북간 재래식 무기 감축을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러면서 청와대는 대통령이 재래식 무기 감축을 언급한 건 처음이라고 설명하는데...

재래식 무기 감축을 특정해서 제안한 것은 물론 처음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처음이냐 두세 번째냐가 아니라, 지금 남북관계의 현실을 놓고 볼 때 이 시점에 재래식 무기 감축을 말하는 게 과연 실현가능성이 있는 일이냐 하는 겁니다.

재래식 무기건 대량살상무기(핵·미사일·생화학무기 등)건 군비감축을 하려면 그 전에 군비통제라는 과정을 먼저 거쳐야 합니다. 그리고 군비통제를 하기 위해서는 군사적 신뢰가 구축되어 있어야 합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적 신뢰가 먼저 형성돼야 하는 거고, 정치적 신뢰는 비정치 분야에서의 교류와 협력이 활성화돼야 한다는 게 국제정치학자나 분쟁전문가들의 공통적인 견해입니다. 그게 정설이고 역사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소 전략무기 감축(START)이란 것도 1970년대에 소위 '헬싱키 프로세스'를 통해서 동서 진영이 경제·사회·문화 교류를 하고, 그러면서 정치적 신뢰를 쌓고, 그리고 맨 마지막에 군비 감축 협상으로 간 겁니다.

지금 남북의 현실을 볼 때 무기 감축을 논의할 군사적 신뢰가 있느냐? 없습니다. 군사적 신뢰 구축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개발이라고 하는, 군사 지역에서의 협력 사업 때문에 군사적 신뢰 구축 작업이 조금은 진행 됐었는데, 작년부터는 그것마저도 끊어졌잖아요.

그런 마당에 재래식 무기 감축을 협의하자는 건 교류협력이라는 입구에 들어가다 말고 돌아 나와서 군비감축이라는 출구를 찾는 격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아...이게 참 국민들이 얼핏 들으면 굉장히 적극적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군비감축이라는 천리길로 가기 위한 한 걸음도 못 떼는 상황에서 너무 비현실적인 제안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 대통령이 최초로 얘기했건 서너 번째로 했건 관계없이 진정성에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군비감축을 누가 안 하려고 하겠습니까. 특히 휴전선 근처에 전진 배치되어 있는 장사정포, 방사정포들은 북한이 '서울 불바다'를 위협하는 기반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걸 뒤로 물리거나 줄이게 하고 싶은 마음들이야 굴뚝같았죠.

남쪽에 군인 출신들이 30년 이상 대통령을 했는데 장사정포, 방사포를 포함해서 군비감축 생각을 왜 안 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런 말이 없었다면, 그 대통령들은 군축이라는 건 주장이나 제의로 되는 게 아니라, 정말 그걸 이루어 낼만한 기초가 다져져야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았다고 봐야 합니다.

당위적인 차원에서야 군비감축이 한시가 급하지만 현실적으로 단계를 밟아야 되기 때문에 군사적 신뢰 구축부터 협의하자고 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재래식 군비건 대량살상무기건 한반도에서의 군비 통제와 감축에는 미북간 정치·군사관계 재설정이 현실적인 필수 요건의 하나 아닙니까? 주한미군의 재래식 군비는 논외로 하고 남북간 군비 얘기만 할 수 있겠어요? 북한이 그렇게 하자고 하지 않죠.

그래서 역대 군인 출신 대통령들이 군비감축 대신 현실적으로 필요하고 또 가능한 신뢰구축 문제를 많이 얘기했던 겁니다. 순서나 길속을 아는 사람들이니까 재래식 군비건 대량살상무기건 군비감축에 대해서 쉽게 말을 안 한 거죠.

지난 10년 동안에 정부가 군사 접경지역에서 경협을 활성화시켜 왔던 건 '퍼주기'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군사적 신뢰의 인프라 구축 차원에서 그리 한 것입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초보적이지만 군사적 신뢰가 조금씩 구축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간 대북정책이 잘못됐으니까 갈아엎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낮은 수준의 군사 신뢰 구축의 기반마저도 갈아 엎어버렸죠. 요즘 북한 군부가 얼마나 적대적으로 변해 있습니까? 솔직히 말해 남북간에는 아직도 불신이 커서 상대측에서 어떤 말이 나오면 무슨 흉계가 있는지를 먼저 생각하는 마당에 군비감축을 애기한다는 건...너무 난데없어요.

대통령은 또 "눈앞에서 총부리를 겨누면서 어떻게 진정한 화해와 협력을 말할 수 있겠냐"고 했습니다. 얼핏 보면 그 것도 말은 돼요.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개성공단 개발이나 금강산 관광 같은 걸 계속 키워나감으로써 화해와 협력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자연히 서로 총부리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경축사에서는 순서를 거꾸로 잡은 겁니다.

이 대통령은 이미 지난달 폴란드에서 '북한에 현금이 들어가서 핵이나 미사일을 개발했다는 의혹이 있다'고 했단 말예요. 그런 말을 해놨기 때문에 이번에 김정일 위원장이 현정은 회장한테 뭔가 약속을 한다고 해도, 우리 정부가 금강산 관광 재개를 허용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경협 대가의 군사적 전용론에 대해서 특단의 용단을 내린다면 몰라도.

어쨌든 북쪽은 8.15 경축사를 보고 남쪽에 큰 변화가 없다고 볼 것 같고, 특히 6.15 공동선언과 10.4 정상선언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었기 때문에 무반응이나 비난으로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대통령은 올해 삼일절 경축사에서 "남북간 합의사항을 존중할 것"이라는 표현을 썼어요. 그래서 당시에는 뭔가 되려나 보다 하는 기대가 있었는데, 이번 8.15 경축사에서는 그것마저도 일체 언급을 한 했기 때문에 오히려 후퇴한 면이 있습니다.

일본 '대북지원 한다면 독자적으로 한다'

몇 가지만 덧붙이면...8.15 경축사에서 "남북 경제공동체 실현을 위한 고위급 회의를 설치하고 관련국 및 국제기구와의 협력을 통해 경제, 교육, 재정, 인프라, 생활향상 분야에 걸친 대북 5대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정부는 자꾸 국제협력, 국제 자금을 통해 북한을 개발하겠다고 하는데, 일본 사람들이 그러더라고요. '대북 지원을 하면 우리가 일대일로 직접 하지 왜 한국이 하는 프로그램에 들어가느냐.' 그게 그런 겁니다.

또 북한의 교육에 손을 대겠다는 제안도...교육을 하나의 기능으로만 생각하는 모양인데, 아무리 경제나 과학기술 분야의 공부라고 해도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바탕이 돼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공부를 남쪽에서 시켜주겠다고 하면 꺼림직 하죠. 남북이 정통성 문제로 아직도 경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하는 얘깁니다.

2002년 10월, 북한 경제시찰단이 남한을 방문하고 하니까 우리 경제 관료들이나 경제학자들이 북한에 경제개발 전략을 짜 주겠다는 말을 건네 달라고 한 적이 있어요. 내가 그거 받겠냐고 하면서 관두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그랬어요. 과거에 미국이나 일본이 우리 경제를 봐주겠다고 하면 종속을 구조화하는 게 아니냐고 하면서 가능한 한 의존성을 줄이기 위해서 이것저것 따지고, 어떤 협약을 맺으면 거기에 독소조항이 뭐가 있는지 찾으려고 애를 쓰고 그랬는데, 하물며 북한이 그걸 받겠습니까. 투자나 교역은 받겠지만, 지도·지휘는 안 받으려고 하지 않겠어요?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

* '정세토크'는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김대중평화센터 부이사장, 북한대학원 석좌교수)이 한반도 문제에 관해 자신의 경험과 견해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격주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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