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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금융위기를 예측하지 못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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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금융위기를 예측하지 못했나'

영국 최고 학자들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보낸 서한 전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글로벌 금융위기 예측 실패에 대해 사죄했다는 이유로 화제가 된 영국 경제학자들의 서한 전문(원문보기)이 최근 공개됐다.

영국 학사원(BA)의 팀 베슬리와 피터 헤네시 교수가 학사원을 대표해 보낸 이 서한은, 최고 권위의 학술협회인 BA 등 각계 전문가들이 모인 토론회에서 여왕이 하문한 금융위기 예측 실패의 원인에 대한 견해들을 정리한 것이다.

이 서한에는 알려진 것과는 달리 직접적으로 여왕에게 사죄하는 표현은 보이지 않지만,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아무리 많아도 시스템을 위협하는 커다란 위기 예측에는 취약한 배경을 솔직히 털어놓은 점이 주목된다.
▲ 영국 학사원 학자들이 엘리자베스 여황에게 보낸 서한. ⓒBA

다음은 이 서한의 전문이다. <편집자>

지난해 11월 폐하께서 런던정경대(LSE)를 방문했을 때 상당히 정곡을 찌르는 하문을 주셨습니다. 신용경색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왜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2009년 6월 17일 영국 학사원은 폐하의 질문을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습니다. 이 토론회에는 재계, 금융게, 규제당국, 학계, 정부를 대표하는 많은 전문가들이 참여했습니다.

이 서한은 당시 참석자들의 견해와 토론 과정에서 다룬 여러 쟁점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이 서한이 폐하의 하문에 대한 답변이 되었으면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금융위기를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어떤 형태로, 언제 시작하며 어떤 속도로 확산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문제의 성격을 예측하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기를 예측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행동하려는 의지와 당국이 이 문제에 대처할 올바른 수단을 갖고 있다는 확신이 중요합니다

금융시장과 글로벌 경제에 존재하는 불균형에 대한 경고는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국제결제은행(BIS)는 금융시장의 리스크가 적절히 다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우려를 계속 드러냈습니다.

영국은행(BoE)도 1년에 두 번 발표하는 금융안정보고서에서 이런 우려를 많이 했습니다. 이제 국유화된 영국의 주요 은행 한 곳에만 4000명에 달하는 리스크 매니저가 있었다고 하지만, 특정 금융상품이나 대출이 아니라 시스템 전체에 미치는 리스크를 파악하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리스크 계산은 대부분 개별적인 금융업무에 한정된 것이어서 보다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려한 글로벌 경제의 불균형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례없는 세계적인 경제발전으로 중국과 인도 같은 가난한 나라에서는 많은 주민들의 생활 수준이 향상됐습니다. 하지만 이런 번영은 이른바 '글로벌 저축 열기'를 초래했습니다.

이런 저축으로 풍부해진 자금은 안전한 장기투자 수익을 낮춘 요인이 되면서 많은 투자자들은 더 큰 리스크를 부담하면서 더 많은 수익을 추구하게 됐습니다.

영국과 미국 같은 나라들은 중국의 경제발전의 혜택을 누렸습니다. 많은 상품 가격이 인하되고, 가계와 재계가 자금을 조달하기 쉬워졌습니다.

이런 자금들은 영국과 미국의 주택가격 상승을 촉진시켰습니다. 이런 위험을 경고한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은행들이 알아서 잘 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금융 천재들이 리스크 관리를 위한 새롭고 정교한 방안들을 찾아냈다고 믿은 것입니다. 실제로 일련의 신종 금융기법들을 통해 리스크를 분산시켜 사실상 리스크를 제거했다는 주장들이 나왔습니다. 금융시장 자체가 변했다는 확신도 있었습니다.

정치인들도 시장에 홀렸습니다. 단기적이며 개별적인 리스크 예측에 뛰어난 금융 및 경제 모델들로 인해 이런 견해들은 더욱 힘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델들은 정작 상황이 잘못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예측할 능력은 없었습니다.

환상에 빠져 실상을 외면하는 심리 만연

사람들은 전세계에서 선발된 은행의 임원들과 공신력 있는 사외이사들을 신뢰했습니다. 그들의 판단이 틀리거나 조직 내에서 벌어지는 리스크 감시를 제대로 할 능력이 없다고 믿고 싶어한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도 자기기만에 빠지고, 그들이 선진경제의 흐름을 이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기만했습니다.

전반적으로 낙관적 분위기가 지배할 때 사태의 진전을 억제하는 것이 어려운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가계는 낮은 실업률, 저렴한 소비재, 용이한 신용거래의 혜택을 누리고, 재계는 자금 조달 비용이 낮아지는 혜택을 보았습니다.

은행가들은 막대한 보너스를 챙기면서 전세계에 이런 금융상품을 팔아댔습니다. 정부는 세수가 증가해 학교와 병원 등에 공공 지출을 늘릴 수 있었습니다.

이런 과정은 낙관적인 분위기를 깨는 증거가 무수히 나와도 부정하게 되는 심리 상태를 초래하게 됩니다. 실질적인 기반이 아니라 환상에 의해 심각한 정도로 진행된 악순환이었습니다.

사태가 터진 뒤 대처해도 된다는 낙관론 지배

리스크 관리 임무를 맡은 당국들도 어려움이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파티가 과열될 때 진정시키는 역할'을 했어야 한다는 지적을 받았지만, 이런 말을 하려면 그럴 수단이 있다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더 많은 규제 완화를 요구하는 압력이 있었습니다.

런던 시티(영국의 금융센터)와 금융감독청(FSA)은 글로벌 금융 규제의 모범사례로 찬사를 받았습니다.

증시와 주택시장의 거품은 사전에 막으려 하기보다는 사후에 대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공감대가 널리 형성돼 있었습니다. 미국이 '닷컴버블' 붕괴 후 발생한 경기침체를 그럭저럭 헤쳐나간 사례 등도 이런 견해에 믿음을 주었습니다. 사태가 터진 뒤 경제를 구해낼 수 있다는 견해에 힘을 보태주었습니다.

인플레이션은 낮은 상태에 머물렀고 경제가 과열됐다는 경고 신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영국은행의 통화정책위원회는 전례없는 낮고 안정된 인플레이션 기간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리스크를 피하는 방향으로 정책적 고려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일부 국가에서는 금리 인상으로 리스크에 대처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통화정책은 경제의 불균형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인플레이션 예방에 치중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시스템 전체를 살필 수 있는 공조 체제 구축해야

그렇다면 뭐가 문제였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자기 영역에서는 임무를 적절히 수행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통상적인 성공 의 잣대로 보면 훌륭하게 일을 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각 분야들의 활동이 집합적으로 연결될 때 하나의 당국이 관할하지 못하는 불균형이 초래된다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불균형은 군중심리와 금융 및 정책 분야의 지도자들의 권위와 결합해 위험한 상황을 초래했습니다. 개별적인 리스크는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지만, 시스템 전반에 대한 리스크는 큰 것이었습니다.

요약하자면, 폐하, 이번 위기가 터지는 시기, 범위, 정도를 예측하고, 막지 못한 실패는, 원인은 여러가지지만, 대체로 영국을 비롯한 세계의 수많은 명석한 사람들의 집합적인 상상력이 시스템 전반에 가해지는 리스크를 이해하지 못한 실패였습니다.

예측 실패에 대한 폐하의 하문을 접하고, 다시는 폐하께서 그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도록 영국 학사원은 재무성, 내각, 영국은행, 금융감독청 등이 공조해 전체를 살펴보는 능력을 새롭게 구축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학사원은 이런 모색을 위해 또다른 세미나를 개최할 것입니다. 이런 세미나의 결과물에 대해 폐하께 보고할 것입니다. 지난해의 사태는 진지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런 충격이 유익한 것이 될지는 허심탄회하게 이번 사태의 교훈을 분석하고 향후 그 교훈을 적용하는 태도에 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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