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통령 사르코지는 룰라의 팔을 잡아끌며 친근함을 과시했을 뿐 아니라 우파의 정체성도 잠시 망각한 채 세금천국(조세회피지역)을 없애는 등 시장의 무정부주의를 규제해야 한다는 룰라의 주장에 맞장구쳤다.
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오바마 대통령도 룰라의 손을 굳게 잡고 정상들과 기자들에게 고백했다. "이 분은 내 우상이다. 그를 깊이 존경한다. 이분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대통령이다"
▲ "룰라 대통령!" 포스터를 펼친 소년 지지자 |
룰라의 인기는 집안에서도 폭발적이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룰라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대한 지지도는 80%를 넘는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브라질 민주주의 사상 최고 지지도라는 분석이다. 압도적 지지를 받다보니 룰라 대통령 자신이 재선 임기를 마치고 퇴임할 것이라고 거듭 밝히고 있는데도, 언론은 삼선 출마 가능성을 꾸준히 제기하며 국민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대통령의 인기는 강력한 후광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2010년 대선에서 룰라가 지지하는 후보에게 표를 던지겠다는 시민들이 51%에 이르고 있다. 차기 대선 출마를 저울질하고 있는 야당 후보들마저 룰라의 인기를 활용하고 있다. 가장 강력한 야당 사회민주당(PSDB)의 예비후보들은 "룰라 정부가 시작한 개혁들을 완수할 것"이라고 다짐한다. 룰라 없는 룰라 시대를 주창한 셈이다.
룰라는 브라질 민주주의를 위해 대통령은 교체돼야 한다며 일찌감치 후임자를 훈련시켜왔다. 군사독재시절 게릴라 전사였던 질마 호우세피(Dilma Rousseff)를 포스트룰라 시대를 위한 지도자감으로 제시했다. 룰라는 2003년에 그녀를 에너지 장관이라는 요직에 앉혔고, 2005년에는 내각 서열 1위인 정무장관에 임명했다. 2007년부터는 호우세피 장관을 브라질판 뉴딜정책인 '성장촉진계획'(PAC)의 상징으로 추켜세우고 있다. 노동자대통령 뒤에 여성대통령이라는 환상적인 정치 구도를 짜둔 것이다.
결정적인 실수만 없다면 룰라는 정치적 생애의 최절정에서 퇴임을 맞을 것이다. 임기를 조용히 마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성공한 대통령으로 간주돼온 브라질에서 국민적 박수갈채 속에서 물러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 나라 60년 정치사에서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민간인 대통령이 오직 세 명에 불과했으니까.
최근 개최된 국제노동기구(ILO) 회의에서 룰라는 1년 반 뒤에는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싸우는 세계시민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한편, 오바마 대통령은 룰라 대통령이 세계은행장이 되어 빈국들에게 악명을 쌓은 이 기관을 혁신해주기를 바란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룰라는 세계은행 창설 65년 만에 최초로 미국인이 아닌 총장, 최초의 노동자 출신 은행장이 될 지도 모른다.
우파의 저주, 좌파의 비관
▲ 노동자당의 선거 포스터 "인간적인 브라질을 원한다!" ⓒ박정훈 |
룰라 대통령이 높은 국민적 지지도와 국제적 명성을 한꺼번에 거머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잠시 시간 여행을 할 필요가 있다.
불과 7년 전만 해도 룰라 정부의 미래를 낙관한 이들은 극히 드물었다. 당시의 비관주의에는 정치적 좌·우파가 따로 없었다.
2002년 대선 선거운동 당시 노동자당(PT)의 후보였던 룰라의 지지도가 상승하면 할수록 브라질 경제 사정은 더욱 악화되기만 했다. 국제자본이 요동치며 브라질을 빠져나가면서 주가와 국가신인도를 추락시켰고 브라질 통화(헤알화) 가치를 하락시켰다. 그 무렵 '세계 최고의 펀드 매니저' 조지 소로스는 브라질 국민들에게 여당후보를 지지하라고 협박했다. "브라질 국민은 지금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아르헨티나 꼴이 되든가 주제 세하(여당 후보)를 찍든가" 2001년 말에 국가부도사태를 맞은 이웃 나라 아르헨티나를 상기시킨 것이다.
좌파도 마찬가지였다. 중남미 사회운동에 정통한 좌파 사회학자 제임스 페트라스는 룰라 정부의 1년(2003년)을 평가하면서 "탈레반 신자유주의자"에 불과하다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룰라의 빈곤퇴치정책이 빈곤과 실업을 더욱 증가시키는 포풀리즘 수법에 불과하다고 평가 절하했으며 미국이 주도하는 미주자유무역지대 협상에서 개발도상국의 입장을 강화하려는 시도가 브라질을 미제국주의의 하위파트너로 변질시킬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브라질 내외의 좌파들이 룰라와 노동자당에 대한 환상에서 시급히 벗어나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성장하는 경제
이들의 비관적인 예상은 모두 빗나갔다. 먼저 브라질은 조지 소로스의 저주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룰라 정부는 예상과 달리 거시경제의 안정을 추구했다. 신자유주의 시대 90년대에 개방된 브라질 경제 현실을 외면하는 정책을 추진할 경우에 거시경제의 안정을 해칠 것이라고 판단했다. 룰라 정부는 국제금융자본의 '발작'을 진정시키기 위해 외채를 모두 상환하겠다고 다짐했다. 긴축정책을 더욱 강화해 재정흑자율을 높이고, 자본 유출을 막기 위해 이자율 수준도 높게 유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좌파 정부의 집권에 우려의 시선을 보내는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조치였다.
동시에 룰라 정부는 수출을 통한 성장 전략을 본격화했다. 초긴축정책이 가져오는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서 강력한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룰라 정부는 부시 정부의 미국과도 경제 분야에서는 지속적으로 협력했다. 동시에 미국에 대한 수출 의존도를 서서히 낮추어나갔다. 이웃나라들은 남미공동시장(Mercosur)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중국, 인도, 러시아 등 브릭스(BRICSs) 국가들과 무역을 확대했으며, 나아가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경제협력도 강화했다.
룰라의 브라질호는 우호적인 국제환경이라는 '순풍'과 만났다. 원자재에 대한 국제 수요가 급증하자 자원과 곡물 부국인 브라질의 수출은 세 배나 증가했다. 세계경제위기 전까지 국제금융시장도 낮은 이자율로 충분한 유동성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 결과 브라질은 눈부신 경제 성적을 보여주었다. 신자유주의 시대 1%에도 못 미치는 저성장의 시대가 끝나고 2004년~2008년까지 연평균 5%를 상회하는 성장률을 기록했다. 세계적인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브라질은 올해도 1%~3%의 성장률을 보일 것이라는 예측이다.
또한, 2002년 당시만 해도 국제통화기금의 구제 금융을 받고 있던 브라질은 2008년 외환보유액이 외채를 상회하여 사상 처음으로 순 채권국이 되었다.
늘어나는 소득
▲ 노동자당의 깃발을 쓰고 키스를 나누는 지지자들 ⓒ박정훈 |
브라질이 제2의 아르헨티나가 될 지도 모른다던 우파의 예상은 완전히 깨졌다. 뿐만 아니라 좌파의 비관주의도 보기 좋게 빗나갔다.
룰라가 집권하던 2003년 브라질의 사회 지표는 최악의 상태였다. 브라질은 중남미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가장 불평등한 국가 중 하나였다. 2002년 당시 실업자는 국민 열 명 가운데 두 명이었고, 약 1억 8천만 인구 가운데 약 40%가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재정능력이 아주 중요했다.
룰라 정부는 브라질 사회의 최하층에 속하는 약 4천 만 명을 빈곤에서 구제하는 것을 사회정책분야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재원 마련을 위해 룰라 정부는 공무원 연금제도를 개혁했다.
브라질 연금제도는 공무원과 비공무원 간의 차이는 물론이고 공무원 퇴직자 내부의 격차로 인해 개혁 대상 1순위로 지목되고 있었다. 2002년 약 4백 만의 퇴직 공무원을 위한 연금 때문에 발생하는 재정적자는 국내총생산의 4.2%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2천 1백 만의 비공무원 퇴직자 연금 때문에 발생하는 재정적자는 국내총생산의 1.3%에 불과했다.
또한, 저소득층의 연금은 최저임금의 2배 수준인 데 반해, 연방공무원 퇴직자는 최저임금의 15배, 특히 사법부 공무원 퇴직자는 최저임금의 33배에 이르렀다. 룰라 대통령은 자신이 받을 연금보다도 더 많은 연금을 받고 있는 고위 공직자들의 명단을 전격적으로 공개하면서 국민적 지지를 확보했다.
룰라 정부는 연금개혁으로 얻은 재원을 빈곤퇴치정책(Fome Zero)에 투여했다. 이 정책은 생활 형편이 나쁠수록 더 후하게 지급하는 소득지원제도(Bolsa Familia)로 구체화됐다. 이 제도에서 흥미로운 점은 생계지원금 수령을 위해서는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야 하며, 진료소에서 반드시 예방접종도 받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계지원금을 의료 및 교육 공공서비스에 연계시킨 일종의 패키지 빈민복지 제도이다. 2003년 도입 초기 350만 가구만이 혜택을 받았지만 현재는 1110만이 넘는 가구가 혜택을 받고 있다. 덕분에 중남미 최악의 불평등지수(지니계수)도 200o년 2000년대 초반의 0.64에서 2007년 0.55로 개선되었다.
룰라 정부는 소득 지원 사업을 더욱 확대하고 있다. 소득지원액을 증액하는 것은 물론이고 소득 지원 대상자도 확대하고 있다. 노동자당(PT)은 이 제도를 더욱 확대해 모든 시민들(5년이상 거주한 외국인까지)을 대상으로 하는 '기본소득제'로 발전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빈곤층에 대한 소득지원 사업뿐만 아니라 고용창출정책(2002년~2008년 사이에 1천 만 개의 신규고용창출), 신용 대출의 민주화 정책, 최저임금을 물가상승률 이상으로 인상하는 정책 등은 빈민층의 생활을 개선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
룰라의 변신
룰라 정부가 경제성장과 서민복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무엇보다도 정치적 안정을 이루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브라질의 정치안정은 룰라 정부가 채택한 현실주의 노선의 결과였다. 룰라 대통령은 2002년 네 번째 대선에 도전하면서 정치적 변신을 시도했다. "노동자당을 찍어라, 나머지는 다 부자다"라고 선명한 정치색을 드러내던 급진주의 노선을 버리고 "사랑과 평화의 룰라"로 변신을 시도했다.
2002년 대선 캠페인 당시 브라질 정가에 유행하던 일화가 있다. 거기엔 급진파 동료와 대화를 나누는 룰라가 등장한다.
"여보게 룰라! 자네가 대통령이 되어 민영화 기업들을 다시 국유화하고, 취임하자마자 최저임금을 올리고, 금융업의 국적을 되찾아오고, 국제통화기금(IMF)의 횡포에 맞서 싸우겠다고 공약하게!"
"동의하네. 하지만 자네가 그 공약을 내걸고 선거에 출마하게나. 1차 투표를 무사히 통과해 결선투표까지 가면 내가 자네를 찍겠네!"
일화 속의 룰라는 집권을 위해 전략을 수정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노선의 선회는 사실 대선을 앞둔 정치 공학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노동자당(PT)의 세 차례 룰라를 내세워 집권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특히 1994년과 1998년 대선에서는 신자유주의 후보가 1차 투표에서 모두 50%를 넘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으며 당선되었다. 노동자당(PT) 내의 룰라를 비롯한 현실주의자들은 신자유주의 정치연합이 중도파 와 우파(극우파)의 연합으로 구성되었다고 분석했다. 탈신자유주의 정치연합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좌파는 중도파와 손을 잡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 전략은 이른바 '좌파 단결, 우파 분열'이라는 전략적 슬로건으로 표현되었다. 룰라는 전통적으로 우호관계를 맺고 있는 브라질 공산당을 비롯한 좌파 정당들과 선거 연합을 구성한 것은 물론이고 중도 우파 자유당(PL)의 지도자 주제 알렌까르를 부통령 후보로 영입했다. 주제 알렌까르는 초등학교를 나와 브라질 대기업가로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로서 룰라의 표현을 빌자면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에 맞서는 생산 자본의 대변자로서 안성맞춤이었다.
또한, 룰라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를 단순히 반대하던 과거와 단절했다. 90년대의 고강도 신자유주의 시대를 거친 브라질 사회를 서서히 바꾸어나가는 점진적인 개혁 노선으로 선회했다. 시장을 이용해 경제성장을 이루되, 시장경쟁에서 배제된 서민들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의 큰 틀을 인정하되 개발도상국의 발언권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통합의 정치
▲ 상파울루 외곽 빈민촌에 거주하는 노동자당의 지지자 "룰라는 우릴 쫓아내질 않을 거예요" ⓒ박정훈 |
현실주의 노선에 따른 선거연합은 룰라에게 선거 승리를 안겨주었다. 이때부터 룰라는 두 가지 방향에서 통합 정치의 상을 가다듬었다. 첫째, 연방 행정부를 극우파를 제외한 모든 정치세력을 받아들이는 초당적 연합 정부로 구성했다. 선거연합에 참가한 정당은 물론이고 대선 당시 정적이었던 사회민주당(PSDB) 지지자들도 정부 요직에 앉혔다. 이 연합정부는 보스턴 은행 장 출신의 우파(브라질 중앙은행장 엥히끼 메이렐리스)에서부터 옛 트로츠키주의자인 안또니우 빨로치 재무장관까지 다양한 정치적 이력의 소유자들로 구성됐다.
둘째,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위해서는 의회 지지가 필수적이었다. 룰라는 의회 내에 노동자당이 주도한 정치연합을 구성하고자 했다. 브라질 의회는 사실상 로비 집단과 다를 바 없는 무려 30여개의 정당이 난립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당정치의 전통이 허약해서 생긴 일이다. 룰라는 이 의회에서 독재정권의 후예로 구성된 극우파, 룰라의 노선 선회에 반발해 탈당하거나 연정에서 이탈한 급진주의 좌파를 제외한 12개의 정당과 정책연합을 구성했다.
입법부와 행정부에 정치연합을 구성한 룰라 정부는 전통적인 좌·우 개념을 넘나드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지지층을 좌우로 확대해왔다. 가령 최근 5년간의 경제호황에 크게 기여한 농업과 목축업 기업들의 역할을 인정해, 핵심지지층인 "무토지 농업노동자운동(MST)"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점진적 토지개혁정책을 채택했다. 이로써 브라질 우파의 핵심 지지기반인 기업가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또한, 빈곤퇴치 정책의 지속적인 확대로 룰라 정부에 대한 빈민층의 지지는 더욱 튼튼해졌다. 그 결과가 80%가 넘는 지지율의 고공행진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하원 91석(전체513석), 상원 14석(전체 81석)에 불과한 의석으로 지난 7년간 노동자당(PT) 정부가 이룬 정치적 성취이다.
최근 한 외신 기고문에서 룰라는 과거 정부와 노동자당의 정부를 구별했다. "과거 이 나라 대통령 대다수는, 물론 그들 가운데 개혁을 추진했던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소수를 위해 통치했다. 그들은 오직 브라질 인구의 3분의 1의 문제(중상류층)만을 걱정했다"
즉 룰라가 행정부와 입법부에서 극우파를 배제한 다수 정치세력의 연합을 구성한 것은 브라질 국민 다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것만이 브라질 국민들의 진정한 통합에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최악의 시련
룰라의 정치 행로가 늘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2005년 소위 "월급 추문"이라는 권력형 비리가 불거졌을 때는 최악의 정치적 시련을 맞았다. '월급 추문'이란 의회 내에서 정책 연정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룰라 정부의 핵심 정치인들이 의원들을 고액의 월급으로 매수한 사건이었다. 당시 브라질 내외신들은 룰라 대통령이 부패혐의로 탄핵된 콜로르 지 멜루 전 대통령과 임기 중 자살한 제툴리우 바르가스 전 대통령 사이에 놓여 있다고 조롱했다.
룰라는 정면 돌파의 길을 택했다. 직접 방송에 출연해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자신도 측근들에게 배신당한 심정이라고 토로했다. 자신의 오른팔인 주제 지르세우 정무장관을 비롯해 핵심 측근을 정부 요직에서 해임했다. 노동자당의 지도부도 큰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룰라도 2006년 대선에서 1차 투표로 승부를 결정짓지 못하고 2차 투표까지 가는 정치적 비용을 치러야 했다.
2006년 브라질의 저명 일간 <폴랴 지 상파울루> 기자는 내게 "브라질 국민들은 룰라가 부패 스캔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굳게 믿기로 했다"고 전했다. 사실 부패 스캔들은 똥 묻은 반대파들이 겨 묻은 룰라를 비판하는 격이다. 2009년 초 연방 대법원에 따르면 브라질 정치인(연방 상원, 하원의원, 정부 각료 포함) 700여 명 가운데 378명을 부패혐의로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부패는 여전히 브라질 정가의 해묵은 숙제이다.
좌파의 본능
2006년 재선 성공으로 부패 스캔들의 올가미에서 벗어난 룰라는 집권 2기를 맞아 더욱 강도 높은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룰라 정부는 브라질 경제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성장을 위한 국가 정책을 제시했다. 2007년 초, 연평균 5% 대의 경제성장률을 유지하기 위해 대규모 인프라 투자계획인 성장촉진계획(PAC)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독재정권 시대에 건설된 낙후한 국가 인프라들을 개선해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성장의 견인차였던 국제 원자재의 수요에만 의존하지 않고 내수를 진작해서 성장을 유지하겠다는 판단이다.
흥미롭게도 2008년 세계 경제위기 이후에 룰라 정부는 그간 억제되었던 '좌파의 본능'을 발휘하고 있다. 그 즈음 룰라는 "시장 만능의 시대는 끝났다. 신흥경제국이 국제통화기금에 종속되던 시대도 끝났다. 라틴아메리카가 독자적인 목소리를 잃어버린 시대도 끝났다"고 선언했다. 국제금융시장에 대한 새로운 규제의 필요성도 역설했다. "모든 시민이 자기 나라와 국제기구의 규칙을 준수한다. 그러나 은행들은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미국이 은행국유화를 놓고 이념 논쟁을 벌이고 있던 2008년 하반기 룰라 정부는 은행국유화법안을 조용히 통과시켰다.
경제위기가 브라질 경제에도 파급되던 그 시점에 룰라는 사회복지정책에 대한 투자를 대폭 늘리겠다고 선언했다. 재원은 2007년에 대서양 연안에서 발견된 유전 개발 수입으로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 유전 지대의 개발이 완료되면 세계17위 산유국인 브라질이 10위권으로 진입될 지도 모른다는 예상까지 나오고 있다.
사회복지정책의 첫 번째 사업으로 대규모 서민주택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2009년부터 15년간 단계적으로 1천 2백 만 호(5천 만 인구)의 서민 주택을 건설해나가겠다고 계획이었다. 룰라 대통령의 퇴임이후에도 정책의 일관성이 유지될 수 있도록 정치색이 다른 지방정부와의 협의는 물론이고 시민사회의 참여 속에서 완성된 계획이었다. 이로써 파벨라(브라질 판자촌 밀집지역)로 악명 높은 브라질 대도시 풍경은 서서히 달라질 전망이다.
최근에는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들의 집회에 참석해서 농업에 대한 지원책을 발표했다. 토지 분배 정책이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농민들이 생산적인 소농으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기술과 신용 지원이 필수적이기 때문이었다. 그 자리에서 룰라는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을 '비용'이라고 부르고, 부자를 돕는 것은 '투자'라고 부른다"고 꼬집었다. 서민의 삶을 파국으로 몰고 간 시장 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이었다.
룰라의 약속
▲ 미래의 호나우두 혹은 마야조직의 우두머리를 꿈꾸던 빈민촌의 소년들, 이제 대통령의 꿈을 꿀 수도 있게 되었다. ⓒ박정훈 |
정치학에서는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정치적 허탈감으로 변하는 사회 심리적 현상을 지칭하는 단어를 아예 스페인어인 데셍깐또(desencanto)라고 부른다. 1980년대부터 시작된 민주화는 중남미 전역에서 독재의 기나긴 밤을 과거로 만들었다. 하지만 중남미 민중은 민주화에 대해 너무도 실망했다. 2002년 중남미 18개국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여론조사에 따르면, 생활이 개선된다면 독재정권을 선출하겠다던 시민의 수가 열 명 중 다섯 명 이상이었다.
문제는 민주주의 자체가 아니었다. 룰라 대통령과 노동자당(PT) 정부는 그것을 직접 보여주었다. 이것이 룰라 정부의 가장 큰 업적이다. 추락한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적 신뢰를 회복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민중의 삶을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지난한 협상 속에서 논쟁과 토론이라는 민주적 수단을 통해서 이루었다.
과거에 이 대륙에서 인기를 누리던 정치적 상징들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파시스트에 가까운 이념으로 집권한 군인들은 노동빈민의 아버지로 군림했다. 아르헨티나의 페론이 그랬고 브라질의 바르가스가 그랬다. 다른 부류들은 모두 저항자들이었다. 부패하고 타락한 독재에 맞서 군사반란을 일으킨 청년장교들, 제국주의와 독재에 맞서 빈농들과 함께 무기를 든 게릴라 혁명가들이었다. 차베스가 그랬고, 전설이 된 체 게바라가 그랬고, 스키마스크의 마르꼬스가 그 뒤를 잇고 있다.
이제까지 라틴아메리카 대륙에는 민중들에게 더 나은 삶을 약속했던 정치가들과 저항자들이 명멸해갔다. 그들 가운데 민중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시킨 이들은 얼마나 될까?
7년 전 대통령 선거운동 마지막 날 룰라는 자신의 정치적 요람인 상파울루 노동자 지구를 찾아 마지막 유세를 했다.
"브라질 엘리트들이 결코 이루지 못한 것을 한 선반공이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반드시 보여 주겠다"
그는 노동자 동지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굳게 맹세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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