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이 유명한 경구는 로맹 롤랑의 글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를 그람시가 요약한 것입니다.
제주도 강정마을의 600명이 넘는 주민, 평화활동가들에 대한 연행, 구속, 투옥, 벌금 사태 뒤에는 불법 공사 상황이 있습니다. 주민 협의를 거치지 않은 강제 과정, 전쟁을 도발하는 안보 기지, 민군복합항이 입증되지 않은 설계도, 환경문제가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공사, 인권 유린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불법 요인에 대해 제주 도지사를 중심으로 제주 주요 언론은 입을 다물거나 사실을 왜곡해 왔습니다.
제주해군기지는 미 해군 설계요구에 의해 미군 핵 항모가 입항할 규모로 설계되고 있다는 사실을 2012년 9월, 장하나 국회의원이 밝혀냈습니다.
모국어로 글을 쓰는 시인과 작가들은 제주해군기지 건설 후 대정, 세화 성산에 공군기지가, 산방산에 해병대가 들어선다는 소식을 들으며 제주도가 최전선화되는 것을 공포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대한민국 곳곳의 요지를 미군에게 내어준 형편임에도, 비무장 평화의 섬 한 곳 확보할 수 없을 만큼 우리 조국은 무력한 나라인가에 대해 다만 슬퍼합니다.
군함에 의해 오염될 서귀포 바다와 기지촌으로 전락할 제주도의 고운 마을들을 생각하면, 어떻게 제주도민을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쓰는 일 외에 별로 잘 하는 게 없는 시인과 소설가들은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서귀포 바람, 애월의 파도, 북촌의 눈물, 위미의 수평선, 쇠소깍의 고요를 생각하며, 두려움과 연민이 어룽진 손으로 제주도민들께 편지를 씁니다. <작가, 제주와 연애하다>입니다. 필자 주
평화는 평화로 살게 놔두라
캔 커피를 하나 사 들고 바위와 파도의 경계쯤에 앉았습니다. 지난밤 평화는 평화로 살게 놔두라고 악쓰듯이 노래했던 방파제 앞 공터가 바로 옆에 있습니다.
베트남 시인 탄타오를 알면서 그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탄타오 시인이 선한 눈매를 끔뻑이며 조심스럽게 강정의 평화를 이야기할 때서야 수만 년 평화로만 살았던 구럼비가 학살당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군대보다 더 무섭고 치졸하기 이를 데 없는 공권력으로 사람들을 패대고 잡아 가두고 바위의 심장을 파헤쳐 낙인보다 깊은 괴말뚝을 박아대는 일이 탄타오가 몸소 겪었던 베트남 전쟁 최대의 민간인 학살 밀라이 사건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애시당초 돈 많이 벌어서 좋은 일에 쓰시겠다는 분들의 얘기는 믿지 않았습니다.
예금통장이라는 곳간에 화폐를 잔뜩 쌓아둔 채, 때 되면 기부라는 말로 눈곱만큼 생색이나 내는 배짱이 내게는 없기도 하지만, 남의 것 뺏으면서 저지른 잘못이, 적선하듯 던져주는 나눔이란 말로 상쇄되기는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군사기지 만들어서 평화를 지키겠다니요. 남의 것 빼앗아 치부하는 것도 모자라 아예 작정하고 평화를 팔아먹는 자들 아니라면 그런 말 함부로 하기 어렵지요.
ⓒ노순택 |
커피를 몇 모금 마시고 나니 자박자박하게 파도의 속살들이 발가락을 간지럽힙니다. 내게로 오는 파도의 수를 세어볼까 하다가 금세 지쳐버리고 맙니다. 파도는 아주 일정한 간격으로 오고 가기를 반복합니다. 바다 속 깊은 곳으로 발을 뻗고 잠자는 구럼비가 들숨과 날숨을 뱉을 때마다 한 번씩 철썩대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90여 년 전 일제의 수탈에 맞서 싸웠던 잠녀할머니들도 나와 같은 파도를 맞았겠지요. 그 이전에 대양에서 조난당했던 서양 선교사 양반 중 누구는 이 파도에 떠밀려와 목숨을 구했을 것이고 그보다 훨씬 더 이전에 탐라국 아이들은 이 파도의 박자에 기대어 잠들었을 겁니다.
공사장 경계를 빙 두른 철판이 볼썽사납습니다.
음험한 협잡꾼들이 비밀모의 장소에서 자신들만의 귓속말로 공사를 진행하는 모양입니다. 애써 외면하려 하지만 이 협잡꾼들의 하늘까지 닿는 죄악이 사람들과 더불어 만대를 이어온 파도 소리까지 바꾸는 현장에 서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구럼비가 뒤척이는지 파도가 거세어집니다. 엄지발톱이 빠질 때처럼 싸리한 고통이 눈가에 맺힐 때 즈음 구럼비가 조용히 말하는 듯합니다.
"세상의 중심이 아픈 곳이라면 난 괜찮아요. 당신이 기억만 해준다면…"
나는 다시 일정하게 오가는 파도의 리듬에 맞추어 간밤에 불렀던 구절 하나를 떠올립니다. 평화는 평화로 살게 놔두라! 평화는 평화로 살게 놔두라!
이 편지에 동봉하는 사진은 시간이 날 때 봐 주시기 바랍니다.
평화를 빕니다.
ⓒ노순택 |
이지상 청년문예운동의 시기 거쳐 노래마을 음악감독. 민족음악인협회 연주분과장을 지냈고 다수의 드라마. 연극. 독립영화 음악을 만들었으며, "사람이 사는 마을", "내 상한 마음의 무지개", "위로하다. 위로받다", "기억과 상상" 등 앨범과 <이지상, 사람을 노래하다>(삼인 펴냄)라는 책을 만들었다. 라디오21(www.radio21.tv) '사람이 사는 마을' 진행. 지진피해조선학교와 함께하는 몽당연필공동대표. 인권연대운영위원.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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