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이집트 카이로대학 그랜드홀에 선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당신에게 평화가'라는 뜻의 아랍어 인사로 연설을 시작했다. 강당에 있던 3000여 명의 청중은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어 "신을 깨닫고 늘 진실을 말하라는 말이 있다"며 이슬람 경전인 쿠란을 인용했다. 자신이 무슬림 신자가 있는 케냐 가문 출신임도 빼놓지 않고 언급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연설 후반에 "세계 모든 사람들은 평화롭게 함께 살 수 있다"며 "우리는 신의 비전을 잘 알고 있고 이제 신의 뜻을 이 땅에 정착시키는 것이 우리의 일"임을 강조하면서 쿠란, 성경, 그리고 유대인의 탈무드에서 평화를 사랑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각각 인용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신의 가호가 당신과 함께 하기를 바란다"고 말하면서 무슬림 청중에 대한 친근감을 끝까지 표현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연설이 끝나자 청중들은 오바마가 퇴장할 때까지 기립박수를 보내며 '오바마! 오바마!'를 연호했다. 이런 반응은 카이로에 국한되지 않았다. 중동 각국과 이슬람권은 오바마의 이번 중동 방문과 카이로 대학 연설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이날 연설은 아랍권 대표 위성방송 <알자지라>, <알아라비야> 등을 통해 중동 대부분의 지역에 생중계됐다.
▲ 지난 4일 요르단 암만에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에서 한 팔레스타인 남자가 오바마 대통령의 카이로 연설을 텔레비전으로 보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
카이로대학 연설은 역사의 이정표
오바마의 이번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 방문에 대해 이슬람권이 큰 관심을 갖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로 분석해 볼 수 있다.
우선 이전 미국 대통령들과는 다소 다른 오바마의 노선이다. 그는 지난 해 대선 유세 때 "내가 당선된다면 취임 초에 이슬람 국가의 수도를 찾아가 연설하겠다"고 약속했다. 취임연설에서는 "무슬림권과 함께 나갈 새 길을 추구하겠다"고도 선언했다.
9·11테러 이후 악화된 미국과 이슬람권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제안이었다. 이슬람권과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면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전쟁을 일으키고 결과적으로 점령을 지속해 온 조지 부시 행정부의 강경노선과는 크게 다르다.
이를 반영하듯 지난 1일 여론조사기관 갤럽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아랍권 주요 11개국 중 이집트와 사우디 등 9개국 국민이 '미국의 리더십'을 보다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1년 전에 비해 대부분 10%포인트 이상 더 우호적이 됐다.
오바마의 이번 순방에는 또 전임 부시 행정부 시절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정이 있었다. 이슬람권에서 가장 큰 카이로대학 연설이다. 조지 W. 부시 등 많은 미국 대통령이 중동을 방문했지만 대학에서 강연을 행한 경우는 없었다. 독재정권을 유지하기에 급급한 친미 국가를 방문해 정상회담을 행하고 떠났다.
그러나 오바마는 사상 처음으로 중동의 일반인과의 소통을 시도한 것이다. 교수와 대학생 앞에서 미국의 입장을 설명한 최초의 미 대통령이었다. 패권국가로서의 거만함에서 벗어나 보통사람들과 접촉해 미국의 대이슬람권 화해의 손짓을 명확히 표현했다.
카이로대학 연설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이슬람권을 달래는 발언을 주저하지 않았다. 미국과 이슬람권과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고 수 차례 강조했다.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과 싸우는 것을 미국의 국가수반으로서 나의 책무"라고 역설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대(對)테러전을 지속하는 것이 경비와 정치 차원에서 어려운 문제"라며 "미국 정부는 아프가니스탄에 자국군을 영구 주둔할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이 별개의 독립된 국가로 공존하는 길만이 유혈사태를 종식시키는 유일한 길"이라며 이-팔분쟁의 해법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언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어떤 국가도 다른 나라에 자국의 체제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며 부시 행정부가 추진하던 '대(對)중동 민주화구상'을 사실상 철회했다. 이른바 미국식 민주주의를 전세계 각국에 강요하지 않겠다는 메시지였다.
사우디와 이집트는 '늘 가던 곳'
이 때문에 오바바의 이번 중동 순방은 긍정적인 측면이 적지 않다. 부시 행정부의 강경일변도 노선과는 상당히 큰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런 오바마의 행보가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우선 방문 국가를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로 선택한 것부터 기존의 미국 지도자 방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두 나라는 중동에서 가장 중요한 나라들이다. 막대한 원유 매장량을 가진 사우디는 중동 경제를 대표하고 이집트는 전통적인 정치와 문화대국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두 나라는 미국의 전략적 우방이다. 중동의 대표적인 친미 독재정권이다. 예전에도 많은 미국 지도자가 빼놓지 않고 방문한 나라들이다. "오바마가 진정으로 중동 내 여러 사안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전향적인 자세를 가졌다면 팔레스타인, 시리아, 이라크, 그리고 더 나아가 이란을 방문했어야 한다"고 범아랍 일간 <알-쿠드스 알-아라비>는 4일 지적했다.
이런 회의적 시각의 이면에는 이번 중동 순방도 형식적인 방문에 그칠 것이라는 여론이 있다. 오바마는 이번 방문에서 이-팔 평화협상, 이란 핵 문제, 아프간 안정화, 테러 방지 등을 안건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이 중 뚜렷한 결론을 낼 수 있는 주제는 거의 없다.
60여년이나 지속된 이-팔 분쟁을 오바마가 단시간 내 해결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핵무기가 아닌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겠다는 이란의 움직임을 막을 명분도 약하다. 8년째 점령을 지속하고 있는 아프간 사태도 외국 군대의 군사작전이라는 해법으로는 한계가 있다.
마지막으로 이런 사안이 해결되지 않은 채 테러를 막겠다는 미국의 전략이 성공할 가능성도 높지 않다. 알카에다가 "오바마도 부시와 마찬가지"라는 비난성명을 이번 순방에 맞춰 내놓은 것도 이를 반영한다.
▲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 3일 사우디의 압둘라 국왕을 만나고 있다. 오바마가 방문한 중동 국가는 결국 친미 독재국가였다. ⓒ로이터=뉴시스 |
에너지-군수-이스라엘 로비세력 이길 수 있을까?
중동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미국 대통령도 그리 자유롭지는 못하다. 미국 내 다른 국내외 사안에서 현재 오바마가 보수와 진보사이에서 자리매김하기 어려운 것과 일맥상통한다.
특히 중동의 사안에 대한 미국 내 보수파의 입김이 너무 강하다. 미국을 움직이는 3대 로비세력, 즉 에너지, 군수, 그리고 이스라엘 로비세력은 모두 중동과 깊이 연관돼 있다. 안타깝게도 이들 모두가 극보수 성향이다.
이라크와 아프간 전쟁과 점령 그리고 이란 봉쇄 전략 모두 중동의 석유 및 가스를 장악하려는 에너지 로비세력이 배후에 있다.
미국의 무기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나라는 사우디이고 지역은 중동이다. 중동이 평화롭게 된다는 것은 수요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동이 '화약고'로 수십 년 동안 남아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비교적 쉽게 벌어들인 오일달러가 미국 무기에 대한 확실한 구매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철수하라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 점령지를 유지하고 있고,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불법이라는 판결을 받은 '분리장벽'을 계속 건설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막무가내' 정책의 배후에도 강력한 유대인 로비세력이 있다.
오바마가 미국 경제와 정치를 좌우하는 이들 로비세력에 대항할 수 있을지에 대해 미국 학자들조차 '그렇지 않다'라고 답하고 있다.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가 3일 "미국이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 간의 충돌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오바마의 모든 말은 그저 '수사(修辭)'에 그칠 수밖에 없다"고 분석한 것도 이런 배경을 고려해서다.
결국 오바마의 순방이 가시적인 효과를 얻기는 힘들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중동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보다는 자신의 대선 공약을 지키는 제스처라는 비난 섞인 중동의 반응도 있다. 한편으로는 6월에 예정된 이란 대통령 선거와 레바논 총선을 앞두고 이들 국가의 표심에 영향을 미치려는 정치적 고려도 깔린 것이라고 풀이하는 중동 언론도 있다.
중동의 여러 문제는 해결이 쉽지 않다. 미국 대통령 한 사람이 해결하기에 벅찬 것들이다. 미국 정치경제의 구조적인 문제와도 연계돼 있기 때문이다. '비정상적인' 혹은 '미친' 미국 대통령이 나와야 중동 사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비아냥거리는 중동 지식인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오바마가 비정상적인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재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그에게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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