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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은 없었다"

[정치경영연구소 유럽르포]<1> 영국, '저녁이 있는 삶'이 가능한 이유

'정치경영연구소의 유럽르포'는 우리 시민들로 하여금 유럽의 정치사회와 경제사회에 친밀감을 갖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기획된 연재물입니다.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이유 등으로 인해 우리 사회는 해방 후 지금까지 지나칠 정도로 미국 편향적인 모델을 지향해왔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신자유주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있는 시점에 즈음하여 우리 시민들도 이제 새로운 모델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건설이 시대정신으로 떠오른 것이 그 증거입니다.

경쟁과 성장 그리고 효율성의 가치만을 강요해온 과거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연대와 분배 그리고 형평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고자 하는 노력들이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정치경영연구소는 우리 시민들이 이제 미국이 아닌 유럽사회를 유심히 관찰해보길 원합니다. 특히 유럽의 합의제 민주주의와 조정시장경제가 어떻게 그곳 시민들의 삶을 그토록 느긋하고 여유롭게 만들어주었는지 자세히 살펴보길 바랍니다.

'유럽르포'의 작성자들은 현재 유럽의 여러 대학원에 유학 중인 정치경영연구소의 객원 연구원들입니다. 투철한 문제의식으로 유럽을 배우러 간 한국의 젊은이들이 보고하는 생생한 현지의 일상 생활을 <프레시안>의 글을 통해 경험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유러피언 드림'을 같이 꾸길 염원합니다. 필자 주

영국, 첨단 자본주의의 나라?

2008년 가을, 결혼 넉 달 만에 가방 두 개 달랑 들고 영국에 왔다. 생면부지의 나라에서 인터넷 직거래 사이트에 의존해 2주 만에 겨우 흑인 싱글맘 집에 방 한 칸을 세 들었다. 그렇게 두 달이 채 안 된 12월 초겨울의 어느 저녁, 집주인은 우리에게 자신의 해고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새 직장을 구하기 위해 당분간 다른 도시로 이사할 계획이라며, 우리에게도 다른 집을 알아볼 것을 권했다. 미국 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시작된 불황이 영국을 덮치는 순간이었다.

아마도 어떤 나라와 그 나라 사람들을 알려면 호황기보다는 불황기에 살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2차 대전 이후 최대 불황이라는 2008년부터 지금까지 영국에 살고 있다. 여기에 기록된 것은 그동안 겪은 몇 가지 일들에 대한 기억과 단상이다.

해고로 자살하지 않는 나라

불황으로 잘린 것은 우리 집주인만이 아니었다. 동네마다 가게들이 몰려 있는 번화가를 하이스트리트(High Street)라고 하는데, 그 중 몇 집 걸러 하나씩 큰 체인점들이 문을 닫았다. 이 해 겨울부터 다음해 여름까지만 약 9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 영국 런던 하이스트리트에 위치한 한 가게. 가게 문을 닫고 이용객들에게 '폐업'을 알리는 공고를 붙였다. ⓒ이관후

실업자 수가 1년 만에 두 배가 된 사회. 당연히 한국의 97년 상황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 부조, 정치와 시장의 혼란, 정리 해고로 인한 가정의 붕괴, 그리고 극심한 노사분규. 영국 사회도 동요하는 듯 보였다. 실제로 2008년 당시 정치적 이슈 중의 하나가 IMF 구제금융을 받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으니 국가적 위기감은 상당했다.

평소 160만 명이던 실업자는 불과 1년 만에 250만 명으로 늘었고, 2011년에는 270만 명에 육박했다. 같은 기간 실업수당을 받는 사람도 80만 명에서 160만 명으로 두 배 늘어났다. 이런 추세는 2012년 현재까지 4년째 계속되고 있고, 지금도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와 같은 사회적 대혼란은 벌어지지 않았다. 해고당했다고 자살하는 사람들도 없었다. 해고 때문에 생계가 중단되는 일도 없었다. 잘 갖추어진 사회보장 시스템이 이들을 감당했다. 영미식은 몰라도, 영국식 신자유주의는 우리 입장에서는 환영할만한 것이었다. 복지 있는 신자유주의는 국민들을 버티게 했다. 그리고 그 복지의 정도는 용돈 수준과는 차원이 달랐다.

가령 80년대 석탄 합리화 정책으로 탄광이 폐쇄된 뉴카슬시의 경우, 전체 주민의 50%가 보조금(benefit)으로 생활한다. 두 명의 아이를 낳으면 부모 모두 일하지 않아도 살림을 꾸려 나갈만하고, 네 명을 낳으면 상당히 여유 있는 생활이 가능하다.

실업수당뿐 아니라, 집세를 낼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주택보조금(Housing benefit)이 지급되었다. 굳이 다른 지역으로 이사할 필요도 없다. 지금 사는 곳에서 사람 숫자에 '필요한' 집을 계약하면 국가가 그 월세를 낸다. 아이들 대한 보조금(Child benefit)도 따로 나온다. 저임금 노동자에 대한 보조금, 연로 보조금 등등 다양한 국가 보조금이 '영국식 신자유주의' 뒤에 버티고 있었다. 불황이 직접적인 이유가 되어 자살하는 사람은 없었다.

▲ 지난해 7월 영국 런던 북동부 리밸리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열린 런던 올림픽 개막식 모습. 영국은 국가 무상의료 시스템을 개막 행사의 주요 퍼포먼스로 연출했다. ⓒ연합뉴스

불황이 닥쳤다고 해서, 아픈 사람이 돈이 없어서 병원을 나와야 하는 일도 없었다. 지난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수백 개의 병상이 운동장을 가득 메운 장면을 보신 분들이 있을 것이다. 첨단 자본주의의 나라 영국이 자랑하는 NHS, 국가 무상의료 시스템이다. 물론 느리고 관료적이라는 비판을 피해 가기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아픈데 돈이 없어서 치료를 못 받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짧게는 수년에서 길게는 수십 년간 일하지 않고도 꽤나 여유롭게 사는 사람들 얘기를 한국에서 종종 해외토픽으로 접하게 되는데, 실은 그 해외토픽은 복지가 잘되어 있다고 알고 있는 북유럽이 아니라 대체로 항상 영국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불황 속의 영국은 한국의 1997년과는 달랐다. 여기서는 사람이 죽지 않았다.

첨단 자본주의에서 국유화라니

2008년 겨울과 다음해에 이르는 동안 뉴스의 첫 번째 꼭지는 늘 은행이었다. 우리의 9시 뉴스에 해당하는 10시 BBC 뉴스의 첫 화면에 재정 위기(Fiscal Crisis), 공적자금 투입(Bail Out) 다음으로 등장한 단어는 놀랍게도 국유화(Nationalization)였다. 아니, 국유화라니. 저건 사회주의도 아니고 공산주의에서나 쓰는 말이 아닌가.

그러나 그 단어는 노동당은 물론이고, 자유민주당에게 거리낌 없이 사용되는 용어였고, 보수당과 주류경제학자, 은행가들조차 선호하는 대안 중 하나로 진지하게 고려하는 선택지였다. 실제로 8개 주요 은행에 대해 정부자금이 투입되자, 언론과 정치권은 누구도 정부의 지분참여 같은 애매한 용어를 사용하려고 굳이 애쓰지 않았다. 그것은 분명히 '부분적 국유화'였다.

▲ 2008년 10월 13일 자 <가디언> 경제면이다. '국유화'를 뜻하는 'Nationalisation'이라는 제목이 눈에 띈다. "국유화 또는 붕괴"라는 제목의 기사는 "은행 국유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를 위해 '은행을 어떻게 국유화할 것인가'와 '은행들이 정부 기관에 인도되거나 관리를 받을 수 있는 전략이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가디언> 홈페이지


이 첨단 자본주의의 나라에서 어떻게 국유화라는 말이 저렇게 쉽게 사용되고 또 실행될 수 있는가, 경악을 금치 못하던 나는 어느 날 한 은행가가 제법 비통한 심정으로 이를 해석하는 장면을 보고 이해하게 되었다. "자본주의란 돈을 낸 사람이 소유권을 갖게 되는 시스템입니다. 국가인지 개인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명쾌했다.

일주일 만에 은행의 주가가 50%씩 떨어지는 상황에서 그들에게도 별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토록 비난하던 시장에 대한 국가개입을 정작 자기들이 어려울 때에는 언제든지 '얼씨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주류 경제학의 비열함도 엿보였다.

그러나 그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영국인들이 가진 사고의 유연성, 혹은 영국 자본주의의 합리성이 만만치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더불어 당시 한국에서 '오륀지'로 시작된 실용주의 논란과 관련해 우리가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IMF 이후의 한국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금융과 자본주의 전반에 대해 국가 통제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영국에서는 분명해졌다.

그게 누구든 돈 낸 사람이 주인인 자본주의, 통제가 필요한 자본주의, 이것이 영국의 실용적 자본주의인가, 나는 당황하고 있었다.

불황을 이기는 교육, 그리고 양파

우리도 어쨌든 집을 나가야 했다. 평소 1파운드당 1700~1800원대이던 환율은 어이없게도 2400원까지 치솟았다. 지금은 다시 1700원대이니 당시의 환율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는지. 막연한 어학연수 중이었던 우리는 당사국에는 미안한 말씀이지만, 영국이 폭삭 망하기만을 바랬다. 환율이 정상을 찾지 않으면 유학이고 뭐고 짐 싸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영국이 망하기 직전인데도 환율은 떨어지지 않았다. 한국 쪽에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급히 한국 언론기사들을 검색했다. 원인은 두 가지였다.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경제 성장률을 제시한 대통령 공약의 이행을 위해 강한 수출 드라이브를 거느라 원화를 죽어라고 평가절하해 놓은 것이었다. 또 하나, 한국은행이 외환 보유고에 지나치게 많은 영국 파운드를 갖고 있었다.

설상가상, 우리가 어학연수 중이던 캠브리지의 집값은 영국 전체의 집값이 곤두박질치는데도 전혀 요동도 하지 않았다. 우선, 인구의 3분의1이 교수, 학생, 연구원 아니면 대학과 관련된 직업을 갖고 있는 곳이라 불황의 여파가 적었다. 사실 졸업생이 나가면 신입생이 들어오는 도시 구조상 집값이 떨어질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지속적인 집값 상승에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결혼하고 삶의 터전을 마련한 연구원들이 캠브리지를 떠나기 싫어해서 오히려 세계 유수의 연구소들이 계속 몰려드는 판이었다. 그 해와 이듬해, 캠브리지와 옥스퍼드는 영국 전체의 집값이 폭락하는 가운데, 소폭의 집값 상승을 기록했다. 탄탄한 교육의 전통과 시스템이 불황을 이기고 있었다.

우리는 별수 없이 한 사람이 서면 한 사람이 누워야 하는 좁다란 방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떨어지지 않는 환율을 원망하며 피똥을 싸며 버텼다. 영국은 프랑스나 독일보다 위도가 훨씬 높은 섬나라라 겨울이면 거의 모든 채소를 지중해에서 수입해야 하고 가격도 두 배 가까이 오른다. 우리 형편에 채소는 사치였고, 몇달 간 섬유질 섭취를 못하다 보니 혈변이 시작된 것이다.

급한 대로 양파를 사다가 까먹었다. 눈물이 났다. 매워서 나는 눈물인지 슬퍼서 나는 눈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해 한국에서도 수출 대기업들은 잔치를 벌였겠지만, 덕분에 물가는 턱없이 올랐다. 국내에서는 성과급 없는 비정규직과 서민들이 고통을 겪었을 테고, 해외에서는 유학생이 죽어나고 있었다.

눈이 오면 쉬는 나라

올 겨울에는 비만 주룩주룩 내리는데, 그해 겨울에는 눈도 참 많이 왔다. 한 번 왔다 하면 수십 센티씩 쌓였다. 영국 사회가 마비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다. 눈이 올 때와 교사들이 파업할 때.

첫눈이 펑펑 왔을 때, 아내와 나는 여러 번을 나동그라져 가며 학교에 갔다. 그런데 10시, 11시가 넘어도 선생들이 오지 않았다. 비싼 수업료 때문에라도 한 시간이 아까운 터다. 어학센터의 리셉션에 따지러 갔다. 모두들 태연하다.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선생들이 오지 않았단다. 그건 나도 안다. 그런데 주로 화를 내는 건 동양계 학생뿐이다. 조금 있으니 담당자가 사정을 눈치챘는지 교실에 와서 설명을 한다.

오늘 눈이 많이 와서 우선 버스들이 거의 안 다닌다. (나중에 알았지만,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버스 기사들이 출근을 못하거나 안 해서. 둘째, 위험을 이유로 버스 기사들이 좀체 운전을 하려고 들지 않는다. 회사도 그러려니 한다) 게다가 대부분의 초중등 학교들이 휴교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으니 부모들인 교사들이 출근할 수 없는 것 역시 당연하다. 그럼 눈 속을 뚫고 학교에 온 우리들은? 그러게, 너희는 훌륭한 학생이다.

그제야 알았다. 영국은 폭설이 내리면 회사 앞 찜질방에서 자더라도 출근을 해야 하는 곳이 아니었다. 게다가 눈이 조금만 많이 와도 안전사고를 두려워하는 학교들은 곧잘 휴교를 한다. 이렇게 되면 아이를 누구한테라도 맡기고 출근을 강행하느냐. 역시 그런 일은 거의 벌어지지 않는다. 아이가 학교를 못 가면, 부모들은 출근할 수 없다. 16세 미만의 아동을 보호자 없이 방치하는 것은 중대한 범죄다. 이렇게 눈이 좀 많이 오면, 영국은 온 국민이 쉰다.

그 다음해에는 눈이 더 많이 왔는데, 이번에는 우리도 허둥대지 않았다. 세상은 멈췄다. 교통, 학교, 회사 이런 식으로 연쇄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다. 급한 것은 없었다. 눈이 오면 세상이 고요했다.

교사들이 파업할 때도 비슷한 벌어지는데, 한마디로 눈이 많이 오거나 교사가 파업하면 사회가 잠시 쉬어가는 것이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베이비시터를 구하든지 해서 어떻게든 출근하겠지만, 대부분의 직장인들에게는 어지간하면 모든 것이 용인(Excuse)된다.

저녁이 있는 삶

영국인들의 일상적인 출퇴근 시간도 한국 사람이 보기에는 아주 가관이다. 금융회사나 법률 사무소 같은 치열한 직장 몇 곳을 예외로 하면, 9시 출근에 6시 퇴근은 기본이다. 그리고 실제로는 6시에 퇴근하지도 않는다. 만약 이 사람들이 6시에 퇴근한다면 5시 30분부터 버스와 전철에 사람이 그렇게 들어찰 리가 없다. 궁금해서 관리직에 계신 한 교민에게 물었다.

"평사원이나 하위직 종사자들은 5시가 넘으면 퇴근 준비를 하고, 5시 30분쯤 되면 거의 자리를 비운다. 6시가 퇴근 시간이라는 뜻은, 아마도 6시면 회사에 아무도 없다는 뜻일 거다."

그런 거였다. 실제로 6시 이후에 회사에서 사고를 당하면 산재가 안 되니까 회사에서도 강요할 수단이 없다. 이 6시 퇴근은, 위도가 높아서 해가 급격히 짧아지는 겨울이 되면 한 시간쯤 앞당겨진다.

▲ 영국의 가게들은 오후 5시면 대부분 문을 닫는다. ⓒ이관후
그러고 보니, 이런 출퇴근 관념은 큰 회사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 와서 며칠 안 되어 동네 재래시장에 구경을 갔다. 보통 여는 시간이 오전 10시에서 오후 5시다. 다른 곳을 구경하다가 늦어서 딱 5시에 도착했다. 시장을 둘러보니 태반은 벌써 짐 싸서 퇴근했길래 되레 잘 됐다 싶어 남은 가게들을 기웃거렸다. 우리 같으면 '막판 떨이' 일 테니 뭐든 좀 싸지 않겠는가. 그래서 큰맘 먹고 제일 싸 보이는 물건을 하나 집어 들고는 가격을 물었다. 불호령이 떨어졌다.

"지금 가게 걷고 있는 거 안 보이냐? 그거 당장 제 자리에 놔두고 썩 꺼지지 못해!"

영국인들은 참 괴팍하기도 하구나 생각했다. 영국은 재래시장이 더 정이 없구나 했다. 착각이었다. 며칠 지나 다른 가게에 들렀다. 이번엔 혼나지 않으려고 문밖에 쓰인 영업시간을 잘 살폈다. 아직 20분이나 남았다. 그런데 웬걸, 분명히 안에 불도 환하고 손님도 여럿 있는데 문이 안 열린다. 문이 뭐가 잘못되었구나 싶어 잡고 흔들었다. 기대했던 대로 안에서 가게 종업원이 나왔다. 뭐하는 짓이냐고 묻는다. 웃는 표정을 지으며 설명했다. 문이 잠겨 있다. 열어 달라. 그랬더니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붙어 있는 시간표를 가리킨다. 그래, 아직 20분이나 남았잖아. 거기서 문을 몇 번 더 흔들다가 결국은 알아들을 수 없는 영국 욕만 실컷 먹었다.

나중에 알았다. 보통 가게들은 15분, 20분 전이면 종업원이 문을 잠그고, 안에 있는 손님들을 하나씩 내 보낼 때만 문을 열어준다는 것을. 영업시간이 6시까지라면, 그 시각은 종업원이나 주인이 가게 불을 완전히 끄고 문을 잠그고 퇴근하는 시간이었다.

비슷한 일이 식당에서도 있었다. 한국에서 온 기관과 기업인들의 가이드를 며칠 한 적이 있다. 오전 일정이 조금 일찍 끝나서 식당에 한 15분 미리 도착했다.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그때는 나도 영국을 조금 이해하던 때라 이런 일이 종종 있다고 설명했지만, 한국 손님들은 식당으로 전화를 걸어보란다.

전화로 매니저에게 사정했다. 우리가 조금 일찍 도착했는데, 음식이야 제시간에 나오는 것이 정상이니 그냥 의자에 앉아만 있겠다. 그런데 이 매니저는 의외로 친절하게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쨌든 절대 안 된단다. 손님이 한 발짝이라도 식당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직원들에게 시간 외 수당을 지급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데도, 일행은 식당 처마 밑에서 서서 꼼짝없이 기다려야 했다.

'영'미식 자본주의?

영국은 내가 생각했던 첨단 자본주의 국가와는 조금 달랐다. 흔히 우리가 부르듯 '영'미식 신자유주의를 떠올려 보면, 미국보다 더 앞에 나오는 영국의 자본주의는 극단적 경쟁 속에서 사람들을 끝까지 쥐어짜야 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사상 최악의 불황이라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저녁이 있는 삶을 중요시했다. 국유화는커녕 공공이라는 말만 나와도 빨갱이로 몰려야 할 것 같은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해고가 한창일 때도 사람을 더 뽑지 못해 안달인 곳도 있었다. 첨단 자본주의의 나라에 공산주의적 국가무상의료가 버티고 있었다. 영미식은 몰라도 영국식 신자유주의에는 분명히 믿는 구석이 있었다.

불황기를 영국에서 보내면서 문제는 영미식 신자유주의나 영국식 신자유주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한국식 신자유주의인 듯했다. 영국이 신자유주의의 실패에서 다시 일어나는 힘은 복지에 있었다. 복지 없는 신자유주의의 실패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그것이 지금 우리의 현재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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