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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감과 망각의 현실, 분단을 직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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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감과 망각의 현실, 분단을 직시한다

[김상수 칼럼] 독일화가 요하네스 헤이시크(Johannes Heisig)와의 만남

권력에 중독된 자들의 위태로운 착란

독일 분단의 어제상황과 분단의 장벽, 그리고 인간의 자유를 그림으로 그리는 독일화가 요하네스 헤이시크(Johannes Heisig)를 만나러 가는 날 아침, 나는 지독하게 우울했다.

국가 공권력인 경찰이 동원되어 철거시민들을 불태워 죽인 한국에서 들려온 용산참사 소식은 너무나 참담했다. 같은 땅에 살면서 제 동족을 불길에 처넣어 죽인 권력의 폭압을 나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 무한권력을 추구하는 재벌들의 욕망에 정권이 나서서 공권력까지 동원시켜 제 동족을 처 죽인 이유란 도대체 뭔가. 결국은 금력과 권력이 한 통속이란 얘기다.

멀쩡하게 생업을 하고 살던 터를, 재개발이란 명목으로 갖은 회유와 공갈과 협박으로 빼앗으려는 일방의 힘에 시달리고 시달리다가 망루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던 철거시민들은 참혹한 주검으로 변해야 했다. 공권력은 어느 순간부터 제복 입은 '깡패'였고 용역 '깡패'들 뒤에서 철거시민들을 도시 테러리스트들이라 부르면서 '작전'을 감행하게 한 부정한 권력자들의 정체는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들이다.

이명박 권력이 이들 철거시민들의 죽음 앞에 법질서나 법치 운운한 사실은 인간을 끝까지 능멸한 처사에 다름 아니다.

이제 이쯤이면 이 정권의 운명이란 그 본질에서는 이미 거의 끝나가고 있는 집단의 정권임을 뜻한다.

설사 이명박 집단이 어렵사리 권력을 유지한다하더라도 그런 권력은 이미 시체(屍體)의 권력이다.

인간의 정의와는 거리가 먼 법치나 법질서란 광포한 권력의 탈선적인 허울뿐임은 이제 다 아는 사실이 됐다. 오직 자기들 소수 기득권층의 이익만을 확대하고 지키기 위한 법 집행이란 '죽은 법'의 현실이다.

다시 말한다,
공권력을 빙자하여 동원된 폭력으로 이명박은 법질서를 말하면서 같은 동포를 죽였다.
이는 미친 권력에 중독된 자들의 위태로운 착란, 그 자체다.

대중의 오해들, 히틀러와 구동독체제 그리고 이명박

히틀러 나치당은 1932년 선거에서 원내 제 1당이 되면서 이듬해에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히틀러를 수상에 임명하게 된다. 히틀러는 수상이 되자마자 국가의 전 기관을 장악하고 괴링을 통해 프로이센의 경찰력을 완전하게 손아귀에 쥐었고 곧이어 방송망까지 장악함으로써 독일 사회의 공권력을 완벽하게 틀어쥔다.

그리고 나치 몰락 이후 독일은 동·서독으로 분단이 됐고, 동독의 사회체제는 소련 스탈린식 변종 사회주의를 이식해 정권 초기부터 동독정권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정치범으로 몰아 처형하거나 투옥했다.

오늘 한국이 새삼스럽게 네 편 내 편 만들기에 혈안인 것처럼 과거 독일의 나치와 동독 정권은 독일 시민들을 편 가르기로 억압했고 테러를 자행했고, 모든 요주의 인물들의 활동을 감시했으며 법을 빙자하여 무차별 체포했다. 나치의 사법부나 동독의 사법부는 정치권력에 철저하게 야합하는 결과로 판결을 했다. 의사표현은 자유롭지 못했고 기본적 인권은 보장되지 않았다.

지금 한국의 정치 사회상황이 나치 정권의 등장과 몰락, 그리고 동독 전체주의 사회의 과거 모습을 여실하게 내다보는 듯하다. 시대를 거슬러 한참 거꾸로 나가고 있는 한국의 현실이다.

공작(工作)과 마타도어, 언론의 봉쇄와 장악을 통한 여론 조작과 물 타기, 경제 살리기의 위장을 통한 특정 소수 집단만의 재산증식, 정의와 상식이 궤변과 법치를 앞세운 억압에 속수무책인 오늘의 현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합법적으로 등장한 이명박이 설마 지난 20년간 어렵게 지키고 가꾸어온 우리사회의 체제인 민주주의 체제까지야 후퇴시키겠는가 하는 억지 믿음이나 국민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등 최초로 자유민주주의적 이념을 도입한 바이마르 헌법(Weimarer Verfassung)이 역시 합법적으로 등장한 히틀러 등에 의해 설마 무너지기야 하겠느냐는, 당시 독일 지식인 사회의 막연한 기대와 무기력, 그리고 공산 사회체제의 동독이 인간의 기본권까지야 박탈하지 않을 것이라는 허망한 기대 등의 공통점은 그야말로 '대중의 오해들'에 기초한 것임이 드러났다.

이 오해는 히틀러나 구동독체제의 정권이 독일인들의 삶을 책임지기는커녕 도리어 철저하게 독일인들의 삶을 파괴시켰음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리고 이명박이 마치 우리들 삶의 현실을 개선시킬 것이라는 대중의 기대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었는가는 지난 1년의 이명박 집권과정에서 이미 드러났듯이, 대중의 오해를 불러일으키도록 방치한 지난 시간의 그 폐해가 너무나 크고 깊다.

미친 권력의 질주를 허락한 사회적 공모

여기 독일의 과거 역사에서 나치의 등장은 대안 정치 세력이 없던 독일의 혼란스런 정치상황과 경제공황으로 실업난에 빠졌던 당시에 '경제 살리기'를 구실로 합법적으로 집권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마치 이명박이 경제를 살린다는 슬로건으로 지난 대선에서 투표 참여자들의 막무가내 지지로 권력을 차고앉은 현실도 이와 비슷하다.

독일 나치정권에 부역한 지휘자들, 그리고 히틀러에 공모(conspiracy)했던 당시 독일 사회란 한마디로 '미친 사회'였다.

그래서 통일독일은 오늘 이 시간까지도 당시 독일 사회 일반의 공모를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늘의 독일은 인간과 인류에 저지른 과거 범죄 사실들에 대해서 낱낱이 살피고 파헤친다. 이게 역사와 관계하는 방식으로 독일의 오늘이다.

우리도 이명박을 합법적으로 등장시켜 헌법질서가 파괴되는 미친 권력의 질주를 허락한 사회적 공모에 대해서는 제대로 현실을 직시하고, 지금 '오늘의 한국'을 '청산'할 수 있도록 시민들은 눈에 불을 켜고 반드시 기억하고 응징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 한다.

왜 오늘을 '청산'할 준비를 해야 하는가?

민족을 배반했던 친일파들을 숙청하지 못했고 지난 100년간 가렴주구로 제 백성을 노략질하는 무리들의 한 판 세상이 줄곧 이어졌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그리고 이명박의 등장이란 지난 백년 역사 퇴행의 결과들이 그대로 이어져 판을 떨치는 오늘 현실이다.

여기 유럽에서 스페인을 보자, 과거는 과거일 뿐이고 프랑코 독재시대의 모든 것들을 잊어버리자고 과거의 뚜껑을 열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과거 사건들을 마구 덮었다. 이게 오늘 날 스페인 사회의 깊은 사회 앙금이 됐고 사회적 분열과 반목은 일상사가 됐다.

그러나 통일 독일은 과거사를 재조명하고 청산하자는 접근 방법으로 과거문제에 적극 나섰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제대로 살피는 데 있어서 나치 정권 때 뿐만이 아니라 이후 구동독의 체제에서 벌어진 반인권의 문제까지 살핌으로써 보다 더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민주주의를 제대로 지켜낼 수 있다는 생각에서 독일인들은 과거를 끈질기게 청산해 내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현재는 과거의 문제는 고사하고 오늘 21세기 현재의 시간에 20세기 어두웠던 인간들의 시기로 줄곧 내달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지키고 가꾸어야 할 자유민주주의 체제란 특정 개인이나 특정집단의 맹목적인 이권 추구를 알선하고 지켜주는 체제를 말함이 아님을 뚜렷하게 알아야 한다. 민주주의의 체제란 같은 공동체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인간적인 자존과 위엄을 보장하는 체제가 민주주의 체제다. 그래서 용산 철거시민들 또한 절대 억울하게 죽거나 다치게 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따라서 국가는 사회 일부에서 요구하는 지나친 탐욕과 맹목적인 이기주의의 추구를 여하히 억제할 수 있는가 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동기의 세계 경제현실로부터 세계시장의 횡포를 어떻게 막아내는가에 그 기본적인 역할이 주어져있다. 그런데 도리어 반대로 가고 있다.

한시적이지만 국가의 정부를 수임 맡은 정권이 도리어 뒤죽박죽 문제를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경제 시장을 나서서 교란하며 민주주의 체제까지 근본으로부터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국민들은 이제 똑바로 제 정신으로 사태를 알아차려야만 한다.
얼마나 더 많이 고통을 받아야만 이 고통을 끝장낼 수 있을 것인가를 스스로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제 동족의 불행과 절망에 빌붙어 배터지게 먹고사는 이 '양아치들의 세상'을 어떻게 끝을 낼 수 있는가를 자꾸 따지고 되물어야 한다.

기득권 세력들이 보수의 옷으로 참칭(僭稱)하고(필자의 글-보수란 무엇인가? <프레시안>) 대를 이어 금권을 누리고자 획책하는 비루한 욕망 앞에 민은 얼마나 더 주눅이 들어 정처 없이 혼돈으로 내몰려야만 하는지를 이젠 국민 일반이 나서서 자각할 수 있어야만 한다.

국가 분단의 여파와 크고 작은 사회적 분란과 분단 인식

그 용산참사가 일어난 바로 다음 날 아침에 나는 옛 동, 서 베를린 접경에 사는 동독출신의 화가 요하네스 헤이시크를 만나러 갔다.

화가의 안내로 화실에서 불과 이백여 미터쯤 떨어져 있는 과거 동, 서독 베를린 분단의 장벽이 서 있던 자리를 알리는 경계선 표식이 땅바닥에 그려진 곳으로 걸어 나갔다. 동서독의 분단 장벽이 세워져 있던 그 곳에서 나는 인간과 인간을 강제로 격리시키고 핏줄을 갈라놓고 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던 무지막지한 분단 '장벽'의 흔적을 내려다보면서, 인간과 인간을 가로막는 '벽', '분단'이란 얼마나 참혹한 것이고 더구나 그것에서 파생되는 인간들 마음의 '벽'이란 얼마나 가공한 현실을 초래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나의 국가사회로 존재하여 왔고 같은 역사를 가진 국가사회가 갈라져 나눠진 지리, 정치 그리고 민족의 분단이라는 비극의 현실에서 분단이 유용한 정치적 책략으로 간주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정작 그것이 그 땅에 터전을 두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입장과 의미를 가져다주었는지, 그 결과와 영향을 지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분단이라는 것은 어떤 현실을 가져다주는지 우리는 정말 제대로 살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분단 현실 문제에 대해 오늘 날 우리 사회는 거의 둔감과 망각의 현실을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현실이다.

심지어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의 사회교육 현실은 우리의 젊은 사람들에게 마치 남북통일이 되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맞게 되고 남북의 경제는 '같이 망한다.'는 식으로 짧고 짐승스러운, 오직 돈만의 가치를 앞세우는 식이 되고 말았다.

8살 때 세워진 분단의 상징, 베를린장벽, 그 질곡으로부터

1953년생인 화가 요하네스 헤이시크는 동서 베를린을 가로막은 장벽이 세워졌을 때 8살이었고, 장벽이 철거되었을 때는 36살이었다고 했다. 그는 어느 세대도 자기 세대만큼 베를린 장벽이 삶에 깊숙하게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동독의 상황은 질곡이었다고 했다. 부모 형제가 하루아침에 동 서독으로 헤어져 살아야 했고, 강제적 이산과 억압, 감시와 처벌이 일상이었고 사회는 거대한 정신병동이거나 병영체제였다고 말했다. 89년에 장벽이 무너지고 8년이 지난 1997년이 되서야 본격적으로 장벽을 그림의 주제로 삼기 시작했는데, 그 이전까지는 베를린 장벽을 작품 주제로 삼을 수 있을 정도로 내면적인 거리감을 둘 수가 없었던 현실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감시와 처벌의 행동대였던 동독의 비밀경찰 슈타지(STASI)는 첩보와 정치사찰을 겸한 동독 정권 40년 이상을 지탱해온 동독 공산당의 핵심기관 중 하나였다. 1945년 소련의 점령당시 동독 공산당 간부였던 에리히 밀케가 세운 슈타지는 기구 설립 후 5년 동안 공산체제를 반대하는 9만5천명의 동독시민을 죽음으로 던져 넣었다. 80년대 말까지 각종 불법행위를 저질러온 슈타지가 드디어 1989년 분노한 동독 시민들에 의해 지방의 각 지부가 점령되면서 해체될 당시에는 9만1천명의 직원과 17만 명의 협력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슈타지는 88년 한 해 동안만 4500여건의 조작 사건을 만들고 시민들을 혐의를 씌워 처벌하면서 시민과 지식인 1만9169명을 조직적으로 감시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1990년 10월 독일 통일 후인 91년에는 '슈타지'의 문서보관소 문이 열리면서 1992년에는 독일연방의회에 동독의 사회주의 독재 진상조사위원회가 설치됐다.

동독 민중의 삶을 대변한 화가

화가 요하네스 헤이시크는 자신이 살았던 동독시절을 회고하면서 동독치하 그 시절에 정치적 억압은 아주 강력했지만 또 동시에 과중한 대중의 압력을 느껴야만 했다고 말했다. 당시 동독의 예술가들은 작품을 통하여 개인의 인권과 인간으로의 자존의 중요성을 대변하고자 노력했다고 말했다. 즉 개인감정에 대한 정당성이 집단주의보다 더 정당하다는 것을 자꾸 알리고자 노력했고, 이는 체제에 맞서는 용기를 필요로 했고, 당시 동독의 예술가들은 스스로를 개인주의를 변호하는 자들로 여겼다고 했다.

자유 60x80cm 2004/2005

실제로 대중들도 예술가들을 자신의 의사를 대변하는 사람들로 여겼다고 말했다. 대중들은 예술가들의 작은 제스처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고 했다. 예술작품에서는 신문에 등장하지 않았던 주제들이 다루어졌는데, 이를테면 공산주의 관료들의 공포정치, 지구의 환경오염, 청소년 폭력문제, 노인들의 고독감 등이 주제로 다루어졌다고 했다.

동독의 대중들은 예술가들로부터 공식 이데올로기였던 '행복한 사회주의 사람들'에 대한 진짜 실상에 대해서 토론하는 것을 기대했고, 그것을 은밀하게 촉발시켜야했었다고 했다. 이러한 점에서 예술은 모든 방면으로부터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여졌고, 때때로 너무나 고통스러울 정도로 심각하게 사회에 대해서 발언할 임무가 암묵적으로 주어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오늘의 예술가들이 장식가가 되기를 요구받는 시대라면 동독 시절의 예술가들이나 예술의 역할은 사회를 향해서 인간의 자유를 말하는 이들로 보다 훨씬 중요하게 취급받았었다고 말했다.

베를린장벽 1 70x120cm 2008

89년 분단장벽이 붕괴될 때까지 독일 민중들의 자유를 향한 갈망을 견인했던 동독의 예술가들은 시민의 연대에 앞장섰다고 했다.

흔들리는 삶을 그린다

동독시절 화가의 작업과 독일 통일 이후 자신의 작업에서 주제가 달라진 것은 없다고 했다. 통일 이후 또 다른 문제들과 대면해야 했는데, 그 문제의 상당부분은 아이러니하게도 통일 이전인 동독시절과 흡사한 문제들이라고 했다. 인간의 소외, 불안, 흔들리는 삶이 또 다른 사회체제 안에서도 여전히 문제였고, 초기 작품들이 보다 강력하게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면 요즘의 자신의 모티브들은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사회적 주변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그림에서 역사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인간의 모습을 동시에 보았다. 분단 독일의 모순과 현대사회의 혼란도 같이 보았다. 이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20년, 그의 회화의 주제는 앞으로 어떻게 진전될 것인가를 나는 물었다. 그는 답했다.

베를린장벽 2 80x135cm 2008

"당신이 옳게 지적한 것처럼, 나는, 내가 보는 그대로,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현실에서 작품을 창조하는 것을 시도한다. 앞으로 나는 나와 깊이 연관된 베를린 지역을 좀 더 집중해서 다루려고 한다. 내가 사는 지역은 베를린의 작은 지역으로, 크고 작은 문제가 일어나는 소우주 같은 곳이다. 나는 이곳을 한 사람의 화가로써 집중해서 관찰하고 바라보는 노력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런 그의 말은, 통일 이후 독일의 또 다른 사회적 변화 속에서 보이는 현상들에, 인간들의 실상에, 화가의 관심이 섬세하게 다가가고 있음을 나는 느꼈다.

오늘의 독일 사회는 한국이 당장 당면한 문제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많은 또 다른 사회적 문제들이 대두되고 있다. 인종 간 계층 간의 문제, 동 서독 주민들의 정서적 통합과 보다 실질적이고 광범위한 사회 문화 경제의 민주주의를 한층 더 발전시켜 나가는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폐단으로부터 인간의 사회를 지켜나가는 문제와 골몰하고 있으며 사람들의 삶에서 마음을 잃지 않고 인간의 마음과 삶의 환경이 어떻게 조화로울 수 있는가를 보다 나은 사회시스템의 변혁을 통해서 꾀하고자 시도하고 있다.

화가는 시대를 보는 시인(詩人)이자 촉수(觸手)

동독의 급격한 해체 이후 신도시 건설이나 재개발이란 이름으로 자본의 전횡으로 자신들의 이웃들 삶을 파괴하는데서 오는 사회적 분열을 경계하고 있으며 인간이 제대로 마음과 몸을 두고 살 수 있는 지속적인 공동체의 환경을 꾸준히 설계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거룩한 가족의 초상 1 53.5x39cm 2004
거룩한 가족의 초상 2 53.5x39cm 2004

오늘의 한국이 같이 터하여 살던 이웃을 자본의 힘들이 공권력까지 동원하여 파괴하는 일이란 이곳 독일에서는 상상할 수가 없다.

화가는 인간의 연대와 인간 사회의 반성을 촉구하는 촉수를 지닌 시인으로 독일 사회를 지켜보며 그림으로 그리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그가 생각하는 회화의 고유성과 새로운 가능성은 무엇인지를 질문했다.

"회화의 좋은 점은, 그 재료 자체에 더 이상의 새로움이 필요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나의 관심은 그와는 정반대에 있다. 유럽 회화의 오랜 전통과 연결하는 것, 이 점에서 더 이상의 발전은 있을 수 없다. 변화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림을 그리는 대상과 소재 면에서 변화일 것이다. 사회 정치적인 상황은 변하기 마련이다. 화가로서 나는 정확한 <눈(眼)>이 있어야만 한다는 믿음이 있다. 내 시대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작품을 창조하는 것이 내게는 회화의 테크닉이나 재료를 새롭게 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나는 화가가 아직 한국을 가 본적이 없다고 들었다.
화가는 한국을 아는가? 한국이란 나라는 화가에게 어떤 상상을 가져오게 할까?

요하네스 헤이시크

"나는 아직 한국에 가본 적이 없으며, 한국을 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아는 것이라곤 과거 독일처럼 한 국가가 두 동강난 곳이라는 것뿐이다. 이러한 분단은 극도의 긴장감을 초래한다. 북쪽 지역은 반드시 무너져 내릴 이데올로기로 꽉 막혀있다. 남쪽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은 짧은 기간에 놀라운 경제발전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한국의 전통문화와 현대 문화가 어떻게 접목되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에 관해 나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즉, 한국 사회의 경제성장이 어떻게 인간의 삶에서 조화를 지니고 있으며 사회 심리적으로 또 역사적인 정체성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이루어 나가는지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화가는 베를린 삶의 현장을 지킨다.

나는 그의 그림에서 사회적 실재와 인간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상상력의 허구를 같이 느낀다. 그의 그림은 강렬하다. 그리고 대담한 구도와 즉흥성도 엿보인다. 그러나 끈질기게 시대를 의식하는 리얼리즘의 정신을 화가는 놓치지 않고 있었다.

대담의 끝으로 나는 화가에게 회화는 당신의 미술표현에서 적절한 선택이었는지 질문해 보았다.

"나는 바로 내일이면 56세가 된다. 즉 40여 년간 그림을 그렸다는 말이다. 회화는 나에게 내 삶의 방식이고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장르라는 사실을 난 의심해 본적이 없다."

요하네스 헤이시크와 그가 사는 베를린 거리

화가가 사는 동서독 접경 구역인 서베를린 남쪽 지역은 터어키인 등 아랍인들이 독일인들과 이웃으로 밀집해 사는 지역이다. 오늘 독일의 현재와 베를린 삶의 현장을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는 현장이다. 그는 그 현장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화가와의 만남 이후 이메일을 통한 독일어 보충질문과 답을 번역해준 이설련 씨는 베를린에서 오페라 조연출로 활동하고 있다.)

베를린에서

(☞바로 가기 : 필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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