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우의 1985년작 단편 〈봄날〉에서 작중화자는 '어느날부터' 봄이 와도 그 정겹고 따사로운 평범한 의미를 잃어버렸다고 토로한다. 오월 광주를 생각하면 초등학교 2학년 산수시간에 선생님이 이상, 이하, 초과, 미만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붉은 분필로 칠판에 그리던 직선들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어느 한 지점에서 시작하여 화살표로 열린 직선들. 지금도 그 화살표의 끝이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을 것만 같다. 한국소설의 몫도 그러했다.
〈봄날〉과 같은 해 발표된 윤정모의 단편 〈밤길〉의 신부와 요섭. 그들은 눈을 피해 달이 뜬 들판을 더듬어 북쪽으로 가고 있다. 계엄군이 봉쇄한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도시를 탈출해 서울로 가는 길이다. 신부의 가방에는 일기장과 필름 두 통이 들어 있다. 그들은 도시 밖이 너무나 태평스러워 멍할 정도로 놀란다. 그날은 도청이 함락되고 피의 열흘을 마감하는 밤이었다.
"신부님, 빛고을에 난리가 났다면서요?"
한 농부가 경운기 소음 때문인지 큰소리로 물었다.
"글쎄요, 그렇다곤 합니다만……"
"사람들이 많이 상했대요."
"뉴스에 나왔습니까?"
불쑥 요섭이 물었다.
"웬걸요. 소문만 돌고 있지요."
(《봄비》, 1994, 58면)
당시 나는 열두살 소년이었다. 우리 고장은 마치 신부와 요섭이 지나던 농촌 마을처럼 막바지 모내기가 한창이었다. 폭도들이 벌교를 지나 남하할 거라는 소문이 있었다. 어른들이 없는 마을에서 아이들은 모형 나무총을 가지고 며칠째 뒷산 능선에 올라 있었다. 폭도들이 내려오면 마을을 지켜야 한다고 북쪽에서 흘러오는 국도를 노려보았다. 아마 우리는 드라마 〈전우〉나 〈3840유격대〉를 흉내내고 있었을 터인데 그 병영체제에서는 아이들의 상상력마저도 그처럼 호전적이었다. 기억하건대 나무총을 들고 땅바닥에 엎드려서 나는 몹시 두려웠다. 전쟁 드라마들처럼 우리에게 곧 살육의 시간이 닥치리라는 두려움.
농부들과 헤어지고 나서 요섭은 신부에게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분들에게…" 하고 말한다. 신부는 "언젠가는 다 알게 된다"며 조바심을 내는 영혼을 재촉한다. 그들에게는 광주시민들이 불순분자도 폭도도 아니라는 사실을 세상에 알려야 하는 임무가 있었다. 청년 요섭은 또 말한다. "남아 있어야 했어요." 소설은 내내 숨죽인 그 절박한 신음으로 채워져 있다. 그 소설에 대해 윤정모는 광주항쟁에 대한 내막이라도 우선 알려야겠다는 강박감에 시달렸다고 말한 바 있다. 실상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과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은 마치 구심력과 원심력처럼 이후 5·18을 다룬 작품들의 한결같은 정조이자 주제가 된다.
폭도가 내려오지도 않고 '사태'가 끝났어도 우리 고장에 그 진실은 전해지지 않았다. 한 교사는 버스를 강탈한 폭도들이 오로지 주먹질로 버스지붕을 날렸다고, 그것이 사실인 양 어린 학생들에게 들려주었다. 이듬해 봄에 나는 '요섭'을 만났다. 그는 밤꽃을 따라 마을 숲으로 들어온 양봉업자였다. 하교길에 소나기를 만나 숲속 그의 천막으로 들었다가 비가 그칠 때까지 전두환에 대해서, 광주의 살육에 대해서 들었다. 나와 친구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머잖아 다 알게 될 거야."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어린아이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어른들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던 그는 성당에서 뒤를 봐주던 도망자였고, 밤꽃이 지기 전에 신부님이 자수시켜 지프에 실려갔다.
상처·재연·기억의 문학
그 고립무원의 도시를 임철우의 〈봄날〉과 〈동행〉, 윤정모의 〈밤길〉이 힘겹게 입을 열어 증언한 이후 지금까지 28년간 오월 광주를 다룬 소설이 100여편 씌어졌다고 한다. 대부분 광주를 원체험으로 가진 작가들의 작품이었다. 논문 〈5·18 민중항쟁소설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심영은 이들 소설들이 크게 기억의 재현, 죄의식의 표출, 상처의 치유에 집중해 있다고 말한다. 5·18을 온전히 작가의 정체성으로 떠안고 살아온 대표적인 소설가는 임철우일 것이다. 그는 다섯권에 이르는 《봄날》(1997)을 10여년에 걸쳐 써냈다. 이 소설은 기괴한 소설이다. 윤상현 등 현장에서 죽어간 실제인물들이 등장해서가 아니다. 광주시 지도와 숱한 주석과 5·18일지가 소설에 끼워져 있다. 소설을 마치며 그는 후기를 이렇게 기록했다.
"지난 10년 동안 나는 내내 5월 그 열흘의 시간을 수없이 다시 체험해야 했고, 수많은 원혼들과 함께 잠들고 먹고 지내야 했다. 그러는 동안 가끔은 정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몰라보게 피폐되어가는 듯한 나 자신을 깨닫고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다. 고통스런 기억의 반복 체험이란 것이 얼마나 사람을 소모시키는 것인지, 처음으로 알았다. 솔직히 이젠 너무나 지쳤다. 내게 남은 마지막 힘까지 다 쏟고 난 심정이다. 그리고 두렵다. 누구보다 광주 시민들의 부릅뜬 눈이 두렵다. 이 소설이 행여 5월을 온몸으로 통과해온 많은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누를 끼치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새천년 벽두에 장편소설 《그들의 새벽》을 상재한 문순태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소회를 밝혔다.
"또 광주냐? 하는 분위기를 잘 안다. 끝나지 않았는데 끝내라고, 그만 잊어버리라고들 한다.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는 그들의 죽음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 진실 드러내기와 문학적 형상화 사이에서 그동안 많은 갈등을 겪었다. 진실 드러내기보다 소설미학에 치중하게 된다면 영령들의 죽음을 욕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후기는 원체험 세대 작가들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작가들의 고통과 더불어 5·18은 독자들에게도 고통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부담스러워한다는 피해의식이 형성되었다. 이들 소설들은 그런 척력을 가까스로 이겨내며 탄생한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그래서였을까? 정치적으로 5·18 묘역이 단장되고 희생자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5·18을 다룬 소설들은 마치 하루해살이 풀들처럼 고스러져갔다. 〈봄날〉과 〈밤길〉에서 출발한 직선의 화살표는 그 끝이 마모되어 흐릿해졌다. 더불어 5·18도 역사의 지층으로 묻혔다.
새로운 세대가 틔워내는 웃음의 새싹
손홍규는 5·18 당시 만 다섯살이었던 작가다. 그는 2007년 5·18을 현재화한 단편 〈최후의 테러리스트〉를 발표했다. 이 소설은 이창동의 영화 〈밀양〉의 전언처럼 진정한 용서에 대한 물음에서 출발한 소설이다. 사회가 해결해주지 못하면 피해자에게 사적인 보복만이 유일한 해원이 된다. 소설의 주인공 노인 박은 둘째아들 명우를 광주에서 잃었다. 그후 반평생을 그는 와신상담 가해자에 대한 보복을 벼르며 살아왔다. 공기총을 들고 설악산 백담사 언저리까지 찾아간다. 그후 그는 위장된 테러 무기인 톱, 낫, 드라이버, 송곳, 망치, 스패너, 드릴, 심지어 바늘까지 가방에 넣고 신촌을 배회한다. 그뿐이랴, 그 늙은이는 태권도장을 찾아가 '공중으로 붕 떠서 돌려차기하는' 기술까지 배우려 든다. 모든 게 실패로 돌아간 끝에 마침내 그가 몸에 익힌 강력한 무도는 오십보 떨어진 곳에서도 능히 목표물을 맞힐 수 있는 젓가락 던지기이다. 그러나 결국 그는 '단 한 사람도 암살하지 못한 암살자'로 죽음을 맞게 된다. 죽음에 임박하여 그는 테러리스트로서 자신의 생을 회고한다.
"죽음이 임박하자 죽여야 할 사람이 너무 많이 떠올랐다. 아니, 단 한 사람도 죽일 수가 없었다. 정조준만 하고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진정으로 목표물을 맞히기 위해서는 침착하게 오조준을 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봉섭이 가라사대》, 2008, 245면)
한 노인의 황폐한 내면을 그린 이 소설은 선배들처럼 정조준을 하지 않고 희극을 버무려 오조준을 한다. 앞서 말했지만 손홍규는 역사에 대한 회피와 막대한 물신으로 광주를 기념비로 만들어버린 현실에 대한 극한 절망감으로 이 작품을 써냈다. 5·18이 판타지의 세계로 전락하는 걸 고통스럽게 경계한다. (창비주간논평 2007.7.31)
나는 황폐한 가운데에서도 지어낸 그의 웃음에 주목한다. 그의 선배들과 독자들은 그런 웃음 한번 비치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고목에서 가까스로 소생한 싹처럼 반갑다. 중국의 모옌이며 위화 같은 작가들은 자신들이 유년기에 겪은 문화대혁명을 핍진하게 길어올리고 있다. 세계의 독자들은 문화대혁명을 눈물과 웃음으로 체험할 수 있다. 그건 문화대혁명의 역사를 넘어선다. 새로운 세대가 써낸 5·18이 황당무계한 코미디나 판타지면 어떠랴. 선배 세대들은 기꺼이 응원하고 즐길 용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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