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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혁명의 전위'에서 '원주민의 대변자'로

[대결, 차베스와 룰라]<5> 멕시코 사빠띠스따 봉기 15년(1)

[알림] 사회공공연구소의 열린강좌 '좌파의 역사실험실, 라틴아메리카'에서 오늘(21일) 볼프강 곤살레스 주한 베네수엘라 대사를 초청, '차베스 집권 10년의 평가와 과제'라는 주제로 특강을 듣습니다.

진행자인 박정훈 연구위원의 강의에 이어 진행될 곤살레스 대사와의 대화는 차베스와 베네수엘라에 대한 다양한 쟁점과 궁금증을 풀어볼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석을 바랍니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 포스터 참조.

▲ 부사령관 마르꼬스. 그의 사령관들은 모두 원주민 마을의 대표들이다. ⓒ박정훈

지금부터는 쿠바의 게릴라 혁명에 크게 고무되어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출현한 게릴라 가운데 가장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멕시코의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EZLN)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사빠띠스따와의 인연

1999년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EZLN)의 성명서 모음인 [분노의 그림자]를 읽고 원주민 게릴라들의 직접 민주주의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저는 그 즈음 EBS에서 한 편의 영화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것이 멕시코 행의 결심을 더욱 굳게 해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영화는 [분노의 포도], [에덴의 동쪽] 등의 소설로 유명한 존 스타인벡이 시나리오를 쓰고 엘리아 카잔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사파타 만세!(Viva Zapata, 1952)]라는 영화였습니다. 엘리아 카잔 감독은 제임스 딘이라는 배우를 영화계의 스타덤에 올려 놓은 [에덴의 동쪽]의 감독이기도 합니다. 그 영화는 30년 독재를 타도한 멕시코 혁명(1910~1920)의 지도자인 에밀리아노 사빠따(말론 브란도 분)의 투쟁과 암살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영화엔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1914년 멕시코 북부에서 승승장구하던 북부 혁명군 대장 빤초 비야와 멕시코 남부에서 파죽지세로 정부군을 전멸시키던 남부 혁명군 대장 에밀리아노 사빠따가 드디어 수도 멕시코 시티 입성을 앞두고 소치밀꼬라는 곳에서 회동합니다. 회담 장소는 이름 모를 나무 한 그루 아래였는데 거의 눕다시피한 방만한 자세로 이뤄집니다. 비야는 사빠따에게 대통령 제의를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비야 : 사빠따, 자네가 대통령을 하게나. 난 더 이상 기상 나팔소리를 듣고 일어나기 싫네. 농장의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기상하고 싶네.

사빠따 : 형님, 저는 글을 읽을 줄 모릅니다. 멕시코는 배운 사람이 다스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 목총으로 무장한 사빠띠스따 여성 게릴라, 그들의 무기는 언어였다. ⓒ박정훈

혁명군을 지휘하던 두 지도자 모두 대통령직에 욕심이 없었습니다. 물론 멕시코시티에 입성한 뒤에 대통령의 자리에 앉아 기념사진을 촬영하기는 했습니다. 그 뒤 빤초 비야는 소원대로 북부 농장으로 돌아갔으며 사빠따는 사탕수수 농장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권좌에 오른 어제의 동지들이 이 둘을 모두 암살합니다.

한국 학생 운동 내부에 존재하던 자칭 '전위들'로부터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소리를 숱하게 들어온 내게 비야와 사빠따의 모습은 충격이었습니다.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를 두려워하는 것이 권력의 속성인지 그들은 모두 살해당하고 맙니다. 만약 권력을 장악하지 않고서도, 권력을 장악해 또 다른 특권계급이 되는 길을 택하지도 않고서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에밀리아노 사빠따의 이름을 자기 조직의 이름으로 새긴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은 그와 같은 전략을 채택한 유일한 게릴라였습니다.

멕시코에서 제 친구가 된 '사빠띠스따의 화가' 베아뜨리스 아우로라는, 저희 사회공공연구소 홈페이지에 가면 바로 그녀의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라는 글씨 아래는 둥그런 지구가 있습니다. 그 위에 다채로운 의상의 수많은 인종과 국적의 사람들이 손을 잡고 있지요. 그녀는 칠레가 피노체트의 기관총 아래 숨죽이던 시절, 쿠바, 스페인을 거쳐 멕시코에 정착한 망명객이었습니다. 사빠띠스따의 봉기가 발발했던 1994년 1월 1일, 그녀는 딸을 가진 몸으로 봉기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녀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꿈을 접고 딸이나 잘 키워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내 문을 세차게 두드리면서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아이를 낳고 몸을 추스르자마자 치아빠스로 달려갔습니다. 그때 그녀는 사빠띠스따 사령부가 있는 과달루뻬 떼뻬약으로 가는 밤길, 하늘에서 수없이 쏟아지는 별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후 그의 그림에는 지천으로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그림이 냄비 아래 깔리는 신문지처럼 일상적인 것으로 유통되기를 바란다던 그녀는 수많은 별들을 통해 500년간 망각의 모퉁이에서 잊혀진 원주민들을 바라보게 된 전 세계인들의 눈빛을 표현하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아시아에 있던 저도, 사생활 속으로 칩거하려던 아우로라도, 2002년 5월~10까지 치아빠스의 산 끄리스또발 데 라스 까사스에 거주했을 때 그곳에서 만난 베를린의 게이 청년, 바르셀로나의 노동운동가들, 미국 펜실베니아의 여성 인류학자, 덴마크의 노장 공산주의자도 모두 혁명을 비웃던 시대에 도전장을 내민 사빠띠스따들의 봉기 뉴스를 추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글로 간 인텔리

먼저 봉기 전까지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이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되었는지 멕시코 역사 속에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이 그 시작은 체 게바라가 집대성한 쿠바 혁명의 게릴라 전략에 입각한 조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968년 10월 2일, 개발도상국 최초의 올림픽을 앞두고 있던 멕시코 시티 뜰라뗄롤꼬 광장에서는 다수가 대학생으로 구성된 평화적인 시위대가 "돌멩이 하나 들지 않은 채" 집회를 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광장 주변 옥상에는 저격수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군대가 탱크를 몰고 시위대 주변을 포위했습니다. 그렇게 최소 200명의 대학생들을 학살했습니다. 이 사건은 1910년 멕시코 혁명으로 수립된 제도혁명당 체제가 또 다른 억압체제에 불과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대학생들을 비롯한 멕시코의 중간층이 제도혁명당에 등을 돌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습니다.

바로 그 시위에 참여했다가 살아남은 이들이나 학살 소식에 공분한 이들은 멕시코의 가난한 농촌 지역으로 뛰어들어 게릴라를 조직하여 무장투쟁을 벌이게 됩니다. 그 중 뜰라뗄롤꼬 학살 1년 뒤인 1969년 민족해방군(FLN)을 조직한 대학생 그룹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1959년 쿠바 혁명에 고무되어 허울뿐인 멕시코 혁명체제를 전복하고 공산주의(당시 용어론 맑스레닌주의)에 입각한 민중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해 투쟁하기로 결의했습니다. 멕시코 시티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 게릴라 운동을 위한 기반을 갖춘 뒤에 1972년 멕시코시티에서 오늘날의 고속버스로 달려도 24시간 넘게 떨어진 치아빠스의 라깐돈 정글에 첫 게릴라 거점을 세웁니다.

68년 대학생 학살과 71년에도 거리를 행진하는 학생 30여명을 살해한 제도혁명당 정부는 1970년대에 멕시코 농촌 곳곳에서 우후죽순 등장하는 게릴라 운동의 토대를 없애고, 학살로 인한 민심 이반을 막기 위해 농촌 발전 정책을 추진합니다. 멕시코 혁명 유산인 에히도(멕시코의 공동 농장으로 개인이 점유할 수 있지만 판매할 수 없고(토지국유제), 소속 농민들과 함께 공동으로 운영한다) 조합의 설립 등을 지원합니다.

제도혁명당 정부의 이 정책은 각 농촌 지역 유지들의 이해관계는 건드리지 않는 대중주의적 정책에 불과했지만, 1970년대~1980년대에 멕시코 전역에서 다양한 농민 운동 집단이 등장하는 데 기여하게 됩니다. 바로 그 시기에 치아빠스의 고원지대에 살던 가난한 원주민 농민들은 라깐돈 정글로 이주하게 됩니다. 치아빠스의 좋은 토지를 모두 차지한 농민 부유층과 지역 유지들의 주 정부는 라깐돈 정글의 질이 나쁜 토지를 원주민들에게 분배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농민 단체들이 '땅과 자유'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가난한 농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싸우는 과정에서 부유층 농민들과 지역권력자들은 준군사조직을 만들어 농민들을 공격합니다. 1980년 7월에는 치아빠스의 한 마을에서 준군사조직에 의해 12명의 농민들이 살해당하기도 합니다.

한 쪽에서는 농민들의 저항이 활발해지고 한쪽에선 특권층의 군사조직이 등장하는 때인 1983년 민족해방군(FLN)은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EZLN)으로 개명하였습니다. 그 뒤 정글의 원주민 농민들을 조직하고, 주요 농민 단체에 조직가들을 파견하고 내부 논쟁을 주도하여 지지세력으로 변화시켰습니다.

1988년 명백한 부정선거로 집권한 제도혁명당의 살리나스 정부가 OECD 가입을 추진하고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체결하기 위한 사전 조치로 헌법 27조의 토지국유화를 폐지합니다. 토지국유화 조항은 바로 사빠띠스따들의 멘토인 멕시코 혁명 지도자 에밀리아노 사빠따가 목숨을 바쳐 쟁취한 조항이었습니다.

사빠띠스따들은 미국 정부의 보조금을 받은 옥수수(멕시코가 원산지이며 멕시코인들의 주식)를 비롯한 농산물들이 대거 멕시코에 유입될 것이고 멕시코 농촌은 초토화되고 대량 이민 사태를 발생시킬 것이라고 주장하며 무장봉기를 결정합니다.

1994년 1월 1일, 북미자유무역 협정 발효일, 300명의 무장 원주민 게릴라들, 목총과 옥수수 낫 마체떼로 무장한 원주민들 총 2천여 명이 치아빠스 주 제2도시 산 끄리스또발 데 라스 까사스를 비롯한 몇몇 군청소재지를 점령하고 전쟁을 선언하였습니다.
▲ 2001년 평화대행진에 나선 사빠띠스따 게릴라들이 멕시코 시티 최대 광장에서 연설하고 있다. ⓒ박정훈

22년의 비밀 투쟁

1968년 학살에서부터 1994년 봉기까지의 역사적 과정에서 두 가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멕시코에서는 왜 이렇게 지난한 비밀운동을 거친 뒤에 무장봉기가 가능했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쿠바에서는 56년~58년까지 3년간의 전투 끝에 게릴라 혁명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멕시코에서 무장봉기를 시작하는 데만도 무려 22년이 걸렸습니다.

멕시코에서는 제도혁명당 정권을 바꾸는 데 71년이 걸렸습니다. 공산주의 국가를 제외하고 집권당을 교체하는 데 70년 넘게 걸린 나라는 멕시코 밖에 없을 것입니다. 2000년 야당에 의한 정권교체가 이뤄졌을 때 1968년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도 시작됩니다. 무려 32년만의 일입니다.

이처럼 멕시코에서 역사적 시간이 더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국가-당 일체 시스템이라고 불리는 제도혁명당 체제의 성격 때문입니다. 멕시코 혁명(1910~1920)은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했고, 노동자에게 노동권과 8시간 노동제를 보장했으며, 학생들에게 거대한 무상교육서비스를 제공했습니다. 그래서 초대 주멕시코 소련 대사였던 콜론타이는 세계에서 유일한 소련의 형제국이 멕시코라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제도혁명당은 혁명의 성과를 바탕으로 노동조합과 농민조직, 학생 조직 등을 모두 흡수항 당 내부에 권력자원을 분배하는 시스템을 구축합니다. 물론 그 권력자원의 분배는 대단히 불균등하게 이뤄집니다. 멕시코 석유산업 노동조합에게 더 많은 국회의원 자리가 배정되었고, 가난한 원주민 농민들에게 질이 아주 낮은 토지가 분배되었습니다. 반면, 제도혁명당 외부에 존재하면서 정부에 비판적인 조직들은 그것이 노조든 야당이든 가차 없이 탄압받았습니다. 러시아 혁명 지도자 레온 트로츠키에게 망명처를 제공한 멕시코에서 놀랍게도 공산당은 1976년까지 불법 정당이었습니다. 땀삐꼬와 같이 석유노조가 강력한 지역에선 가게를 개점하는데도 노조의 허가가 필요했으며, 치아빠스 같은 농촌 지역에선 제도혁명당 당원이 아니면 택시운전사가 될 수도 없었습니다.

이 체제는 인권 유린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석유 붐 시절까지만 해도 비교적 잘 작동했습니다만 유가가 하락하던 1982년 멕시코는 외채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때 국제금융기구와 미국의 강요에 의해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하게 됩니다.

제도혁명당 체제는 1980년대에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해 서서히 해체의 길을 걷게 됩니다. 1968년 대학생들을 살해하여 중간층 지식 계층이 반대파로 돌아섰고 1988년 대선을 앞두고는 제도혁명당이 분열해 개혁파들이 당 밖의 좌파와 손을 잡고 민주혁명당(PRD)을 세우게 됩니다. 또한 신자유주의 노동정책에 따라 제도혁명당과 특정 노동조합의 전통적인 타협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하였고 노동자들이 보장받아온 권익도 침해당하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제도혁명당에 맞서는 독립적인 노동운동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제도혁명당의 또 다른 지지기반이었던 농민층마저 북미자유무역협정에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즉 사실상 당과 국가가 하나로 존재하는 거대한 시스템이 그 내부의 점증하는 모순으로 큰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때서야 원주민 농민의 무장봉기를 위한 적절한 시기가 조성된 것입니다.
▲ 치아빠스의 원주민 아낙이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다. ⓒ박정훈

혁명전위에서 원주민 대변자로

또한, 체 게바라의 전위주의에 사로잡힌 도시의 중산층 인텔리들이 문맹에 가까운 원주민 농민들을 조직하고 설득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68년 학살에 대한 분노로 무장한 이들에게 유일한 위로는 쿠바 혁명의 경험과 68년 세계 혁명 소식뿐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저 깊은 멕시코'의 정글에서 비원주민 세계와 담을 쌓고 살아온 가난한 원주민 농민들에겐 신뢰할 수 없는 외지인들이 전하는 수상한 이야기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치아빠스의 농촌 현실은 마르꼬스가 시적 선언문이나 성명서에서 암시하듯이 대지주/빈농의 극적 대립구도가 전개되는 곳은 아닙니다. 치아빠스 토지의 약 70%가 중·소농들이 점유하고 있는 땅으로 이 지역의 대립구도는 질 좋은 토지를 점유한 부농/질 나쁜 토지를 점유한 원주민 소농의 대립구도입니다. 아무리 질이 나쁘다 하더라도 자신의 땅을 점유하고 있으며, 넉넉하지는 않지만 옥수수를 주식으로 삼고 커피는 내다 팔면서 자급자족의 생활을 영위하던 원주민 농민들을 무장혁명의 길로 이끄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원주민들은 전통적인 생활과 사고방식을 유지하면서 자기 부족의 언어를 구사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스페인어로 말하는 것도 서툰데다가 다수가 스페인어로 읽고 쓸 줄도 몰랐습니다. 서구 공산주의 이론과 체 게바라의 게릴라 이론으로 무장한 '혁명 전위들'은 처음에는 이들과 대화하는 것조차 여의치 않았습니다. 바로 이 만남을 통해 사빠띠스따들의 도그마는 서서히 깨지게 됩니다. 즉 22년의 비밀 투쟁은 바로 게릴라 혁명 전위가 원주민 민중의 대변자로 변신해가는 과정입니다.

94년 1월 1일 봉기 때 발표한 제1차 라깐돈 정글의 선언에도 여전히 사빠띠스따의 전위주의가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500년 투쟁의 산물"이라는 거창한 선언에서부터 멕시코시티로 진격하겠다는 군사적 허장성세, 멕시코 민중을 억압하고 학대하고 착취하고 살해한 이른바 '민중의 적'들에 대한 즉결재판 등 쿠바 혁명 게릴라가 보여준 초전위주의와 유사합니다.

하지만 94년 1월 1일 무장봉기 이후 사정은 확연히 달라집니다. 봉기 발생 직후 멕시코시티 최대 광장에는 10만 명의 시민들이 집결해 "우리 모두가 마르코스"라고 외치며 원주민 게릴라에 대한 군사공격을 중지하라고 호소합니다. 또한, 유럽과 북미의 공감하는 시민들과 지식인들이 멕시코 정부에 대규모 항의 메일을 보냅니다.

선진국 클럽인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가입을 앞두고 있고 북미의 미국 및 캐나다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 멕시코 정부로서는 멕시코 사회의 최하층 빈민인 원주민들의 저항을 용인하며 1월 12일 전투 중지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 치아빠스 사빠띠스따 원주민 여성들 ⓒ박정훈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은 한번도 군사력을 과시하는 전투를 벌인 적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사빠띠스따들은 무기의 전쟁이 아니라 언어의 전쟁을 벌일 태세였습니다. 그들은 본격적으로 민주화와 원주민의 권익을 지지하는 멕시코 시민사회와 소통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전 세계의 다양한 시민들과 공개적으로 대화하기 시작합니다. 그 과정은 봉기 첫 날 보여주었던 멕시코 민중의 전위라는 낡은 관념을 서서히 무너뜨립니다.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은 치아빠스 원주민 마을의 대변자로서의 위치를 분명히 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원주민 마을을 멕시코 민주화, 반세계화 운동의 진원지로 바꾸어 놓습니다.

훗날 마르꼬스는 마르께스와의 대담에서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이 다수의 이름이 아니라 소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빠띠스따가 전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현실적 지평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능력 이상의 것을 말하는 것은 정치적인 마스터베이션에 지나지 않습니다. 때론 자위 행위만도 못합니다. 그것이 주는 쾌락마저 없으니깐요. 자신들이 작성한 팜플렛을 자기들끼리 돌려보며 좋아하는 것에 불과하지요. 우리가 정직하게 사빠띠스따 원주민 마을을 대표한다고 했을 때 오히려 사람들은 우리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마르꼬스의 이 발언은 80~90년대 내내 '4천만 민중', '1천만 노동자계급', '1백만 청년 학생'의 이름으로 발언하던 수많은 한국인 전위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실 그 전위들은 전체의 목소리를 대변한다고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내부의 다양한 목소리를 억압해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빠띠스따들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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