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의 정치체제라는 기계에서는 두 가지 핵심적 원리가 작동합니다.
첫째, 미국의 대 쿠바 강경책이 피델 카스트로 체제를 더욱 강화시킵니다. 한 유명 만평에는 10명의 미국 대통령이 "쿠바야! 망해라!"라는 주문을 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이젠하워 시대부터 조지 부시 까지 그들은 모두 쿠바에 대한 강경책을 구사했습니다. 쿠바를 군사적으로 침공했고, 경제적으로 봉쇄했으며,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려고 했습니다. 피델 카스트로를 암살하기 위해 무려 600회가 넘는 '거사'를 꾸미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말해주듯이 그것은 역설적으로 쿠바의 카스트로 체제를 더욱 강화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둘째, '양키 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하면서 쿠바 내부에는 권위주의 체제를 세웁니다. 쿠바 내부에서 정치적 반대파를 숙청하는 매커니즘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혁명 초기엔 바티스타 독재에 협력한 이들이 처형 대상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게릴라 혁명 동지들 중에 카스트로의 정치 방향에 반대하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 그들이 공산주의자라고 해도 체포 대상이었습니다. 쿠바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 '혁명'의 실질적 의미는 모두 피델 카스트로 정부가 해석하고 규정합니다. 따라서 그 정책에 의문을 품는 모든 행위는 즉각 '반혁명적 행위', 혹은 '미 중앙정보국(CIA)의 첩자'로 간주됩니다.
이 권위주의 기계는 곧 무수한 '내부의 적'들을 양산합니다. 피델 카스트로 체제의 공식적 견해에서부터 공식적 성적 취향, 공식적 문화 및 규범에 위배되는 것은 모두 도덕적으로 지탄받고 물리적으로 처벌받게 됩니다. 종교인은 '반혁명분자'가 되고, 동성애자들은 '부르조아지'로 낙인이 찍힌 채 '순화대상'으로 분류되어 노동수용소로 보내집니다. 60~70년대의 청년문화의 상징이었던 비틀즈를 듣고 장발을 하고 청바지를 입으면 '이데올로기적 퇴폐·향락주의'에 젖었다고 비난 받았습니다.
대표적인 반정부인사 오스왈도 빠야는 자신이 고등학생 때 종교인이라는 이유로 '반혁명분자'가 되어 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아바나 시 센뜨로 아바나에 거주하는 '불법' 팝콘 장수 아나는 마이애미에 사는 언니에게 전화 했다는 이유로 '이념의 변절'이라는 비판을 받아 공산주의 청년 동맹(UJC)에 가입하지 못했으며, 그녀의 남편 오마르는 마이애미 친척에게서 받은 구두 선물 때문에 "이념적 탈선"을 했다는 이유로 공산당에서 쫓겨났습니다.
여기서 저는 피델 카스트로의 이민 정책이 대중적인 반대파의 형성을 방해하기 위한 매커니즘이 아니었나는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 시에는 현재 약 80만 명의 쿠바계 이민자들이 거주하는 데 이들 다수는 쿠바 혁명 이후에 이주한 사람들입니다. 혁명의 성격을 사회주의라고 선언한 뒤에 60년대 무려 30만 명, 80년 초 12만 명이상이 정치 망명을 요청했고, 소련과 동구권이 붕괴된 뒤 1994년 '뗏목 탈출' 때는 1만 여명 등 세 차례의 굵직한 이민 물결이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피델 카스트로는 이것을 방치하고 보냅니다. 이들이 쿠바 섬에 남아 대중적인 반정부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이 떠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이니깐요.
▲ 깃발을 들고 가는 아바나 학생들과 교사 ⓒ박정훈 |
열대 스탈린주의
이런 권위주의 체제 아래서 모든 개인이 누려야 할 시민권도 정치적 권리도 보장 받지 못했습니다.
첫째, 쿠바에서는 결사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습니다. 쿠바에서는 공산당 지도자들이 이끄는 직능별, 계층별 친정부 단체들이 많습니다. 쿠바 인 다수가 이런 단체들에 속해 있습니다. 이들 단체는 초기 미국의 침공으로부터 쿠바를 방어하는 역할을 수행했지만 차츰 쿠바인들에게 공식적인 견해에서부터 공식적인 문화적 취향 및 규범까지 강요하고 다른 견해들을 통제하는 기구들로 전락했습니다. 그 외 조직들은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몇몇 종교조직은 허가를 받은 합법조직인데 반해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 클럽은 불법조직입니다.
둘째, 쿠바 언론은 모두 정부의 이른바 '공식 지침(li?nea oficial)'에 따라 기사를 작성합니다. 쿠바기자협회 부회장 후안 모레로(Juan Morrero)는 비비시(BBC)와 인터뷰에서 쿠바 기자의 제1사명은 혁명 방어이며 "다루어서는 안 되는 주제들"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매춘, 범죄, 인종주의, 임금, 부패 문제 등 사회 문제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다루어선 안 되지만 정부 최고 지도자의 공식 발언이 있으면 다룰 수 있습니다. 2007년 7월 26일 라울 카스트로가 평균임금으로 먹고 살기가 힘들다고 인정하기 전까지 쿠바언론은 15달러의 평균임금으로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고 떠들어왔습니다.
셋째, 쿠바에선 사실상 예술 창작의 자유가 늘 위협받아왔습니다.
혁명 초기였던 1961년 단편 다큐멘터리 [P.M.]에 대한 검열 사건에서부터 그 같은 위협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기록 영화는 아바나 시의 빠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촬영한 것으로 비정치적인 태도를 유지합니다. 하지만 쿠바 영화산업·예술원(ICAIC)은 쿠바 사회의 혁명적 변화를 다루지 않았다는 이유로 상영을 금지합니다. 그때 피델 카스트로는 "혁명 속에서는 모든 권리를, 혁명에 맞서면 아무 권리도 주지 않겠다"고 발언하며 검열을 정당화했습니다.
▲ 꼬꼬택시. 아바나 시의 교통수단, 코코넛을 닮았다. ⓒ박정훈 |
그리고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일명 '빠디야 사건'으로 알려져 있는데,
1968년 체 게바라 밑에서도 일한 적이 있는 외교 공무원 출신 작가 에베르또 빠디야(Heberto Padilla)가 카스트로 정부에 대한 비판이 담긴 "업사이드"(Fuera del Juego)라는 시집으로 쿠바 작가·예술가 연합(UNEAC)의 문학상을 수상합니다. 심사위원단의 결정에 불만을 품은 정부는 1971년 부인과 함께 빠디야를 체포합니다.
그런데 몇 주 후에 시인 빠디야는 자신은 물론 부인도 비판하면서 '반혁명적 과거'를 뉘우치는 발언을 하여 세상을 놀라게 합니다. 그러나 곧 빠디야의 공개발언이 쿠바 비밀경찰의 고문 및 협박 속에서 이뤄진 연출이란 것이 알려집니다. 이 일은 아메리카 및 유럽의 진보적 지식인들과 쿠바 정부의 허니문을 완전히 박살냈습니다. 샤르트르, 보봐르, 뒤라스, 수잔 손탁, 카를로스 푸엔테스 등 저명 지식인들이 항의 편지에 서명했고 "스탈린 시대의 가장 추악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고 비판하였습니다.
넷째, 쿠바에는 정치적 반대세력은 처형, 탄압, 추방의 대상이었습니다. 공산당 이외의 정당은 불법입니다. 정치적 반대파에게 관용을 베풀기는 하지만 법적 보호는 없습니다. 쿠바 정부의 변덕과 정치적 상황에 따라 구속했다가 석방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억압해왔습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소련 몰락 전후로 해서 정치적 반대파의 내부 구성이 변화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파 내에서도 친미극우반공주의자의 주도권이 무너지고 민주적 우파가 주도권을 쥐게 되었습니다. 또한 사회민주주의자 등 좌파 성향의 다양한 반정부 세력도 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반정부인사 오스왈도 빠야는 2003년 10월 인터뷰 당시 그해 초 85명의 반정부인사가 체포돼 길게는 28년 형의 중형을 선고받았다고 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세상에는 두 개의 신화가 있습니다. 하나는 공산주의로 그것이 사회정의를 이룰 것이라고 믿었지만 새로운 특권체제를 만들었습니다. 또 하나는 신자유주의로 그것이 경제를 발전시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거짓말이었습니다. 쿠바 민중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다 경험했습니다. 저는 지금 극단에 빠지지 않으면서 새로운 것을 창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원조교제' 경제
▲ 아바나의 동성애자. 그들은 한때 반혁명적이고 부르조아적이라고 비난받았다. ⓒ박정훈 |
지금부터는 쿠바 경제의 몇 가지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첫째, 쿠바는 혁명 전에도 후에도 '사탕수수 공화국'이었습니다. 혁명 이전 쿠바의 외화 소득의 80%는 사탕수수에서 나왔습니다. 사탕수수 수출 대부분은, 쿠바를 속령으로 만들고 싶었던 145킬로미터 바다를 사이에 둔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혁명 이후 쿠바가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기 위해 미국계 사탕수수농장 및 토지들을 모두 국유화하자 미국은 경제 봉쇄로 반격을 가했습니다.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쿠바경제는 이제 소련과 동구의 공산주의 블록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사탕수수를 우대 가격으로 수출하고 생활필수품 그러니까 소련제 자동차에서부터 마늘과 감자까지 모두 우대 가격으로 수입했습니다.
사실 1959년 혁명 당시 30대 초반에 불과했던 카스트로, 게바라 등 혁명지도자들이 얼마나 경제의 작동 원리에 대해 둔감했는지는 다음과 같이 전설 같은 이야기가 시사해줍니다. 카스트로가 한 회의에서 여기 경제학자(economista) 있습니까라고 묻자 공산주의자(comunista)로 잘못 알아듣고 체 게바라가 손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게바라가 쿠바 중앙은행 총재가 되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경제학자가 아니라 의사였던 게바라였지만 그도 쿠바가 단일작물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산업의 다변화, 특히 제조업 기반을 갖추기 위해 쿠바가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곧 라틴아메리카 대륙의 연쇄 혁명을 꿈꾸며 쿠바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둘째, 쿠바 경제의 모순이 심화되고 쿠바인들의 경제적 격차가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쿠바인들이 '비상시대'라는 부르는 1990년대 쿠바는 부분적인 자유화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국내총생산이 마이너스 10% 이하로 추락하던 시기였습니다. 쿠바는 관광업을 진흥해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달러 소지를 허용하다가 나중에는 태환 페소(CUC)를 도입하게 됩니다. 이로써 쿠바에는 일반 페소와 외국 관광객들의 태환 페소라는 두 개의 통화가 유통되는 이중통화경제가 들어섭니다. 태환 페소 경제 즉 관광업에 종사하는 쿠바인들의 수입이 증가하기 시작합니다. 호텔의 여종업원은 외국인의 1달러 팁을 모아 금세 평균임금인 15달러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시기에 또한 혁명 후 모두 국유화했던 소규모 자영업(소규모점포, 민박집 등)에 대한 부분적 자유화 조치도 취합니다. 물론 현재는 더 이상의 허가가 이뤄지지는 않고 있습니다. 관광업 관련 자영업자 즉 민박집을 운영하는 쿠바인들의 경우 수입이 상대적으로 좋아졌습니다.
셋째, 1962년 쿠바가 미국인 소유 사탕수수 농장 및 토지를 국유화하면서 시작된 미국의 경제 봉쇄는 탈냉전기인 1990년대에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쿠바가 부분적 자유화 조치를 취하고 있던 1996년에 미국은 헬름스-버튼 법을 제정하여 쿠바에 투자한 제3국 기업에 제제를 가하는 강경책을 구사합니다. 사탕수수 최대고객이었던 공산주의 블럭을 상실한 쿠바는 바다로 145킬로미터 건너편에 있는 세계 최대 미국 시장의 봉쇄로 인해 꼼짝달싹을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특히 쿠바의 관광업, 사탕수수 및 담배 산업, 세계 제 2위의 매장량을 자랑하는 니켈 광업 등의 발전을 지체시키고 있습니다.
쿠바의 사탕수수농업이 붕괴되면서 2003년 당시 쿠바의 외화 소득원 1위는 관광업, 2위 망명 쿠바인의 송금이 차지하였고 사탕수수 소득은 3위로 주저앉았습니다. 그해 미국의 조지 부시 정부는 쿠바계 미국인들의 여행 횟수와 현지 체류 기간마저 축소하고 쿠바로 보내는 송금액도 제한하는 초강경조치를 취합니다. 쿠바 경제에 타격을 주기 위한 고립 정책이었습니다.
천국도 지옥도 아닌
체 게바라의 부관으로 쿠바 혁명의 성패를 결정지은 산타 클라라 전투에 참여했던 호르헤 빠라는 제게 "쿠바는 천국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지옥도 아닙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미국의 경제 봉쇄와 초강경책이 없었다면 쿠바가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습니다. 한편 [저개발의 기억]이라는 쿠바 사회주의 영화의 대표작을 감독한 또마스 구띠에레스 알레아는 "사회주의라는 영화의 시나리오는 훌륭하지만 연출은 아쉬운 것이 많다"고 말했습니다.
강대국 미국에 의한 고립 포위 작전으로 인한 '쿠바의 고독'이 쿠바 혁명 50년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쿠바가 스스로 만든 권위주의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쿠바 국립 연구기관인 사회심리조사센터(CIPS) 마리아 이사벨은 "쿠바 인들이 정치사상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라는 제 질문에 "미국인들은 누리고 있습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런 뒤 그녀는 소수의 미디어재벌이 언론을 독점하고 있는 미국을 거침없이 비판했습니다. 그런 그녀의 비판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바에는 정치사상의 자유가 있습니다"라는 당당한 발언이 전제되어야 했습니다.
2003년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탄압에 실망해 지지를 접었던 지식인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쿠바인들이 이룬 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고 말했습니다. 쿠바인들이 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는지를 성찰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사로잡고 있던 정치적 경제적 도그마들이 무엇이었는지 우리가 성찰하지 않는다면, 갈레아노의 이 말은 카스트로를 위한 변명처럼 들립니다.
쿠바의 미래
▲ 팝콘을 몰래 파는 아나 ⓒ박정훈 |
2006년 쿠바 권력을 계승한 라울 카스트로는 2007년 쿠바 전역을 뜨거운 논쟁으로 달구면서 국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비등하고 있는 쿠바인들의 변화에 대한 열망을 수용하면서 피델 카스트로의 카리스마적 리더쉽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리더쉽을 만드는 것이 라울의 일거양득 전략이었을 겁니다. 이 해에 쿠바 전역에서 5백만명의 시민들이 논쟁에 참여했고 무려 1백 20만개의 청원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인터넷에서는 쿠바 사회의 변화를 둘러싸고 국내외 지식인들의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중국식 사회주의 도입 요구에서부터 쿠바 체제에서도 유지되었던 임노동 자체를 폐지하자는 더 급진적인 주장까지 다양한 견해가 제출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논쟁은 정부가 용인하는 견해들만이 다루어졌을 뿐입니다. 라울 카스트로는 "혁명가가 절대로 의심해서는 안 될 유일한 것은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우리들의 굳은 결정이다"라며 논쟁의 한계를 정했습니다.
그 논쟁 이후 라울 카스트로는 경제적 자유화 조치를 발표하였습니다. 국가 토지 소유제를 개혁해 토지 임대차 제도를 도입하였습니다. 쿠바 통계청 조차도 국영농장이 생산성 향상에 실패했다고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평등임금제를 개혁해 생산성에 따른 임금 차등제도를 도입하였습니다. 그리고 노트북과 휴대폰과 같은 고가 전자제품의 매매를 허용하였습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조치로 쿠바 내부의 부의 격차를 현실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2008년 세 차례나 허리케인이 불고 간 뒤부터 라울 카스트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한편, 최근의 국제환경은 쿠바에 아주 우호적입니다. 혁명 50년의 기간 중에 가장 우호적인 여건이 조성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미국의 대 쿠바 정책이 드디어 냉전시대를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전 오바마 정부는 미국계 쿠바인들의 쿠바 방문 횟수와 체류 기간 제한을 철폐하고 송금 제한 조치도 해제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4월 17일 미주 정상회의에서는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1962년부터 유지해온 미국의 쿠바 봉쇄 정책이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양국 관계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자고 공개적으로 제안했습니다. 이는 1959년 쿠바 혁명 이후 미국 대통령으로선 처음 쿠바와의 관계 정상화를 천명한 것입니다.
이런 미국 정부의 입장 선회에는 쿠바계 미국인들의 여론 변화도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 미국의 쿠바계 미국인 다수가 미국의 강경책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는 늘 강경책을 주문해왔던 미국의 쿠바인 사회에서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작년 미국 대선 직전에 플로리다 국제 대학과 부르킹스 연구원이 벌인 공동조사에 따르면 쿠바계 미국인의 55%가 경제봉쇄를, 67%가 여행제한조치를, 65%가 송금제한조치를 반대한다고 합니다. 이 같은 여론의 변화는 쿠바계 미국인 공동체에 80년 이전의 반공세대와 다른 견해를 가진 80년대 이후 세대의 망명자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입니다.
▲ 오스왈도 빠야, 사하로프 인권상을 수상한 반정부인사 ⓒ박정훈 |
라울 카스트로의 쿠바는 이같은 우호적인 국제환경을 발판으로 정치적·경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한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까요? 1991년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 시기에 청소년기를 보낸 탈냉전 시대의 30대~40대는 라울 카스트로의 정책에 어떤 태도를 취할까요? 쿠바내의 민주적 반대파는 시민들로부터의 고립과 정부의 탄압에서 벗어나 대중적인 반대파로 성장할 수 있을까요? 이 같은 물음에 쿠바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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