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 라틴아메리카 좌파들은 이전 구좌파들 가령 게릴라 혁명으로 집권한 쿠바와 산디니스타, 민주선거로 집권한 아옌데의 칠레 등과 구별되는 세 가지 특징을 보여줍니다.
첫째는 이들이 모두 민주주의자들이란 사실입니다. 과거에 중남미에서 좌파들은 게릴라 투쟁이 아니면 집권에 성공할 수도 없었습니다. 민주선거로 집권한 뒤 살해당한 사회주의자 아옌데 대통령의 사례는 당시 중남미 극우 독재의 반민주적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 시대가 지나간 것입니다. 이제 좌파들은 민주적 야당으로 변신하였습니다. 참여예산제와 같이 민주주의의 영역을 더욱 확장하건, 국민소환제와 같이 새로운 민주주의의 원리를 채택하여 직접 민주주의를 채택하건 모두 민주적 절차를 존중하고 있습니다.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은 쿠바가 선거민주주의를 도입해야 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으며, 군사쿠데타를 시도했던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는 선거로 집권하였습니다. 또한 10일간 5명의 대통령이 등퇴장했고(2001년의 아르헨티나), 쿠데타로 축출되었다가 사흘 만에 권좌에 복귀(2002년의 베네수엘라), 원주민 시위대에 대한 발포 명령으로 유혈사태가 발발해 대통령의 하야(2003년 볼리비아) 등의 헌정 질서의 위기가 모두 민주적 절차의 회복으로 해결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좌파들이 주도적으로 나섰고 정치력을 성장시켜왔습니다.
또한 집권 이후에 좌파들은 민주주의의 주체를 대폭 확대하였습니다. 노동자계층(중남미 최초의 노동자대통령 룰라), 흑인(브라질 최초의 흑인대법관), 원주민(볼리비아의 원주민 대통령), 여성(칠레의 여성평등내각) 등의 다양한 민주주의의 주체들이 등장하였고 정치 참여가 활발해집니다.
둘째, 이들은 개혁주의자들입니다. 과거 쿠바 혁명이 보여주듯이 사적 소유제도를 폐지하거나 시장경제 질서를 대체할 새로운 경제 체제를 수립하였는데, 그같은 혁명주의자들과 달리 새로운 좌파들은 그와 같은 해결책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정치적 수단은 다양했습니다. 가령 제헌의회를 추진하는 등 급진적인 수단을 택하건 의회 내의 주도권을 확보하거나 중도 우파와 연합하는 등의 점진적인 수단을 택하건 혁명 좌파와 다른 개혁적 좌파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과 브라질 룰라 대통령 ⓒ로이터=뉴시스 |
국제주의자
셋째, 이들은 모두 국제주의자들입니다. 하지만 국제주의자라는 것이 고전적 좌파의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와는 다릅니다.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오랜 전통이었던 시몬 볼리바르(남미 연방 공화국의 추구)-체 게바라(라틴아메리카 반제국주의 게릴라 혁명을 추구)의 라틴아메리카주의와도 구분됩니다.
몇 년 전에 브라질 룰라 대통령이 브라질 제1외국어로 영어, 스페인어를 동등하게 대하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영어과 스페인어를 의무적으로 교육하는 정책을 추진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브라질 지배 엘리트들은 이웃 스페인어권 국가보다 미국을 더 선호해왔습니다. 이 정책은 역설적으로 라틴아메리카 대륙 내의 국가들간의 교류 수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라틴아메리카 대표 지성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도 1980년대 후반에 중남미 국가들이 이웃 나라들과 맺은 협정의 수는 형편없이 적은 데 비해 대부분의 외교 협정이 유럽 혹은 미국과 맺었다고 개탄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라틴아메리카 좌파들은 중남미 국가 블록을 결성하는 일에 아주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이같은 일이 활성화된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성장 부재로 라틴아메리카의 세계경제 내의 위상 추락해왔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탈냉전의 역설로서 미국의 외교 대상의 우선순위가 조정돼 라틴아메리카가 외교 우선 대상에서 뒷전으로 밀리면서 좌파의 집권이 가능해진 반면에 더 이상 라틴아메리카가 미국 외교의 주요 대상이 되지 않으면서 정치경제적 측면에서 미국의 협력도 멀어진 것입니다. 셋째는 각 국가별로 신자유주의로 인한 경제 위기와 국가 재정위기로 인해 국민국가의 정치·경제력이 현저히 약화되어 왔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지역내 국가들 간의 블록을 결성하자는 움직임이 활발해진 것입니다.
쿠바의 혁명 좌파들이 보여주듯이 제국주의에 맞서는 체 게바라의 라틴아메리카주의 입장을 취하기는 했지만 쿠바라는 국민 국가적 수준에 갇혔지만 현재의 라틴아메리카 좌파들은 국가들 간의 교류 전략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 양상으로 드러나고 있는데 첫째는 과거 신자유주의 시대의 다양한 국제기구들이 주로 통상 중심의 소극적 교류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면 지금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전면적 교류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양상은 국민 국가적 틀을 뛰어넘는 지역 연합 즉 유럽 연합의 라틴아메리카 버전인 남미국가연합을 건설했다는 것입니다.
라틴아메리카 지역 내 교류의 방향 전환은 곧 라틴아메리카 외부 즉 역외 지역과의 교류 방향도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먼저 미국과의 심각한 외교적 불균형을 해소하고 동등한 외교를 벌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차베스 대통령은 거침없이 미국 정부를 비판해왔습니다. 룰라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 미국을 방문하면서 부시 대통령을 만나 브라질이 축구와 삼바 축제의 나라만이 아니란 것을 보여주겠다고 공언하였고 미주자유무역지대 협상에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입장을 반영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또한 외교 관계의 다변화를 추구하여 아시아 국가들(중국, 인도 등)과의 관계를 개선하였습니다. 특히 중국과의 관계가 아주 긴밀해졌습니다. 2003년부터 2008년까지 좌파들이 집권한 6년간 지속적으로 대륙 평균 6% 이상의 성장을 구가해왔습니다. 이것은 바로 중국의 폭발적인 자원 및 식량 수요에 힘입은 것입니다.
그리고 국제통상관계에서 한미자유무역협정과 같은 양자 무역협정을 지양하고 다자간 무역협정에 우위를 두고, 세계무역기구 내에서 남반구 개발도상국 그룹을 형성하는 등의 방식으로 동등한 국제 관계를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베네수엘라 수도 까라까스에서 열린 2006년 세계사회포럼 ⓒ박정훈 |
이런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라틴아메리카 좌파들은 명백히 다른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뉘고 있습니다. 이것이 눈에 잘 띄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이 둘의 차이를 차베스형 좌파 vs 룰라 형 좌파 등으로 구분해왔습니다만, 저는 이들 정치의 성격을 고려하여 급진주의 좌파와 현실주의 좌파로 구분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라틴아메리카 좌파가 분화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급진주의 좌파의 대표주자인 차베스는 최근 수년간 국제뉴스의 초점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알려져 있습니다. 반면 현실주의 좌파의 탄생과 형성 과정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지난 1996년~1998년 멕시코 시티의 산 앙헬에서 2년 동안 라틴아메리카 차원의 국제 정치 포럼이 개최되었습니다. 라틴아메리카 좌파들은 신자유주의 이후의 라틴아메리카 진보 진영의 정치적 대안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그 국제 포럼을 통해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주의 좌파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회의에는 브라질 노동자당의 룰라, 칠레 사회당의 라고스, 멕시코 민주혁명당의 로뻬스 오브라도르 등이 참가하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신자유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전 시대인 민중적 민족주의(대체산업화시대) 시대로 돌아갈 수도 없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습니다. 경제의 세계화로 인해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을뿐더러 민중적 민족주의의 권위주의시대로 회귀해서도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정책적 수단으로 △ 자원의 효율적 분배 제도로서 시장경제를 수용하되 시장 경제 내의 약자들인 노동자를 비롯한 다양한 계층의 권리를 확보하여 민주화하고 △ 세계화를 민주화할 수 있도록 국제적인 협력을 강화한다 △국가재정 확보를 위해 일시적으로 도그마 없는 민영화를 추진할 수도 있고 필요하다면 다시 국유화할 수도 있다 △ 도그마 없는 자유 무역은 지지할 수 있다. 즉 미국식 자유무역처럼 자국 농업에는 보조금을 지급하면서 타국에는 보조금 지급을 철폐하라고 요구하는 '미국의 자유무역주의'에 반대하되 국가 사이의 자유롭고 공정한 무역에 대해선 지지한다. △ 안정적인 경제 정책을 추구하되 정치에 있어서는 혁신적인 정책을 추구한다. 정치 참여 주체의 획기적인 확대 등의 파격적인 정책으로 민주주의의 주체를 확대한다.
가령 룰라는 칠레의 예를 따라 현 내각의 여성 장관을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지하고 있다. △ 사회 복지 정책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재정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또한 국민국가의 정치경제력이 축소돼왔는데 이를 보완하기 위해 지역 블록을 건설한다 등의 정책을 제시하였습니다.
물론 이 같은 현실주의 좌파들의 정책은 집권 이후에 지속적으로 변모해왔습니다. 게다가 작년 세계경제위기 이후에는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작년 세계 경제위기의 와중에 대단히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경제정책을 유지해오던 룰라 정부는 소리 소문 없이 금융기관을 국유화할 수 있는 법안을 통화시켰습니다. 이렇듯 정책의 진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반면 1999년 베네수엘라에서 집권한 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정책에 영감을 받은 급진주의 좌파들이 존재합니다.
두 개의 좌파 : 현실주의 vs 급진주의
▲ 차베스를 반대하는 중산층 냄비 시위대 ⓒ박정훈 |
이제 양 좌파를 비교하면서 양 좌파의 핵심적인 특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급진주의 좌파에 영감을 불러일으킨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의 지지층은 도시빈민계층입니다. 아주 중요한 특징입니다. 베네수엘라 노동조합총연맹(CTV)은 석유산업과 그 파생산업(석유화학산업 등) 관련 노동자들입니다. 130만 명의 조합원이 바로 베네수엘라 정규직 숫자라는 분석이 저명 언론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이들이 훗날 차베스에 맞서 쿠데타에 가담하거나 파업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요컨대 베네수엘라의 개혁이나 변혁을 바라던 이들은 노동자계층에서 그 가능성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실제로 이들 노동자 계층은 지난 1950년대 이래 빈민들을 완전히 배제시킨 베네수엘라 정치의 한 축이었던 '민주행동'이라는 정당의 지지기반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89년 도시빈민폭동을 접한 베네수엘라 진보진영은 도시빈민운동에 뛰어듭니다. 그들은 빈민가에 뛰어들어 마을 회의를 조직하고 공동체 라디오를 만들고 공동체의 교육과 의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이렇게 조직된 도시 빈민 계층이 훗날 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지지기반이 되었습니다. 즉 신자유주의에 맞선 도시빈민들의 투쟁 과정에서 좌파의 지지층이 형성된 것입니다. 반면에 현실주의 좌파들은 대체로 노동자계층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브라질의 룰라는 노동자 계층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들 노동자 계층은 베네수엘라의 경우와는 달랐습니다.
이미 브라질에는 20세기 초 형성되었다가 친정부적 성향으로 변질된 노동조합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맞서 노동자 권익 보호, "이제 직선제를"이라는 구호가 보여주듯이 민주화를 내걸고 독재 정권에 맞선 신노동운동이 등장하는 데 바로 이 노동자운동의 지도자가 훗날 브라질의 대통령인 룰라입니다. 민주화운동의 과정에서 브라질 좌파의 지지층이 형성된 것입니다.
경제정책에서 급진주의자들은 전략산업의 국유화를 추진하였습니다. 볼리비아의 천연가스 국유화, 베네수엘라에서도 석유산업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더욱 강화되었으며 통신, 전력 부문의 국유화가 추진되었습니다. 그런데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처음부터 전략산업의 국유화를 추진한 것은 아닙니다. 정치경제적 변화과정 속에서 차베스 대통령의 정책도 진화합니다. 초기에 전임 정부의 경제관료를 그대로 유임했던 차베스 정부는 2006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경제정책의 방향을 전환하게 됩니다. 그 같은 방향 전환에는 세 가지 배경이 있습니다.
첫째 쿠데타 시도, 야권의 파업 등의 위기가 극복되고 국민소환투표에서 승리하여 정치적 주도권을 확실히 쥐었다고 판단을 하게 됩니다. 둘째는 국제석유가격의 상승으로 인한 경제적 여유의 확보입니다. 집권 당시 만해도 배럴당 20달러 선이었던 석유가격은 한때 170~80달러로 급상승했습니다. 이로써 민영화 기업을 사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셋째 중남미 좌파 도미노 현상의 가속화로 인한 국제적 고립 위기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국유화 자체가 해결책인지는 숙고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전력 산업의 국유화 이후 베네수엘라 수도 까라까스에서 정전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즉 국유화 자체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떤 국유화인가입니다. 보편적인 전기서비스를 안정적으로 공급한다는 사회적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국유화인지 아닌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반면 현실주의 좌파의 대표주자인 브라질의 경우 집권하고 나서 전임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의 방향을 전환시키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외채를 상환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노동자당(PT)이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해지펀드업계의 대부 조지 소로스조차도 브라질 국민들이 룰라를 지지하면 아르헨티나처럼 국가부도사태에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로 인해 룰라는 국제금융기구들에게 외채를 상환하겠다는 약속을 반복해서 해야 했고 전임 정부의 재정흑자수준보다 더 높은 수준을 유지하겠다고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시하게 됩니다.
바로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룰라 정부는 초기에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경제정책을 유지하게 됩니다. 노동자당이 연방 정부를 운영하기 전에 지방 정부를 운영할 때도 여러 지역에서 민영화를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지방 정부의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작년 하반기 세계경제위기 이후 룰라는 시장의 무정부주의를 성토하면서 금융기관의 국유화를 가능하게 하는 법률을 제정하여 통과하였습니다.
이 또한 브라질 경제가 2003년 이후 지속적으로 순항해왔고 올해 전 세계적 경제침체, 라틴아메리카 모든 국가들도 이미 경기침체국면에 접어들었지만 브라질의 경우 경기 하강 국면에서 3%의 성장을 유지할 것이라고 국제기구들이 분석하고 있습니다. 또한 현재 룰라는 국민의 84%가 넘는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이 같은 정치경제적 요인이 룰라가 기존의 경제 정책의 방향을 선회하는 데 중요한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
▲ 차베스를 지지하는 시민들 ⓒ박정훈 |
정치에 있어서도 두 좌파는 차이를 보여줍니다. 가령 베네수엘라에서는 다른 중남미 국가들과 달리 1950년대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래로 민주정부를 지속적으로 유지해온 극소수 나라가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그 민주정부는 점점 더 불어나는 빈민들이 사실상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하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차베스 정부가 빈민 지역에서 빈민유권자 등록 운동을 벌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국민 다수와 무관하게 상류층과 중산층 일부를 위한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바꾸겠다고 명분을 내걸고 제헌의회를 추진한 것입니다. 그로서 차베스 정부의 여당의 의석수는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직접민주주의의 원리를 도입하여 대통령에 대한 국민소환제를 도입하여 직접 자신이 그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중남미 지성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차베스 대통령의 국민소환제 투표를 이렇게 논평했습니다. "세계에 얼마나 많은 나라에서 대통령이 국민소환투표를 흔쾌히 도입할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대통령들이 소환 투표 이후에도 제 자리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현실주의자들은 다른 좌파 정당들, 혹은 중도 우파 정당들과 연합하여 의회 내에서 정치적 정책적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방식으로 정치력을 발전시켜왔습니다. 그러면서도 21세기 초까지만 해도 법적으로 이혼조차 불가능했던 칠레에서 여성 대통령이 탄생하고 남녀 동수 내각이 수립되는 등 민주주의의 주체를 확대하고 참여예산제가 보여주듯이 민주주의의 영역도 확대합니다.
사회정책을 보면 급진주의 좌파인 차베스 대통령은 '미션' 이라는 이름으로 빈민들을 위한 복지제도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빈민의 문맹 퇴치를 위한 미션, 빈민 지구에 인터넷 카페를 설치하는 미션, 정부 보조금을 받아 저렴하게 식료품을 판매하는 가게를 여는 미션, 빈민에게 무상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미션을 추진해왔습니다. 또한 빈민들의 교육을 위한 다양한 중도 탈락자들의 복귀 프로그램을 개설하였고 또한 빈민가의 청소년들을 위한 고등교육(대학교육)을 위한 여러 대학들을 개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브라질 룰라 정부의 경우는 긴축재정 정책을 약속했고 재정흑자 비율의 유지로 인해 사회정책에 예산을 배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공무원의 연금제도를 삭감하는 개혁을 추진하여 거기서 얻은 예산으로 빈곤제로라는 구제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만 빈민들에게 먹을 거리를 제공하는 이 제도로 빈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2007년 브라질의 대서양 해안에서 석유가 발견되어 그동안 개발해왔습니다. 이것을 개발하면 브라질의 세계 10대 산유국에 들어간다는 국제적인 분석이 나왔습니다. 작년 세계경제위기가 본격화하자 룰라는 대서양 석유 개발 수익을 모두 사회복지정책에 투자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바로 그 첫 번째 사업을 올 초에 발표했습니다. 파벨라라는 대규모 판자촌으로 유명한 브라질에 1천 2백 만 호 그러니까 총 인구 1억 7천 만 명 가운데 약 4~5천 만 명의 빈민층에게 서민주택을 제공하고자 국가적인 서민주택 건설 사업을 벌이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브라질판 뉴딜 정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업이 룰라 정부의 사업이 아니라 브라질의 국가의 사업이 되도록 이미 오래전부터 정치적 성향이 다른 지방정부와도 꾸준히 협의한 뒤에 중장기적인 국가계획으로 수립한 것입니다.
▲ 한 상파울루 소년이 룰라의 플래카드를 들었다. ⓒ박정훈 |
국제정책을 보면 차베스의 경우는 이른바 미주볼리바르대안(ALBA)을 제시하였습니다. 그 핵심은 교류의 원칙으로서 유무상통의 원칙입니다. 가령 쿠바와 베네수엘라의 교류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즉 베네수엘라가 가진 석유와 쿠바의 발전된 의료진을 교류하는 것입니다. 쿠바 의사 2만명이 바로 지금 베네수엘라 빈민가에서 무상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유무상통의 국제 협력은 현재로서는 차베스의 석유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또한 미주 볼리바르 대안에는 베네수엘라뿐만 아니라 쿠바, 에콰도르, 볼리비아, 니카라과 등이 참여하고 있는데 제국주의에 맞서는 이념 동맹의 성격이 아주 강합니다. 반면 현실주의적 외교 정책을 구사하는 룰라의 경우는 남미국가연합에 콜롬비아 친미우파 정부, 페루의 중도파 정부도 끌여 들였습니다. 얼마 전에는 라틴아메리카 국가 21개국이 참여하는 정치적 블록인 리우 그룹에 쿠바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이는 데 브라질 정부가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쿠바가 국제적 고립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각 국의 좌파 지도자가 보여주는 리더쉽의 특징을 보면 급진주의자들은 대국민 접촉이 아주 활발합니다. 8시간 넘는 장시간 연설은 예사고 베레모와 붉은 티를 입고서 베네수엘라 국가도 부르는 등 아주 개성이 잘 드러나는 방식이었습니다. 일요일 마다 차베스 대통령은 "알로 쁘레시덴떼"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데 그 프로의 사회자는 바로 우고 차베스입니다. 카메라의 위치도 지정합니다.
요컨대 사회자이자 연출자로서의 역할을 다 합니다. 가장 재밌는 것은 그 프로그램이 언제 끝날 것인지를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즉 차베스 대통령의 변덕에 달려 있는 것이지요. 반면 현실주의자의 대표주자인 룰라는 의회 내에서 정치적 헤게모니를 구축하는 데 집중합니다.
에필로그: 라틴아메리카 정치의 역설
에릭 홉스봄은 자신의 자서전 [미완의 시대]에서 중남미 대륙의 정치적 역동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우파 지도자들이 노동 운동의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하며(아르헨티나의 페론, 브라질의 바르가스), 파시스트 선전가들이 좌파 광부 노동조합과 합세해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혁명을 일으키기도 하며(볼리비아), 세계에서 유일하게 군대를 폐지하는 데 성공한 국가가 있지를 않나(코스타리카), 부패에 절어 있는 유일 정당인 제도혁명당이 이 나라에서 가장 혁명적인 학생 운동가들을 체계적으로 영입하였으며(멕시코), 다른 제3세계 출신의 이민 1세대가 대통령이 되기도 하고, 유대인들보다 아랍계 이민자들이 더욱 성공을 거두는 대륙이다."
▲ '인간적인 브라질을 원한다' 2002년 브라질 대통령 선거 대책본부 건물 ⓒ박정훈 |
이뿐만이 아닙니다. 게릴라가 무기를 버리고 평화 대행진을 벌이고(멕시코), 군사 쿠데타의 주역이 '빈민 대통령'이 되어 '21세기 사회주의'를 외치는 나라가 있는가하면(베네수엘라), 진취적인 좌파 대중 정당의 지도자가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나라에서 신자유주의로 인해 신뢰가 추락한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키고 있으며(브라질), 가장 마초적인 나라에서 중남미 최초의 평등내각이 탄생하기도 했습니다(칠레).
세계가 라틴아메리카를 잠시 잊을라치면 어김없이 그 대륙에서는 세계인들의 주목을 살 만한 일들이 벌어져왔고 앞으로도 벌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유럽과 미국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나 더 평등하고 자유롭고 정의로운 세상을 향한 싸움을 멈추지 않는 라틴아메리카 인들의 삶과 저항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도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더 자유롭고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왔습니다. 한국에서도 라틴아메리카처럼 역동적인 진보정치가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진짜 라틴아메리카에서 배울 것이 있다면 바로 정답이 없는 세상에서 자신들의 고유한 역사적 경험을 만들어가는 정신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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