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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식'이 10명만 더 있다면…

[화제의 책] <오바마의 미국과 한반도, 그리고 2012년 체제>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의 분석에는 번뜩이는 재치와 상상력이 있다. 정욱식은 그걸 무기로 한반도 정세의 주요 쟁점들을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로 설명한다. 복잡하고 어지럽게 널려 있는 외교·안보 현상을 단칼에 규정한다.

"오바마의 외교안보팀 구성은 한마디로 군부달래기야." 오바마가 부시가 임명한 국방장관을 유임시키고, 공화당 대선후보였던 매케인의 친구 제임스 존스를 국가안보보좌관에 임명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던 즈음 만난 정욱식은 "오바마가 중도우파 외교안보팀을 구성했다"는 밋밋한 얘기나 하고 앉아 있는 기자를 무안케 했다. 그런 식이다.

그렇다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새로운 개념이나 이론, 혹은 결정적인 팩트를 제시하는 건 아니다. 정욱식은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고 반발짝만 앞을 내다보고 상상력을 발휘하고 머리를 굴려 보면 뽑아 낼 수 있는 말을 가지고 정세를 설명한다.

실은 다른 사람들의 머릿속에도 다 있는 생각들이지만 그들보다 한 호흡 먼저, 적시에, 무엇보다 정확하게 그런 아이디어를 끄집어 내 요리하는 것. 콜럼부스의 달걀과도 같은 그것은 새로운 개념이나 이론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것보다 사실 더 어렵다. 명석한 분석가와 그저 그런 분석가는 거기서 갈린다.

2012년 체제

이번에 나온 <오바마의 미국과 한반도, 그리고 2012년 체제>(정욱식 지음, 레디앙 펴냄)에서 그가 '밀고 있는' 2012년 체제라는 개념이 바로 그러하다. 그 말을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기자가 정욱식으로부터 2012년 체제란 표현을 처음 들었던 건 작년 가을이었고, 늘 그랬듯이 무릎을 탁 쳤다.

▲ <오바마의 미국과 한반도, 그리고 2012년 체제>(정욱식 지음, 레디앙 펴냄). ⓒ프레시안
정욱식이 2012년을 구시대의 질서가 끝나고 새로운 체제가 형성되는 출발점으로 규정한 것은 아마도 한반도 정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거의 모든 나라들이 그 해에 중요한 선거를 치른다는 사실에서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한국과 미국에서는 총선과 대선이 있다. 러시아와 대만에서도 대선이 있다. 중국에서는 선거는 아니지만 후진타오 체제가 막을 내리고 시진핑 체제의 등장이 예정되어 있다.

북한에는 선거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수두룩하다. 북한이 "강성대국의 대문을 여는 해"로 공언한 2012년은 김일성 탄생 100주년이자 김정일 국방위위원장 탄생 70주년이다.

이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그러나 한꺼번에 모아 보려는 시도는 별로 없었던 객관적 사실들의 나열이다. 그러나 정욱식은 이러한 팩트들을 '손쉽게' 모은 뒤,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걸 '2012년 체제'라고 명명한다.

좁은 의미의 2012년 체제는 1953년 이래 정전체제를 유지해오던 한반도가 평화체제로 대체될 수 있는지 여부가 판가름 나는 해이다. 이때 2012년 체제의 주요 구성요소는 한반도 평화체제, 북핵 문제 해결, 북미관계 정상화 등을 꼽을 수 있다.

넓은 의미의 2012년 체제는 남북관계가 연합제 수준으로 발전하고, 포스트 김정일 시대의 북한이 선군정치에서 선민(先民)정치로 바뀌며,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에 따라 한미동맹의 군사적 성격과 종속성이 상당 수준 완화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또한 동북아 차원에서는 북일 관계가 정상화되고, 동북아 평화안보체제의 기틀이 마련되는 것을 주요 구성 내용으로 한다.

정욱식은 "광의의 2012년 체제는 협의의 2012년 체제의 달성 여부에 달려 있다"며 이렇게 말한다.

"관건은 '한반도의 선택'에 있다. 2012년을 45년 체제(해방과 분단), 53년 체제(한반도 정전과 냉전의 고착화), 87년 체제(한국의 민주화), 97년 체제(IMF 위기와 최초의 민주적 정권 교체)에 이어 한반도 현대사에서 또 하나의 '체제'라고 부를 수 있는 전환기를 만들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2012년 체제'는 희망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내용을 담아야 한다. 만약 그때까지 좁은 의미의 2012년 체제를 달성하지 못하면, 한반도는 2012년을 찍고 정반대의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

2012년은 포스트 김정일 시대의 윤곽이 드러나게 될 텐데, 그때까지 핵문제를 풀지 못하면 포스트 김정일 시대에도 북한은 선군정치를 통치 이념으로 삼으면서 핵무기를 핵심적인 수단으로 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한반도는 핵의 시대에 접어들고, 군사적 긴장과 군비경쟁은 더욱 격화될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명박 정부의 대외정책이 2012년 체제를 능동적이고 자주적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유실시킬 위험성을 낳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발상을 전환하면, 이명박 정부는 2012년 치제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 될 수 있다. 20년을 끌어 온 북핵문제를 해결하고, 정전체제가 환갑이 되기 전에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이는 6.15와 10.4선언을 훨씬 능가하는 업적이 될 수 있다."(
382쪽)

상상력과 통찰력, 그리고 위트까지

<오바마의 미국과 한반도, 그리고 2012년 체제>에는 2012년 체제처럼 통찰력있는 개념들이 여럿 등장해 현재와 미래의 한반도가 어떤 얼개로 이뤄지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중도적·진보적 국제문제 전문가들로 이뤄진 '피닉스 이니셔티브'가 내놓은 보고서처럼 보통의 분석가들에겐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중요한 구상을 조명함으로써 오바마의 '스마트 외교'가 추구하는 핵심 콘텐츠를 소개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욱식은 이러한 사실들을 그저 전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언제나처럼 상상력이라는 실로 꿰어 큰 그림을 그린다.

특히 책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가상회의 장면은 그의 분석력과 상상력, 그리고 위트가 한꺼번에 녹아 있는 대목이다.

2012년 11월 21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열리는 가상 6자 정상회담 장면을 보자. 이날 처음으로 다자 정상회의에 참석한 김정일은 이렇게 너스레를 떤다.

"참 재밌습니다. 일방주의로 많은 비난을 받았던 부시 정부가 동북아에 다자주의의 기초를 닦았으니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모두 부시 대통령에게 감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우리 6자가 함께 모일 수나 있었겠습니까?"

그러자 오바마가 2년 전 평양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한다.

"김정일 위원장님과 직접 만난 것이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특히 그때 카드섹션으로 핵실험을 하면서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하신 말씀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정욱식에게서 이처럼 예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낄낄거릴 수 있는 글이 나오는 것은 평화네트워크라는 단체를 만들고 평화운동에 뛰어든 후 10년간 그의 탐구와 실천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웅변한다.

정욱식은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수 천 편의 글을 쓰고, 수많은 토론회에 나가 논쟁을 벌이고, '파병 반대' 혹은 'MD 반대' 시위를 하고, 평화운동가들의 학술행사나 남북 공동 행사가 있으면 실무 책임자로 뛰면서도 혼자 혹은 함께 10여권의 책을 써 내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줬다.

그랬던 그가 이제 '겨우' 38세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한국 평화운동의 미래는 창창할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욱식 같은 '젊은이'가 한 10명만 더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렇게만 되면 조중동이 지배하는 냉전적 안보 담론의 지형은 근본적으로 흔들릴 것이다. '박봉'이라고도 하기에도 민망한 돈을 받고 평화네트워크에 나가는 그의 동료들이 그렇게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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