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의 굴욕적인 언론 관련법 '합의'는 새삼 대의제의 위기를 실감케 했다. 국민의 70% 가까이가 반대하는 법안을 강행처리하는 여당이나, 국민의 염원을 무시하고 여당과 '합의'하는 야당은 국민의 상식과 공감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입법부는 국민을 대표하지 못하고 있다. 불통의 정치를 내세우는 행정부는 두 말할 필요가 없겠다. 최근에는 사법부까지 가세했다. 정권의 이해에 맞추어 특정 재판을 몰아주는 사법부의 행태는 국민의 이해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국민을 들먹이며 대의의 정당성을 말하지만 실상은 30% 남짓의 기득권을 충실히 대의(代議)하며 나머지 70%의 국민을 배의(背議)의하는 형국이다.
총체적인 대의제의 위기이다. 대의가 배의로 바뀌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대의를 독점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수많은 대의 제도가 공존하고 각각이 서로를 견제·점검하여 대의의 그물코를 촘촘히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
<1박2일>·<전국노래자랑>, 한국인 '재현'하지만…
2차 대의 제도로서 언론의 역할은 막중하다. 언론을 제 4부이자 감시견이라 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제 4부이자 제 2차 대의제도인 언론 또한 국민 대다수와는 거리가 있다. 신문은 암담하다. 조중동의 카르텔이 여론을 독점하고 호도한다. 이들은 제 1차 대의제의 위기를 공유한다. 공모·훈수·방관을 통해 국민을 편 가르고 갈등을 조장하기 바쁘다. 방송은 어떤가? 방송은 그와는 달랐던 것 같다. 최근 몇 년간의 여론조사는 국민들이 신문보다 방송에 높은 신뢰도를 부여함을 보여준다. 한국적 다공영 1민영 방송 시스템은 정파의 편보다는 국민의 편으로 방송을 들어올 수 있도록 한 구조적 배경이었다.
허나 이마저도 무너지고 있다. 다공영 방송 시스템의 가장 중심에 선 '국민의 방송' KBS가 흔들리며 방송계에 일대 파란이 일고 있다.
본래 대의는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하기에 이는 KBS의 이중적 위기라 할 수 있다. 저명한 탈식민주의 이론가 가야트리 스피박(G. Spivak)은 대의의 첫 번째 의미를 재현(re-presentation)으로 정리했다. 다시 보여줌을 의미하는 재현(re-presentation)은 주로 미학의 영역에서 논의되어왔다. 플라톤의 예를 사용한다면 동굴에 갇힌 수인이 벽에 투영된 그림자로 세상을 인식한다고 할 때, 그림자는 이데아의 재현이다. 예술작품의 경우는 신의 뜻의 재-현이겠다. 마찬가지로 TV는 현실의 재현이다.
이러한 재현에 있어 KBS는 탁월했음을 인정한다. 신빈곤층의 일상을 담는 <현장르포 동행>은 공영방송의 책무에 충실한 프로그램이다. KBS는 신자유주의의 양극화로 어려움을 겪는 우리 현실을 충실하게 재현했다. 고개를 돌리고 싶을 정도로 처참한 신빈곤층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다큐멘터리 3일>도 빼 놓을 수 없다. 3일을 상주하며 담담하게 기록한 특정한 공간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늘의 한국인에 대한 재현이다. 비단 다큐멘터리에만 이를 한정할 수 없다. <1박 2일>은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그 속에 살고 있는 한국인의 모습을 따듯하게 담고 있고 <전국노래자랑>은 평범한 사람들의 흥에 겨운 모습을 잘 재현한다. <불후의 명곡>은 시대를 풍미한 가요를 통해 시대의 대중적·공통적 감수성을 다시 일깨운다(재현한다).
<현장르포 동행>에 등장한 대통령, 슬픈 코미디
문제는 정치의 영역에서 나온다. 스피박이 정리한 대의의 두 번째 의미는 누군가를 위해 말한다는 의미의 대표(representative)이다. 스피박은 영국 식민지 치하 인도의 과부 순장 풍습을 예로 삼는다. 점령국 영국인은 과부 순장이 전근대적이라 비판하며 이를 철폐코자 한다. 반면 피점령국 인도 민족주의자는 과부 순장을 인도의 전통 풍습이라 옹호한다. 이 와중에 정작 순장당하는 과부는 영국의 식민 지배자와 인도의 남성 민족주의자 양자 모두에 있어서 대표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고발한다. 대표하는 자는 대표되는 자를 왜곡할 수박에 없는 숙명을 갖는다. 그렇기에 과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이상 대표자는 왜곡에 대한 막중한 성찰의 의무를 갖는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KBS가 과연 국민을 대표하는가를 생각해보자. KBS가 과연 대표자로서 성찰의 의무를 지려 하는가. KBS는 재현에 있어서는 탁월했지만 대표에 있어서 까지는 그렇질 못했다. KBS는 대표자가 반드시 가져야 할 성찰의 의무를 부담스러워했다. 보신각종 타종 행사에서 위정자의 무능과 거짓을 탓하는 국민의 목소리를 지운 사건은 그 상징적 예다. KBS는 현장을 재현하는데 머물고자 했지 국민의 뜻을 대표하려는 의지까지는 갖지 않았다. <현장르포 동행>에 등장한 대통령의 모습 또한 슬픈 코미디였다. 가진 자를 위한 정책을 대표하는 그가 신빈곤층의 대표자가 되는 웃지 못 할 재현은 KBS가 정치의 영역을 괄호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탐사보도팀의 사실상 해체와 비판적 시사 프로그램의 무력화는 이러한 혐의를 더욱 짙게 한다. 그 와중에 우리네 서글픈 현실은 재현만 될 뿐 그 어떠한 해결책도 갖지 못하는 것이 되었다. 재현들에 질서를 부여하고 방향성을 제시해야할 대표자-KBS가 그 역할과 성찰에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국민 스스로가 방송에 나와 제 목소리를 내려는 시도조차 가로막히고 있다는 측면에서 대의 제도로서 KBS의 위기는 심각하다. 최근 KBS는 옴부즈맨 프로그램에 출현한 시청자 평가원의 발언을 무단으로 삭제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시청자의 제 목소리를 내기 위해 만든 공간을 KBS가 듣기 좋은 말을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시청자 액세스 프로그램 <열린 채널>도 사정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최근 방송시간이 25분에서 30분으로 늘어난 것은 고무적이지만 2001년부터 시작한 방송 역사를 생각한다면 여전히 부족하다. 더군다나 프로그램의 편집과 편성을 둘러싼 KBS와 시민 제작자 사이의 다툼은 끊이지 않는다. KBS는 논란을 회피하려 하고 시민 제작자는 KBS를 불신한다. 반면 KBS는 대통령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데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앞장선다. 국민의 목소리보단 위정자의 목소리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당연히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KBS는 현재 누구를 대표하는가? 국민인가 정권인가? 국민의 방송인가 국가의 방송인가?
'타협, 굴복, 복종, 영합'의 NHK, KBS의 비극적 미래인가
결론적으로 현재의 KBS는 미학적으로는 성공적이나 정치적으로는 무력하다. 나열(재현)은 있으나 이를 꿰어내 국민을 대의(대표)하려는 의지와 성찰을 갖지 못한다. 1차 대의 제도가 망가진 상황 속에서 KBS는 급속하게 1차 대의 제도의 난파선과 같은 운명에 처하려 한다. 우리는 이러한 공영방송의 비극적 미래를 가까운 일본에서 확인할 수 있다. 탁월한 다큐멘터리의 성과와 반비례하여 권력과의 관계에 있어 "타협에서 굴복으로, 굴복에서 복종으로, 복종에서 영합으로" 변신한 NHK는 KBS의 오래된 미래일 수 있다. 일본의 급속한 보수화와 우경화에는 국민을 대표하지 못한 NHK의 책임이 크다. 마찬가지로 지금 KBS는 국민에 대한 대표보다는 국민의 재현에만 안주하고 있다. 사라진 정치의 영역을 국가가 대신하고 국민의 방송이기보다는 국가의 방송이 되고 있다. 힘들게 국민들이 찾아준,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지난 몇 년간 탁월한 성과를 내왔던 KBS였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오늘 KBS의 배의와 배신이 남긴 뒷맛은 무척이나 쓰고 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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