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말 프랑스인의 정체성은 '가장 기독교적인' 프랑스왕의 백성이라는 점, 프랑스어를 말하고 쓰는 것, 프랑스 영토, 살리 법, 고대로부터의 문화적 전통, 프랑스 정치제도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것에 있었다. 그리고 그 핵심은 무엇보다도 왕 개인이었다.
이런 추세는 16세기 전반에도 계속되었다. 그래서 프랑스왕이 카톨릭교회의 '큰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점차 로마교회로부터의 독립성을 추구해 나갔다. 그리고 그것은 카톨릭의 1516년 볼로냐 공의회가 프랑스왕을 명목으로는 아니라 해도 실질적으로 갈리칸교회의 수장으로 인정함으로써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
16세기 전반에는 왕의 중앙집권도 강화되었다. 이는 프랑소아 1세가 시작한 관직이나 귀족 칭호의 판매 때문이다. 그래서 귀족의 권력이 약화되며 전문 관료집단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이를 싫어했으나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국가(état)라는 단어도 그 이전의 '신분(身分)'이라는 뜻에서 근대적인 의미의 '정부'나 '정치영역'으로 점차 바뀌어 갔다.
1560년대에 이런 추세에 제동이 걸렸다. 신, 구교도 사이의 유그노 전쟁(1562-1598) 때문이다. 종교개혁 이후 프랑스에는 유그노로 불린 칼뱅 교도들이 점점 늘어났으며 1562년에 는 그 교회가 약 2천 개를 헤아릴 정도로 확대되었다.
그러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1560년대 초부터 카톨릭연맹이 지방 단위에서 생기기 시작했고 1576년에 전국적인 카톨릭연맹이 조직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559년에 국왕인 앙리 2세가 어린 아들을 남기고 죽음으로써 혼란이 시작되었다.
이미 1560년이면 귀족이나, 삼부회의 제3신분은 중앙집권화와, 이탈리아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곤란에 대해 왕에게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이것이 유그노에 대한 적대감과 결합하며 30여년에 걸친 유그노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 종교전쟁으로 프랑스인들은 1572년의 바톨로뮤 대학살을 포함하여 큰 고통을 겪었다. 그럼에도 카톨릭과 유그노의 두 세력은 모두 왕을 사악한 무리들로부터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웠을 뿐 왕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이 전쟁은 두 세력의 타협으로 끝났다. 왕권이 약화된 상황에서 왕이 카톨릭 편만을 들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그노인 나바르공 앙리 3세가 1589년에 카톨릭으로 개종한 뒤 앙리 4세로 왕위에 오르고 그가 1598년에 낭트 칙령으로 유그노에게 관용을 베풂으로써 분란은 가라앉았다.
이때 앙리 4세는 분열된 민심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나는 프랑스인으로서의 너희들에게 부탁한다. -- 나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나의 왕국에서 평화롭게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신앙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똑같이 나의, 그리고 프랑스왕의 충실한 종복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모두 프랑스인이며 같은 나라의 동료-시민들이다"라고 말했다. 왕이 프랑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 앙리 4세 |
17세기에 들어오며 프랑스에서는 절대왕정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종교전쟁 가운데에서 고통을 겪은 프랑스인들이 왕의 강력한 권력을 원했기 때문이다. 이는 왕권신수설에 의존했는데 왕권신수설은 1588년에 Pierre de Belloy의 <왕의 권위>라는 글에서 처음 나타난다.
이 이론에 의하면 모든 권력은 왕에게서 나오며 백성에게는 복종 외에 다른 권리는 없었다. 정당한 통치자는 정의로우므로 왕에 대해 저항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왕은 신으로부터 직접 권위를 부여받으므로 왕권에 저항하는 것은 십계명과 신의 명령에 저항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왕권신수설은 그 후 한 세기반 동안 강력한 힘을 행사하며 프랑스 절대왕정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왕권신수설은 역설적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왕권을 파괴하고 민족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그것은 왕권신수설이 신에게 의존했으나 그때의 신은 탈카톨릭화한 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 신성이 카톨릭으로부터 분리되어 추상화됨으로써 프랑스 왕의 권위가 세속성 위에 서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7세기에 들어오면 프랑스인의 정체성은 점차 종교로부터 떠나 정치로 옮겨가게 된다.
이는 루이 13세의 섭정으로서 국가이성을 추구했던 리슐리외 추기경 하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또 루이 14세(재위 1643-1715)시기에 가면 교황이나 예수조차 군주권의 우월성에 도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하여 여전히 왕이 민족적 정체성의 중심을 차지할 수 있었다.
1715년에 귀족계급을 대표하는 파리 고등법원은 '전체 국가는 그의 안에 있으며 인민의 의지는 그의 의지 안에 있다'고 언명했는데 이는 왕이 최고 충성의 대상이고 신성함의 구현이며 개인화된 국가라는 점을 인정하는 말이었다.
이것은 17세기에 유럽국가들의 절대주의 체제하에서, 공화국에 대한 사랑과 공동의 자유에 대한 사랑으로 인식되었던 고대로부터 내려온 공화주의적 애국주의가 쇠퇴하고 그것이 국가나 군주에 대한 사랑으로 대치된 것과 흐름을 같이 한다. 조국(patria)이 반드시 공화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고, 애국주의(patriotism)가 공화국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왕과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1750년경부터 이런 사정이 바뀌게 된다. 그것은 두 가지 요인 때문이다. 하나는 이 시기에 민족의 주체를 둘러싼 다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과 귀족이 서로가 민족을 대변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루이 15세가 친정을 하기까지 섭정(1715-22)이었던 오를레앙 공작은 절대왕정 하에서 크게 성장한 국가기구를 고위 귀족의 통제 하에 집어넣음으로써 왕권을 약화시켰다. 그리하여 과거에 스스로를, 왕권을 제약하는 불가결한 힘으로 간주해 왔던 고등법원들이 다시 전통적인 힘을 어느 정도 회복하게 되었다.
왕권에 비판적인 귀족들은 자신들을 민족과 동일시했다. 그리고 AD 5세기 이래 그들이 간직해 왔다고 믿은, 군주의 행위를 견제하거나 무효화할 수 있는 법적인 권리를 주장했고 그것을 민족의 권리로 포장했다. 그리하여 1730년대에는 고등법원을 민족의 '원로원'으로 부르는 사람들도 등장했다.
이에 대해 군주주의자들은 프랑스 '민족'을 부인하지는 않았으나 민족은 군주의 개인에 의해 표현되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럼에도 이런 주장은 이미 잘 먹혀들어가지 않았다. 1766년에 루이 15세가 고등법원들에 대해 그들이 '민족의 기관(organ)을 대표하고, 민족의 자유와 이익, 권리의 보호자인 것처럼 가장하는 것은 잘못이며 반대로 민족의 권리와 이익은 - 일부 사람들이 그것을 군주와 분리시키려고 하지만 - 필연적으로 나에게 있다'고 선언한 것은 이런 상황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다. 이미 왕이 민족의 구심점이었던 시기는 지난 것이다.
다른 하나의 요인은 영국과의 경쟁이다. 특히 여기에서는 7년전쟁(1756-63)에서의 패배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랑스는 루이 14세 이후에 유럽에서의 지도권을 점차 상실했으나 이제 아메리카와 인도에서 영국에게 패배함으로써 제국의 꿈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이 시기에 불붙은 민족주의에는 영국에 대한 원한과 적개심이 큰 역할을 했다. 루소, 마블리, 디드로, 돌바흐, 마라 같은 지식인들이 모두 반영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특히 루소가 그렇다. 프랑스가 미국독립전쟁에 참전한 것에도 반영감정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참전 프랑스군의 사령관이었던 라파예트 장군이 '내가 아메리카의 대의에 참여한 것은 나의 조국에 대한 사랑, 그 적에게 굴욕을 주려는 나의 욕구' 때문이라고 말한 데에서도 잘 알 수 있다.
1765년에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상연된 '깔레의 포위'라는 애국적 연극은 대중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또 이 시기의 언론들은 반영적인 태도와 함께 애국심을 매우 강조했고 대중들은 이에 열렬히 반응했다. 이렇게 1770, 80년대의 프랑스는 민족적 감정이 매우 고조되고 사회 전반적으로도 상당히 확산된 상태에 있었다.
이런 감정과 의식은 1789년의 프랑스혁명에 가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대중성이 훨씬 커지며 더 이상 왕이나 귀족이 민족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중적 민족주의의 시대가 열린다. 혁명 속에서의 이런 변화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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