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자체가 살인무기가 된 권력
이렇게 말하면 과연 극단적일까? 아니다. 이명박 정권 스스로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있다. 그대로 두면 어떤 위험이 또다시 누구의 생명을 겨냥할지 모른다. 이명박 정권은 존재 자체가 살인무기가 되고 있다.
한마디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정부다. 사회적 약자를 적으로 삼는 폭력집단이다. 민주주의를 진압, 체포하는 파시스트 권력이다. 강자의 횡포를 저지해야 할 법을 강자의 칼로 휘두르고 있다. 국민의 공복을 권력의 용역으로 삼고 있다. 경찰만 용역을 동원한 것이 아니다. 경찰과 검찰이 모두 그 자체로 이미 권력의 용역이다. 자본과 권력의 탐욕이 하나가 된 괴물이다.
괴물이 된 정부는 인간을 잡아먹는다.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없다. 아니 도리어, 당연한 것을 문제 삼는다고 반격한다. 가해자가 피해자로, 피해자가 가해자로 둔갑하는 일을 벌이면서 인간으로서의 기본 권리를 공격한다.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는 공간만큼 이 괴물의 활동범위는 보장된다.
식인정치(食人政治)
루쉰(魯迅)은 그의 <광인일기> 마지막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인간을 먹은 일이 없는 아이가 아직 있는지 모르겠다. 그 아이를 찾아 나서라." 우리는 지금 인간을 잡아먹는 광인의 사고와 주장과 행동을 정치로 받아들이는 비극적인 현실에 놓여 있다.
인간을 먹고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으면, 정치는 식인(食人)의 금기를 더는 지켜내지 못하게 된다. 권력은 날이 갈수록 보다 더 포악해질 것이며, 억울한 희생자들은 권력에 의해 죄인으로 몰려 더더욱 심각한 모욕을 받고 그 무덤마저 아무렇게나 짓밟히고 말 것이다.
이에 대해 항의하고 저항하는 이들은 입에 재갈이 물려지고 팔에 포승이 둘러쳐지며 발목에는 족쇄가 채워질 것이다. "두들겨 맞았다"고 폭로하면 또 맞고, "저 자가 그랬다"고 고발하면 "네가 그랬잖아" 하고 붙들려 들어가고 "네가 죽였잖아"하면 "너도 죽어"하고 위협한다.
사건 재발을 보장한 대통령 이명박의 발언
대통령 이명박은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책임자 처벌은 급하지 않다면서 재발방지가 우선이라고 한다. 억울한 죽음을 가져온 사건의 책임자를 보호하는 살인무기가 된 권력이 있는 한 이런 사태의 재발은 필연적이다.
아니, 이명박의 발언은 이 비극의 재발을 더욱 강력하게 보장한 셈이다. 내가 뒷감당 할 테니 안심하고, 살상의 위험을 염두에 두고 할 일을 못하는 경우가 없게 하라는 지시와 다를 바 없으니 사람 목숨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일하다 그깟 목숨 다섯인가 여섯 죽은 것을 가지고 이 난리냐는 것이다. 그렇게 따지고 들면 누가 일 하겠느냐고 반박한다.
이런 정권이 일 열심히 할수록 국민은 날로 더 죽어나갈 것이다.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사망하게 되어갈 것이다. 국민의 목숨에 책임지지 않는 정부는 존립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폐기의 대상이다. 그것도 빠르면 빠를수록 공익이다.
삽질하며 절망을 키우는 정부
여당 단독 국회로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자 그 부당성에 경악해서 연장을 동원해 문 따고 들어가 제지하려는 사람들을 폭력범으로 모는 정치, 그러면 잠긴 문을 "열려라 깨" 하고 주문이라도 외워야 한다는 말인가? 대통령 찬양은 용납되지만 대통령 비판하는 자유는 사이버 모욕죄로 잡아들이는 권력, 정부의 조처에 대한 시민적 기본권인 집단적 항의표시를 테러행위로 몰아 진압하는 정권은 존속하면 할수록 국민적 절망의 크기는 커진다.
이 모든 비극의 중심에는 대통령 이명박과 그와 한패가 된 자들이 있다. 이들이 잘하는 것은 오로지 삽질이다. 이들이 주력하는 것은 자기들만의 천국 만들기다.
이명박은 왜 삽질할까? 삽으로 퍼내서 버릴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원주민 강제축출이다. 그 삽질 한 번에 부자들은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진다. 아니 그것 정도라면 또 모르겠거니와, 그 삽에 찍혀 죽어나간다. 사람도, 자연도, 이 나라의 미래도 그렇게 삽질당해 버려지고 이명박과에 속한 종만 생존하도록 만드는 역(逆)진화가 전개된다. 그것은 그 외의 종의 멸종을 목표로 한다.
포도원 비유
성서에는 이런 예수의 비유가 있다. 어떤 주인이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맡기고 떠난다. 때가 되어 소출을 받으러 하인을 보내지만 포도원을 맡은 자들은 하인을 두드려 팬다. 그러기를 여러 차례, 주인의 아들은 그래도 존중하겠지 하고 보냈지만 이들은 이참에 잘 되었다 하고 그를 죽이고 밖에 그 시신을 버린다. 이에 주인은 결국 부대를 이끌고 돌아와 이들을 축출하고 포도원을 새로운 사람들에게 넘긴다.
여기서 주인은 하늘이고 포도원은 나라이며 이를 맡은 자들은 권력자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포도원이 애초에 자신들의 것이 된 양 거만해지고 포악해진다. 하늘의 뜻을 묵살하고 이를 전하는 사람들을 폭력으로 진압한다. 그들은 마침내 사람의 목숨까지 빼앗아 자기들의 권세를 온 세상에 드러내어 뻐긴다. 그러면 모두가 이들을 두려워할 줄로 믿는다. 이들은 어느새 손을 댈 수 없는 무서운 괴물이 된 것이다.
밖에 버려진 시신은 그러나 이들의 권세가 강함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폭력과 악을 증명하는 분명한 증거가 된다. 결국 어찌 될까? 하늘은 이들을 응징하고, 진정 이 포도원을 잘 경작해서 하늘의 뜻에 따라 결실을 나눌 이들에게 그 권세를 넘긴다.
"명박도 이야기"의 결말
이 일은 이미 진행되어가고 있다. 당사자들만 그걸 모를 뿐이다. 자신들의 죄와 악이 어떻게 기록되어가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한다. 자신들의 힘 앞에서 세상의 약자들이 모두 움츠리고 떨 줄로 알지만 그건 오산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명박도(明博島) 이야기"가 설정하는 이 섬의 멸망 시나리오는 의미심장하다. 탄"핵"이라는 핵폭발이나 민주"화"의 불길로 독한 재, 독"재"가 날려 그 재에 스스로 질식사하는 이 섬의 운명은 지금대로라면 정해진 길이다.
성서 이야기 하나 더 해보자. 자신의 형제를 처 죽인 카인에게 하느님이 묻는다.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그러자 카인은 발뺌을 한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어디 증거나 증인이 있으면 대보라는 것이다. 그걸 왜 내게 묻는가라고 반박한다. 하느님의 대답은 분명했다.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너의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는다."
땅에서 울부짖는 소리들
제가 죽여 놓고 모르쇠하면서 땅에서 울부짖는 피눈물의 소리를, 이 역사가 절규하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자들은 모두 카인이다. 그 카인이 또 다른 아벨을 다시 죽이기 전에 그 손에서 무기를 빼앗아야 한다. 아니, 괴물이 된 카인을 권좌에 그대로 앉혀 두는 백성은 자멸을 선택하는 이들이다.
함석헌 선생의 말씀이 백번 옳다. 깨어있는 백성이라야 산다. 이제 봄은 오고, 언 땅에서 잠자고 있던 역사가 기지개를 펴는 날이 반드시 온다. 악행과 죄를 쌓아가는 자는 죽고, 생명과 의를 구하는 자는 산다.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을 퇴치하는 것은 이 시대의 의다. 들고 있는 깃발이 무엇이든 상관치 말고 괴물퇴치 부대에 적극 합류하자, 그것이 우리 모두가 함께 사는 길이다.
괴물이 사라지지 않는 마을에 더 이상 평화는 없다. 많이 모이면 모일수록 그 부대는 이미 승리한다. 또 다른 대형 참사를 가져오기 전에 괴물이 고꾸라지는 모습을 정말이지 꼭 보고 싶지 않은가? 이건 실제 상황 D-War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