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자 인권 보호에 극단적으로 치우쳤던 것을 정상화한 것이다."
"언론이 시류와 상업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자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나"
한국언론재단이 9일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 12층에서 연 '언론의 범죄 피의자 얼굴 공개와 인권에 관한 라운드 테이블'에서는 지상파 3사와 조·중·동 등 일부 신문들이 연쇄 살인 피의자 강모 씨의 얼굴을 공개한 것이 정당한지를 두고 치열한 토론이 벌어졌다.
특히 이날 토론회에서는 가장 먼저 강모 씨의 얼굴을 공개한 <조선일보>의 정권현 사회부 차장과 지면을 통해 비공개 방침을 밝힌 <한국일보>의 김상철 사회부 차장의 의견이 팽팽히 맞서 눈길을 끌었다.
"각 언론사가 자율 결정하면 된다" vs "상업주의 우려"
정권현 차장은 <조선일보>가 그간 범죄 피의자 얼굴 공개를 꾸준히 주장해왔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2004년까지 흉악범 사진 공개는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다가 이후 피의자의 인권을 극단적으로 보호하는 쪽으로 시계추가 기울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 차장은 특히 국가인권위원회를 겨냥해 "사법 기관도 아닌 인권위원회의 권고를 수용한 것은 경찰이 '오버'한 것으로 코미디가 따로 없다"고 비판하면서 "언론도 이를 따른 것은 언론 선배가 쟁취한 언론 자유를 스스로 목조르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정 차장은 이어서 "이제는 정상화할 필요가 있다"며 "피의자의 얼굴 공개는 각 언론사가 스스로 판단하면 되는 것이며 그것이 위법하다면 사법부의 판단에 맡기면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얼굴 공개는 법률 공방을 벌일 문제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이에 김상철 <한국일보> 차장은 "원칙적으로 언론 각각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면서도 "그러나 <한국일보>가 이 문제에서 신중했던 것은 공개의 기준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하는 현실적인 문제, 그리고 부작용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 차장은 "<조선일보>가 먼저 공개하고 잇따라 다른 언론이 공개했으나, 언론사마다 충분한 성찰과 고민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본다"며 "언론은 항상 대세를 추종하고 시류에 쉽게 영합하고 상업적으로 매몰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차장은 "피의자의 얼굴 공개가 반복되면 '누가 먼저 입수해서 독자의 시선을 끌 수 있는가' 등의 경쟁이 분명히 나타날 것"이라며 "얼마전 신정아 사건 같은 경우가 단적인 예"라고 지적했다.
김 차장은 "신정아 사건을 놓고 언론이 얼마나 보도 가치가 있는 공익에 부합하는 사안인지, 또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지 않았는지 신중하게 검토했느냐"고 반문하면서 "그런 일이 계속 되풀이 되지 않을 보장이 없다"고 덧붙였다.
"이번 사건은 공적 사건" vs "사건과 인물은 별개"
이날 토론회의 참석자들은 이번 사건이 공공의 관심사의 대상이 되는 '공적 사건'이냐를 두고도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표창원 경찰대 행정학과 교수는 "이번 사건은 너무나 명백하게 공적 사건"이라며 "살인도 원한이나 금품, 치정으로 인한 사건이 아니라 뚜렷한 이유가 없이 여러 명이 피해를 당했기 때문에 누구나 당할 수있는 범죄로 공적 사건으로 봐야한다"고 주장했다.
표 교수는 "국민의 알권리는 정치적 차원의 고차원적인 것이 아니라 오락거리까지 포함되는 기본적인 관심을 말한다"면서 "엘리트주의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정훈 변호사는 "법원은 범죄 사실과 범죄자를 구분한다"면서 "범죄 사실은 공적인 관심사이나 범죄자가 누구냐는 공적인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이 문제를 바라보는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 변호사는 "법원이 이번 사건을 어떻게 판단할지 예측하기 어려우나 이번 피의자를 공적 인물로 판단하더라도 익명으로 남아있어야 하는 공적인 인물이 있으며 그의 신원 공개 여부는 별개의 문제"라고 덧붙였다.
김서중 성공회대 교수(신문방송학)도 정 변호사의 말에 공감을 표시했다. 김 교수는 "'국민의 알 권리'란 국민의 판단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지 호기심을 채워주기 위한 것으로 알 권리를 확대·해석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가족이 감내해야"…"가족 보호를 위해서도 비공개해야"
언론이 피의자의 얼굴을 공개함에 따라 그의 가족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생기는 등 얼굴 공개에 대한 부작용에 대해서도 입장이 나뉘었다.
표창원 교수는 "피의자의 얼굴 공개가 자녀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에 안 된다면 자녀를 둔 피의자는 공개 안하고 자녀 없는 총각은 공개할 것이냐"며 "사건의 본질과 분리해서 봐야 하는 문제"라고 주장했다.
<조선일보> 정권현 차장은 "전문가들에게 물어보니 가족들은 감내해야 한다는 결론"이라며 "초상권 문제는 법률적으로도 개인의 권리이지 가족의 권리는 아니다. 그런 것을 주장하려면 피의자의 가족들이 피해자의 가족들에게 배상을 해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김서중 교수는 "물론 초상권은 개인의 권리이고 가족의 권리는 아니나 얼굴 공개로 인해 피해를 받는 사람은 가족이고 그 이유만으로도 보호가 되어야 한다"며 "얼굴 공개에 따라 받을 수 있는 가족의 피해는 훨씬 커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일보> 김상철 차장은 "가족의 문제 외에도 피의자의 얼굴을 공개할 경우 외모에 따라 편견이 생길 수 있다"며 "만약 칼기 폭파범인 김현희 씨가 아주 얼굴이 흉악한 범죄형의 남성 외모를 가졌다면 특별 사면에 반발이 없었을까, 또 이번 피의자가 험악한 인상이라면 여론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악화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성낙인 교수 "흉악범 얼굴 공개에 찬성"
한편, 이날 발제를 맡은 성낙인 서울대 법대 교수는 누가 봐도 중대한 범죄자이며 그 죄질이 극악무도한 경우부터 우선 얼굴 공개를 하면서 부작용을 점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성 교수도 "경찰청에서 내비친 것과 같은 가칭 '흉악범 얼굴 공개에 관한 법률'처럼 예외를 위한 법규를 마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반대했다.
성 교수는 현재 '기자는 당사자의 동의 없이 형사사건의 피의자를 촬영하거나 사진이나 영상을 보도해서는 안 된다. 다만 현행범과 공인의 경우는 예외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신문윤리 실천요강'을 두고 "경찰관 직무규칙과 마찬가지로 공개의 가능성을 너무 소극적으로 규정하고 있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현재 한국신문윤리위원회는 2009년 1월부터 "형사사건 피의자 및 참고인을 촬영하거나 사진이나 영상을 보도할 때에는 최대한 공익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개정을 추진 중이다. 이에 김경호 한국기자협회 회장은 "개정 내용은 각 언론사에서 공익성을 판단해 피의자 사진을 공개해도 된다는 해석으로 보다 넓게 규정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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