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 진신의 쿠데타(壬申の亂)
텐지 천황은 등극한 후 잦은 병 치례를 합니다. 텐지 천황 사후에 황위 계승전쟁으로 일어난 것이 바로 '진신노난(壬申の亂)' 즉 '진신의 쿠데타'입니다. 이것은 텐지 천황의 아들과 텐무 천황이 천황 정권을 두고 다툰 유명한 전쟁입니다. 이 사건은 텐지천황의 동생이 조카를 죽이고 등극한 사건으로 한국의 역사에서는 세조의 왕위 찬탈과도 유사하다고 보면 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진신노난(壬申の亂)은 백제 구원을 총지휘했던 텐지(天智) 천황의 동생인 오샤마(大海人) 황자와 맏아들인 오토모(大友) 황자가 황위를 두고 내전을 크게 벌렸는데, 오샤마가 오토모를 제압하고 등극하여 텐무(天武) 천황으로 등극(673)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다이카 개신(大化改新)과 같은 궁중 쿠데타와는 달리 두 진영이 정면으로 무력 충돌한 내전이었고 오샤마 황자는 실력으로 오토모를 제압하고 즉위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쿠데타인데도 특이하게 『일본서기』에 그 전말이 상세히 기록되어있습니다. 『일본서기』에 나타난 기록을 따라 사건의 전개과정을 간략히 보고 넘어갑시다.1)
텐지 천황은 후계 문제를 고민하던 중 오토모를 태정대신에 임명하여 사실상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난 뒤, 병상에서 오샤마를 부릅니다. 오샤마가 천황을 배알하기 위해 들어서는데 평소 오샤마와 가까이 지내던 소가노오미야스마로(蘇賀臣安麻侶)가 오샤마에게 (음모나 함정일지도 모르니) 주의하라고 일러줍니다.
텐지 천황은 오샤마에게 "짐은 병이 깊어서 후사를 그대에게 맡긴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오샤마는 "신은 불행하게도 원래 병이 많습니다. 어찌 제가 사직을 보존할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황후나 오토모 황자를 태자로 하십시오. 저는 오늘로 출가하여 폐하를 위해 공덕을 쌓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천황이 허락하고 그날로 법복(法服)을 입었습니다.
만약 텐지 천황이 황위를 물려준다고 덥석 받았더라면 오샤마는 죽음을 면치 못했겠지요. 오샤마는 부하들과 같이 중이 되어 요시노(吉野)로 들어가 은거하여 힘을 기르는데 이 당시 사람들은 오샤마를 "범에게 날개를 달아 놓아주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2) 텐지 천황은 오샤마가 떠난 지 두 달만에 서거합니다.
텐지 천황 사후에 오샤마는 오토모를 옹립한 오미(近江) 조정에 대항하여 비밀리에 이가(伊賀), 이세(伊勢), 미노(美濃 : 오샤마의 고향) 등지에서 군사를 모으고 오미로 진군하여 오토모를 제압하였습니다. 결국 오토모는 자살하였고, 오샤마는 오미조의 중신들 즉 오토모측에 가담한 자들에 대해 철저히 숙청했습니다. 많은 중신들이 참살당하거나 유배를 가게됩니다.
이상이 진신노난(진신의 쿠데타)의 대체적인 내용입니다. 이 사건은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연구가 되어온 대표적인 사건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과 관련하여 많은 수수께끼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전체 열도부여의 역사에서 부여계의 흐름과 관련된 부분을 중심으로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텐지천황의 아드님인 오토모(大友)와 관련해서 한번 보고 넘어갑시다. 이 '오토모'는 반도부여(백제)계 도래 씨족과 깊은 관련이 있는 말로 보입니다. 후에 오토모고우(大友郷)으로 불리는 지역에는 오토모수꾸리(大友村主 : おおともすぐり)와 오토모노후비토(大友史 : おおとものふひと)라고 하는 백제계 도래 씨족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텐지천황의 아들인 오토모(大友) 황자가 지원하는 씨족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특기할 만한 일은 거의 알몸으로 도망치듯 빠져나온 오샤마 황자가 어떻게 강력한 조정의 군대를 쉽게 궤멸시켰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에는 소가씨(蘇我氏)와 오와리씨(尾張氏) 두 가문의 활약이 컸다고 합니다.
진신의 쿠데타에서는 텐지 천황에 의해서 멸문의 화를 당했던 소가씨(蘇我氏)가 텐무 천황을 강력히 지원합니다. 당연한 일이겠지요. 오토모 정부군의 주력이 오샤마의 군대와 충돌하기 직전에 오미의 대장을 그 부장인 소가씨(蘇我氏)가 살해합니다. 정부군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공중 분해되고 맙니다. 그리고 오샤마가 동국(東國)으로 피신갔을 때 동국의 유력 호족인 오와리씨(尾張氏)가 오샤마를 강력히 지원합니다. 오와리씨는 오샤마를 위해 행궁도 짓고 군자금을 모으는 등 오샤마가 등극하는데 많은 힘을 기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샤마가 동국으로 탈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병사들이 무기를 버리고 탈영하기도 합니다. 오토모 조정에 대한 반감일 가능성이 크지요. 이것은 아마도 백제부흥운동의 패전과 텐지천황의 집권과정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와 같이 진신의 쿠데타는 사건 그 자체가 매우 드라마틱합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자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립니다. 무엇보다도 진신의 쿠데타는 천황권이 더욱 강대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고대 시가집인 『만요슈(萬葉集)』에는 "천황은 살아있는 신이다."라고 노래하는 구절도 있습니다.3) 그리고 일본 사람들은 『일본서기』가 바로 이 텐무 천황을 위해 씌어졌다고 믿을 정도입니다. 그 말은 『일본서기』가 텐무 천황에게 유리하게 찬술되었을 것이라는 말이죠. 실제로 『일본서기』를 만들라고 지시한 사람은 텐무 천황이고 이 같은 유지는 그의 아내이자 다음 천황이었던 지토(持統) 천황으로 이어졌고, 텐무의 아들인 도누리 친왕(舍人親王)에 의해 완성된 것입니다.
▲ [그림 ①] 텐무천황 |
여기서 한 가지 점을 지적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진신의 쿠데타에 관하여 이상하게도 『일본서기』에서는 오와리씨의 활약에 대해 철저히 침묵합니다. 다만 『속일본기』에 이들이 포상을 받은 기록이 있습니다. 텐무 천황이 서거했을 당시 어린 시절의 텐무천황의 모습을 말하면서 기리는 대목이 있는데 이때 이 부분의 만장(輓狀)을 읽은 사람이 바로 오와리씨의 동족인 오샤마노수쿠네아라카마(大海宿禰□蒲)라고 합니다.4) 이것은 오와리씨가 어린 시절 텐무 천황을 비밀리에 양육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린 시절의 텐무가 수도의 황궁에서 정상적으로 자라기 힘든 어떤 환경이 있을 수가 있었겠죠. 만약 텐무가 기록대로 조메이 천황의 아들이었는데도 비밀리에 양육되었다면 그 어머니가 미천하거나 아니면 부여계의 황실에 반하는 어떤 요소(신라계라든가 하는)가 있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일본서기』에서 오와리씨의 지원 사실을 더욱 숨겼을 수도 있겠습니다(이 부분은 다시 상세히 분석합니다).
텐무 천황은 자신을 도와준 소가씨(蘇我氏)도 소외시키고 철저히 황족(皇族)만으로 정치를 하는 이른바 황친정치(皇親政治)의 시대를 엽니다. 아마도 강력한 중앙집권을 위한 텐무 천황의 선택이었겠지요. 이미 많이 알려진대로 한고조 유방(劉邦)의 흉내를 내기를 즐겨했던 텐무 천황이 철저히 토사구팽(兎死狗烹)한 것이겠지요. 텐무 천황이 편찬을 지시한 『일본서기』에서는 진신의 쿠데타를 매우 이례적으로 상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치 자기의 무용담을 가득 실어다 놓은 형국입니다.
도대체 텐무 천황은 어떤 사람이고 그가 숨기려고 했던 비밀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1) 텐지천황 : 백강 전투를 위해 태어난 사람
7세기 중반 당나라의 고구려 정벌로 인하여 동북아시아의 긴장이 크게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645년경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할 당시 일본에서는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이 있었습니다. 다이카 개신은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나카노에(中大兄) 황자를 중심으로 당대 최고의 권력 가문인 소가(蘇我)씨를 멸문한 후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한 사건입니다.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가 암살되고, 그의 아버지 소가에미시(蘇我蝦夷)가 자살함으로써 소가씨 가문은 멸문당합니다. 이로써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반도부여계의 대표적인 가문은 사라집니다. 이와 같이 을사정변 즉 잇시노헨(乙巳の變)은 야마토의 최고 실력자로 군림해오던 소가씨의 본가를 멸문시킨 사건입니다. 잇시노헨의 주역은 나카노에(中大兄) 황자 즉 후일 텐지천황(天智天皇 : 661∼672)입니다.
나카노에 황자는 앞서 본대로 어머님인 사이메이 천황을 도와 반도부여(백제)의 구원에 신명을 다합니다. 전체 부여계의 역사를 모르는 현재 열도쥬신(일본인)들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정도의 정열과 신념을 가지고 전국력을 총동원하다시피하여 반도부여를 지원합니다. 그래서 열도에서는 텐지 천황을 가리켜 '백제마니아'니 '백강 전투를 위해 태어난 사람' 등으로 비아냥거리기도 합니다.
반도부여(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규슈로 간 사이메이 천황이 급서(急逝)하는데 이 때에도 나카노에는 등극하지 않고 반도부여의 구원에만 전력을 다하고 반도부여의 멸망 후 뒷수습을 하고 있습니다. 또 당나라나 신라의 연합군이 일본 열도로 침공해올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하자 각종 방어용 토목공사를 시행합니다(아마도 나라의 경제가 말이 아니었겠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나카노에 황자(텐지 천황)에 대하여 "소가이루카의 암살과 백강 전투(663)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는 말입니다.5) 여기서 말하는 백강 전투는 일본이 백제를 부흥하기 위해 동원하여 파견한 군대가 백제의 백강에서 처참하게 패배한 전투를 말합니다. 『삼국사기』에는 "왜(Wa)의 4백 척의 군함이 전쟁에서 패해 백강(白江) 하구에서 불태워졌는데 그 연기와 불꽃으로 하늘과 바다가 모두 붉게 물들었다"고 전합니다.6) 여기서 말하는 백강은 금강 하구 부근의 기벌포(伎伐浦)라고 합니다.
사실 나카노에 황자(텐지천황)은 반도부여(백제)의 구원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반도부여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은 물론 반도부여의 망국민들을 모두 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앞서 본대로 텐지 천황(天智天皇) 10년조에 다음과 같은 노래가 나오는 것이죠.
"귤은 저마다 가지가지에 달려있지만
(多致播那播 於能我曳多曳多 那例例騰母)
구슬을 꿴다면 하나의 끈으로 묶을 수 있지
(陀痲爾農矩騰岐 於野兒弘儞農俱)
이 동요는 반도부여(백제)와 열도부여(일본)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의미하는 중요한 노래이기도 합니다.7)
반도부여의 구원의 실패로 이내 당나라·신라 연합군이 열도로 침공해올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하게 됩니다. 실제로 당나라라는 초강대국이 등장하자 텐지천황은 반도부여 문제로 상당히 고심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다이카 개신에서 일시적으로나마 나타났던 친당 정책도 이와 관련이 있겠죠). 경제적으로 피폐한 가운데서도 텐지천황은 당나라·신라 연합군을 막기 위해 도처에 산성을 축조합니다. 그리고 텐지천황은 왕도를 아스카에서 오미(近江 : 현재의 시가현[滋賀縣])로 옮깁니다. 아스카가 소가씨의 본거지인 점도 큰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참고로 당시의 산성들을 살펴보고 넘어갑시다. 백강 전쟁의 패배 후, 쓰시마·이키·쓰쿠시 등의 변방 지구에는 병력들과 봉화대가 배치되었고 각지에 많은 성들이 축조됩니다. 667년 나카노에 황자는 오미(近江) 오쓰쿄(大津京)로 도읍을 옮겼고, 다음해인 668년 정식으로 즉위해 제 38대 덴지 천황(天智 天皇 : 668~672)이 됩니다. 이 산성들은 이른 바 백제식 산성들이고 이 흔적들이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 [그림 ②] 일본에 있는 한국식 성[吉野誠(2004)106쪽] |
이와 같이 텐지 천황은 마치 부여의 중흥을 위해 삶을 살아온 듯이 느껴집니다. 그러니까 일부에서는 텐지천황을 의자왕의 아드님인 부여풍(夫餘豊)이라고 보기도 합니다(『일본서기』에서는 부여풍을 여풍장(余豊璋)이라고 합니다).8) 사실 부여계의 전체 역사를 모르면 텐지 천황의 이 같은 행적이 이해가 안되죠. 참고로 의자왕이 당나라에서 서거한 후 백제왕족 가운데 한 사람인 복신(『일본서기』에서는 귀실복신)을 중심으로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나는데, 이 때 복신은 왜국에 있던 여풍장에게 귀국할 것을 요구하여 백제왕으로 옹립하였습니다.
필자 주
(1) 『日本書紀』「天智」10年, 「天武」元年.
(2) 『日本書紀』「天武」元年.
(3) 이 책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630년대~760년대) 가집(歌集)이다. 신라시대의 향가집과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 약 130여년간에 걸친 노래들을 수록한 것으로 이 시대를 만요슈 시대로 보기도 한다.
(4) 關裕二, 앞의 책, 206쪽.
(5) 關裕二『古代史』(관정교육재단 : 2008) 197쪽.
(6) 『三國史記』「百濟本紀」
(7) 이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김운회 『대쥬신을 찾아서 2』(해냄 : 2006) 116~118쪽 참고.
(8) 예를 들면 林青梧는 텐무를 신라인 김다수로 하고 텐지를 百済王인 여풍장(余豊璋)으로 보았다. 林青梧「天智・天武天皇の正体」『別冊歴史読本』1990年6月号(新人物往来社 :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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