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방송공사(KBS)가 22일 제작 거부에 들어갔다. 양승동 PD와 김현석 기자 파면, 성재호 기자 해임, 이준화 PD·이상협 아나운서 3개월 정직 등 사원 8명에 대한 중징계 철회를 촉구하는 집단 행동이다.
22일부터 이틀간 진행될 제작 거부에 기자의 90% 이상과 PD의 70% 이상이 참여해 부·팀장 등 데스크급을 제외한 대부분이 동참한 것으로 알려졌다. KBS 기자협회(협회장 민필규)와 PD협회(협회장 김덕재)는 "이정도면 파업보다 높은 수준의 참여도"라고 자평했다.
이번 제작 거부는 KBS 노동조합 차원에서 진행하고 있으나 사실상 기자와 PD들이 주도하고 있다. KBS 조합원 1000여 명은 22일 오후 2시부터 KBS 본관 1층 민주광장에 모여 '3차 부당 징계 규탄 결의 대회'를 열고 "파면·해임 사형 선고 이병순은 각오하라", "굴종을 강요하는 관제 사장 파면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중징계 철회를 촉구했다. 부산·전주·대전·제주 등 지방 총국에서 올라온 PD들도 대거 참여했다.
"이병순 체제에 쌓인 불만이 중징계로 폭발했다"
이번 제작 거부에 기자와 PD의 참여도가 높은 것은 파면과 해임이라는 중징계가 주는 충격 이외에도 그간 쌓여있던 KBS 내부의 불만이 표출된 것이라는 해석이 많다.
양승동 PD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광우병 파동을 통해 촛불 집회로 터져나온 것처럼 이번 징계 사태가 KBS 구성원에게 기폭제로 작용한 것 같다"면서 "이병순 사장이 취임한 이후 달라진 제작 현장에 대한 기자, PD들의 불만이 중징계로 터져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행동이 단지 중징계 철회로 끝나지 않고 KBS가 다시 태어나고 공영방송의 길을 닦고 세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 KBS 조합원 1000여 명이 22일 KBS 본관 1층 민주광장에 모여 징계 철회를 촉구했다. ⓒ언론노보 |
이태헌 PD는 "요즘 어디를 가난 욕을 먹고, 또 변명을 할 수 없어서 눈물나게 창피한 경우가 많이 있었다"면서 "입사할 때 만해도 KBS에 입사한 것을 자랑스러워했고 주변에도 부러워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런 자부심이 많이 없어진거 같아 화가 나기도 했다"며 "이번 투쟁을 시작으로 우리가 좀더 공영방송다운 KBS가 되도록 다같이 노력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정직 3개월의 징계를 받은 이준화 전주총국 PD는 "'정권이 시키는 방송, 소수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방송'이 아닌 대다수의 국민들이 갖고 있는 생각을 가감없이 보낼 수 있는 방송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여러분과 같다"며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가야할 공영방송의 길 생각하면서 더 열심히 살겠다"고 말했다.
"파면, 해임은 이병순의 오판"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사측이 파면과 해임이라는 유례없는 중징계를 내린 것은 경영진의 오판이라는 지적도 적잖게 나왔다. '언론악법'이라고 불리는 신문법· 방송법 개정안과 공영방송법 도입 등을 두고 2월 언론계 총파업이 예정된 상황에서 사내 동참 움직임을 미리 억제하려는 중징계가 오히려 사내의 반발 움직임을 앞당기는 격발제가 됐다는 것.
KBS의 대표 예능 프로그램인 <1박 2일>을 제작하는 나영석 PD는 "그간의 집회에 '꼭 가야하나'는 생각에 함께 하지 못했고 지금 파면·해임 당한 분도 잘 모르는 분이었다"며 "그러나 입사하고 처음 이렇게 나오게 된 것은 결국 상식을 모르는 경영진의 잘못된 선택이 나같은 사람도 분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 "왜 이래? 아마추어 같이." ⓒ언론노보 |
또 그간 각기 정파와 입장에 따라 분열됐던 KBS 내부 분위기도 단합되는 분위기다. 김현기 PD는 "정연주 전 사장에 반대한 'PD협회정상화' 멤버 중의 하나였다"고 자신을 소개한 뒤 "사원행동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있듯 'PD협회정상화' 쪽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이들 중 일부가 이렇게까지 나올지는 몰랐다. 사과한다"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그는 "KBS 본관에 경찰이 투입됐던 8월 8일 이후 다른 것을 느끼게 됐다"면서 "KBS 내부에는 공영방송 자체를 두고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방송사에 경찰이 들어온 것을 두고도 '괜찮다'는 사람과 '있을 수 없다'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 그런 '꼴통'들 너무나 답답하다"고 말했다.
한 PD는 "이병순 사장이 중징계라는 오판을 낸 바람에 한마디로 '언론 투쟁 시즌 2'가 일찍 시작됐다"며 "이 투쟁으로 징계 철회를 끌어내는 것도 관건이지만 제작 자율성 악화 등 KBS 내부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힘을 결집하고 이어 2월 언론악법 저지 투쟁, 공영방송 사수 투쟁으로 끌어갈 수 있는 인식과 리더십을 가질 수 있느냐도 중요한 문제로 본다"고 했다.
방송 차질 정도는 미비 …노조에 '총파업' 요구 높아질 듯
그러나 제작거부의 여파가 당장 드러나지 않는 방송사의 특성상 기자와 PD들이 보이는 열기에 비해 방송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상황이다. 특히 사측의 징계 경고와 방해로 앵커, 아나운서들은 대부분 방송을 계속하고 있고 사전 제작된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다. 또 PD와 기자들 외에 기술직이나 경영직 사원 대부분은 제작 거부에 동참하지 않고 있다.
▲ KBS 새내기 PD들로 이뤄진 노래패 '병순아 일 좀 하자'가 공연에 앞서 자기 소개를 하고 있다. ⓒ언론노보 |
이에 영등포 경찰서를 출입해 KBS도 취재 영역에 든다는 이수정 기자는 KBS를 취재하는 MBC 기자가 '앵커와 아나운서도 제작거부에 참여하고 있느냐'고 물어 '둘다 방송 잘하고 있다'고 답했다"며 "이는 시청자가 봤을 때 우리가 제작거부해도 방송에 아무런 차질이 없다는 것이다. 기자로서 용산 화재 참사와 같은 현장을 등지고 나왔는데도 방송을 통해 아무런 티가 나지 않아 화가나서 견딜수가 없다"고 토로했다.
그는 "KBS 휴게실 앞 엘리베이터에 '사원들이 단체로 휴가원을 내면 이렇게 반려한다'는 식의 공지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 너무 놀랐다.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며 "권력에서 독립하자고 목소리 높였던 기자와 PD가 해직됐는데 왜 선배들은 가슴아파하지 않는가. 이런 선배들을 보면 내가 이 회사를 다니는게 맞는 일인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고 비판했다. 그는 "우리가 돌아와 함께 일할 때까지 잊지말고 선배들도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민필규 기자협회장은 "우리는 아주 가열차게 싸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 방송을 하고 있는 앵커나 아나운서들은 뜻을 같이해 투쟁 기금에 참여하고 있다"며 "우리가 이번에 제작 거부에 들어가면서 사실 모든 조합원을 다 제작일선에서 빼서 더 높은 강도의 제작 거부를 할 수 있었지만 '우리의 뉴스를 완전히 세우고 싶지는 않다'는 뜻에서 24시간 돌아가는 각 부서의 야근은 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그는 "만약 회사가 이번 주말까지 우리의 뜻을 모르고 아무런 답이 없을 경우 설 이후에는 기자들과 앵커까지 전면 제작 거부에 동참하도록 하겠다"면서 "현재 대신 리포트를 만들고 있는 부장 등 데스크급에 대해서도 '리포트를 만들되 성의 없이 만들어라'라고 말해뒀다. 제작 거부에 동참하는 기자나 아닌 기자나 뜻이 일치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아침에는 <뉴스타임> 이소정 앵커가 중징계에 항의하는 뜻으로 까만 옷을 입고 나와 "오늘 내일 KBS 조합원들은 제작 거부에 들어간다. 시청자 앞에서 떳떳한 방송을 하기 위한 것이니 이해해달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이에 KBS 보도국 간부들은 징계 등을 운운하며 강하게 반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설 연휴가 지난 이후에도 KBS 경영진이 중징계를 철회하지 않을 경우 KBS 내부에서는 노동조합에 파업 찬반투표에 돌입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KBS 노동조합은 집단 제작 거부에 들어가기 직전인 21일까지 사측과 징계 철회를 위한 협상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일단 내부의 불만이 표출된 이상 징계 수위를 낮추는 수준의 협상안으로는 KBS 기자와 PD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 없으리라는 관측이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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