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내정치뿐 아니라 경제정책에서도 오바마의 상표는 '변화'다. 또한 대외정책에서도 오바마 대통령의 트레이드마크는 '변화'일 수밖에 없다. 미국인이 염원하고 전지구인이 기대하는 변화의 가치를 오바마 대통령은 위임받은 것이고, 따라서 오바마 행정부의 정책기조는 그러한 시대가치에 합당한 것이어야 한다.
오바마 행정부의 대외정책이 힘에 의존한 일방주의에서 외교와 협상에 토대한 국제협력으로 변화한다고 예상하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북핵 문제와 북한 문제 그리고 한반도 정세에서도 오바마발(發) '변화'가 시작될 것이라는 것도 충분히 기대할 만한 일이다.
▲ 오바마 대통령과 바이든 부통령이 취임을 앞둔 지난 18일 알링턴 국립묘지 무명용사 묘역을 참배하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
우선순위 논쟁
그러나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오바마의 취임에 따른 한반도 정세 변화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흐름이 강하게 존재하고 있다. 오바마가 추동하는 북미관계 변화와 이로 인한 한반도 정세의 급변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현상유지적이고 북미갈등적인 시나리오를 정당화하는 인식들이 그것이다.
북미관계 진전의 가능성을 애써 부인하는 첫 번째 근거로는 오바마 행정부의 정책 우선순위에서 북핵문제가 뒤로 밀릴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다. 물론 당장의 경제위기 극복과 대내정치가 우선순위일 것임은 분명하다. 대외정책에서도 시급한 중동문제가 북핵보다 우선일 수밖에 없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 그리고 이란 핵문제에 더해 최근의 팔레스타인 분쟁 등이 대외정책에서 우선 관심일 것이다.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미국에게 북핵문제는 정책의 우선순위에서 상대적으로 밀릴 수 있을 만하다.
그러나 정책의 관심순위가 뒤에 있다는 것이 곧바로 북핵 협상이나 북미관계 진전이 하염없이 미뤄지고 별 성과가 없을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무엇보다 북핵 문제는 단기간의 가시적 성과의 필요성에서는 앞서 있다. 최근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후보자도 미 상원 인사청문회에서 북핵문제를 '시급한' 문제라고 지적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오바마 행정부가 대외정책에서 가시적 성과를 필요로 한다면 불가불 북핵 문제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라크와 아프간 문제는 시급하지만 쉽게 풀 수 없고 이란 핵문제와 팔레스타인 문제 역시 화급을 다투지만 당장 성과가 나기는 힘들다. 따라서 2년 뒤 중간선거를 고려하고 오바마 행정부의 대외정책에서 정치적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선 북핵 문제가 그나마 매력적인 관심 이슈일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이 결심하고 북한이 호응하면 지난 2007년 2.13 합의 이후 속도 있는 성과를 보여줬듯이 북핵 문제는 다른 대외 이슈에 비해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오바마 행정부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문제이다.
'당근과 채찍' 논쟁
북미관계 진전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은 미국 민주당 행정부가 당근이 큰 것은 맞지만 채찍도 훨씬 크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북한과 협상에 나설 것은 분명하지만 북이 핵 포기의 결단을 내리지 않고 시간끌기에 나선다거나 잘못된 행동을 할 경우 오히려 민주당 정부가 북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맞는 이야기다. 전통적으로 민주당의 대외정책에는 국제적 개입주의가 강했고 북핵 문제에서도 '외과적 폭격' 등 군사적 행동을 실제 고민한 경우는 클린턴 민주당 시기였다.
그러나 민주당 행정부가 더 강한 채찍을 사용할 것이라는 전망은 부시 행정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보다 포괄적이고 큰 당근을 제시하고 협상에 임할 것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대화하지 않는 것이 북에 대한 응징이라는 부시 행정부와 달리 오바마 행정부는 북핵 문제와 평화체제 문제 그리고 북미관계 정상화 이슈 등을 포괄적으로 논의하기 위한 보다 과감한 협상을 시도할 것이다. 여기엔 북을 악의 축으로, 김정일 위원장을 피그미로 인식하는 이분법적 선악논리가 아니라 조건 없이 북한의 지도자와 만날 수 있고 양자간 직접 협상을 통해 근본적으로 문제를 풀겠다는 오바마 대통령의 대북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이른바 '클린턴 3기'로 간주되는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은 북을 바라보는 인식에서 부시 행정부와 큰 차이를 보인다. 1999년에 작성된 페리보고서의 대북 협상 전략은 북한의 일방적인 굴복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북미간 상호 위협 감소(mutual threat reduction)의 필요성을 인식한 것이었다. 즉,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북한의 핵무기 폐기만이 아니라 북한에게 위협이 되는 대북 적대정책의 폐기도 같이 교환되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북핵 문제에서 북의 일방적인 핵 포기 요구가 아니라 '상호 위협 감소'를 해결 방식으로 간주하는 것은 분명 부시 행정부와 큰 차이를 보이는 점이다. 따라서 더 큰 채찍을 조심해야 한다는 기우에 앞서 더 큰 당근의 유용성을 인정하고 '강인하고 지속적인 외교'가 성공할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을 만들 것을 당부하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일 것이다.
북한 '악행론' '원죄론'
또 다른 부정적 전망은 북한의 태도를 불신하는 데서 비롯된다. 역시나 북한은 오바마 행정부의 더 큰 당근 제시에도 불구하고 핵 포기를 하지 않고 강경한 고집을 내세우고 결국은 북미간 갈등과 대결이 재연될 것이라는 비관적 예측이 그것이다.
그것은 항상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하게 하는 북한 '원죄론'의 연장선에 있다. 미국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결국 북한은 체제유지를 위한 마지막 보루로서 핵 포기를 결단하지 못할 것이라는 '악행론'이야말로 어떤 경우에도 북핵 협상의 진전을 기대하지 못하게 하는 핵심 인식이다.
그러나 이 역시 북한의 비정상적 행태를 미국과의 상호관계에서 찾지 못하고 북한만의 고유한 불량국가적 속성으로, '악의 축' 국가의 타고난 속성으로 간주하는 오류에 불과하다.
지금껏 북미협상에서는 미국이 주고받기 협상을 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면 북한도 진지한 자세로 협상에 임했고, 반대로 미국이 북한의 선(先) 양보와 일방적 굴복을 요구하면 북한도 강경한 벼랑끝 전술로 극한적 대치상황을 몰아가곤 했다.
따라서 오바마 행정부와 북한의 협상에서 북한이 무조건 단정적으로 대미 대결적 자세를 고수할 것이라는 전망은 상대방 미국과의 상호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왜곡된 '북한 때리기'의 전형에 불과하다.
오히려 2009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처지에서 오바마 행정부와의 협상은 실패해서는 안 될 절박성을 갖고 있다. 지난 2000년 실패의 경험을 뼈저리게 실감한 김정일 위원장 입장에서는 오랜 만에 도래한 민주당 정부와의 진지한 대타협을 무조건 거부하기 힘들 것이다.
특히 건강이상설, 후계구도에 신경 써야 할 대내적 상황, 그리고 2012년 '강성대국'의 가시적 성과를 내야 할 정치적 환경 역시 북한으로 하여금 미국과의 협상에 나서게 할 주요한 요인들이다.
실제 2009년 신년공동사설에서 북한은 이례적으로 '조선반도 비핵화'를 원칙으로 강조하며 미국과의 협상의지를 강력히 시사했다.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 기조를 지켜보면서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 의지를 보이겠다는 심산이다.
힐러리 국무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에 맞춰 발표된 지난 13일 북한 외무성의 담화 역시 앞으로 다가올 북미협상에서 세세한 각론에 매이기보다는 근본적인 문제해결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즉, 비핵화의 기술적·실무적 쟁점을 넘어 핵문제의 근본 원인인 북미 적대관계를 종식하고 양국의 관계정상화를 이룬다면 핵무기를 가질 이유가 없다는 기존의 일관된 북한의 핵논리를 재차 강조함으로써 향후 오바마 행정부와의 협상에서 미국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핵심 포인트를 재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검증과 폐기문제를 대북 적대정책 포기와 관계정상화라는 포괄적인 패키지딜로 '통 크게' 풀어야 함을 메시지로 전달하려 한 의도이다.
'원칙 대 원칙' 충돌한 北 외무성과 힐러리
문제는 오바마 행정부가 보다 큰 당근을 제시하고 북한이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할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통 큰' 결과가 나올지는 여전히 미지수라는 점이다.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은 과감하고 포괄적으로 진행되지만 그에 맞춰 근본적인 해결책이 생산적으로 도출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기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려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 북미관계 진전의 기대를 실제적인 성과로 이어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과 미국 양자가 상대를 처음 대면하기 전에 불필요한 오해와 왜곡된 인식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가장 손쉬운 오해의 시작은 협상 전에 밝히는 공식 입장의 원칙적 강경함에서 비롯된다.
상대를 대면하기 전에 협상의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고 자신의 요구를 강력히 원칙적으로 밝히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최근 잇달은 북한 외무성 대변인의 담화와 문답은 미국이 북에 희망하는 것을 들어주겠다는 것보다는 북한이 미국에 기대하는 일관된 요구사항을 가장 높은 수준에서 강력한 어조로 천명한 것이다.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 철회와 핵위협 제거를 조건으로 걸면서 그동안 일관되게 주장해 온 북미관계 정상화와 안전 보장을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핵을 폐기하겠다는 수긍보다는 핵 폐기를 위한 상대방의 필요조건을 먼저 밝히고 나선 셈이다.
이는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힐러리 국무장관 후보자는 북이 희망하는 적대관계 종식과 대북안전 보장을 수용하기보다는 미국이 북한에 요구하는 비핵화를 먼저 강력히 밝혔다. 핵 프로그램의 완전 폐기를 최종 목표로 못 박고 북이 이행하지 않을 경우 제재의 가능성도 시사하고 나섰다.
분명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은 북한의 핵무기 및 핵 프로그램 폐기와 미국의 대북 적대관계 종식 즉, 북미관계 정상화가 '행동 대 행동'으로 맞교환되어야만 가능하다. 이는 이미 9.19 공동성명에 적시되어 있다.
이처럼 상호 맞교환되어야 하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북한과 미국은 새로운 협상을 앞두고 공식적으로는 자신의 의무사항을 확인하기보다 상대방의 의무사항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새롭게 바뀐 협상 상대를 앞두고 공식적·공개적으로 자신의 요구사항을 정확히 밝히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현명한 자세가 아니다. 그렇잖아도 북미 협상을 내키지 않아 하는 측에서는 이를 트집 잡아 상대방이 의무사항을 이행할 의지가 없다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정작 북미협상이 잘되기를 희망한다면 불필요한 오해의 함정에 빠지는 우를 벗어나야 한다.
이제 상대방에 대한 확실한 요구사항을 공개적으로 밝힌 만큼 이제 자신의 의무사항도 반드시 이행할 것이라는 입장을 서로 전달하는 게 필요하다. 상대방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이 쑥스러운 면이 있다면 공개적인 방식이 아닌 비공개적인 방식으로 의사를 전달할 수도 있다. 본격적인 협상 이전에 북미간 고위급의 특사 파견이 바로 그런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협상 당사자간 정확한 의사 전달이나 최고위급의 명확한 입장 파악이 잘못되어서 불필요한 오해와 인식을 갖고 협상에 나서는 것은 실제 협상을 그르치거나 본의를 파악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을 소모하게 만든다.
김대중 정부 초기에도 햇볕정책의 내용이 북에 정확히 전달되고 이를 수용하게 되는 데는 2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남북관계가 막히면 매번 이를 푸는 효과적 방법은 바로 특사 파견과 이를 통한 최고위급의 의견 교환이었다. 2002년 4월 임동원 특사 방북이 그랬고 노무현 정부 시기에도 2005년 6월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특사 방북이 그랬다.
모처럼 도래한 북한과 미국의 전향적인 협상 분위기에서 실제 생산적인 결과가 도출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김정일 위원장과 오바마 대통령의 속내와 의중이 정확히 전달되어야 한다. 그것은 공개적으로 밝히는 상대방에 대한 요구뿐 아니라 자신도 반드시 의무를 이행하겠다는 솔직한 입장의 전달이어야 한다.
1월 초 미국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의 민관 합동 외교자문단 일행이 미국 관계자를 만나 조급한 대북 특사 파견 자제를 요청했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가 사실이라면 아직도 한반도는 겨울 삭풍에 떨어야 할 듯하다.
남북관계의 끈이 망실된 상황에서 북한에게 미국의 진의를 정확히 전달하지 못하는 마당에 미국에게마저 북한의 본심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게 만류하는 형국이라니! 한반도의 추위는 당분간 이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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