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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일이가 간 이후로 이렇게 절망적인 적은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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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일이가 간 이후로 이렇게 절망적인 적은 없었어"

[권은정의 WHO]<11>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이소선 여사를 만나러 동대문구 창신동에 있는 전태일 기념사업회로 갔다. 사무실 바로 아래층 '어머니사랑방'에 그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동대문 지하도 주변에 바람막이도 없이 좌판을 벌이고 선 과일행상 머리 위로 매서운 겨울바람이 훑고 지나간다. '창신미싱' 간판을 찾으면 사무실 찾기가 쉬울 것이라 했다. 시장 골목을 요리조리 꺾어야 했다. 점심시간이 지난 시장은 그리 붐비는 편이 아니었다. 짐받이 오토바이가 사람들 사이를 뚫고 가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가게 밖에 걸어놓은 큰솥에서 오르는 김으로 골목이 온통 훈훈해지고 있었다. 기름방 아주머니나 신발가게 주인이나 길을 물으니 친절하게 답해준다. 물건 살 사람도 아닌데 말이다. 동네인심이 어째 저 바깥세상과는 사뭇 다른 것 같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 그는 기륭전자 식구들이 가장 마음 아프다고 했다. ⓒ프레시안

세시 약속시간에 맞춰갔는데 그는 아직 채비를 하기 전이었다. 깜빡 오수에 빠진 듯. 오도엽씨(얼마 전 나온 책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의 저자)가 채근하고 있었다. 어머니, 일어나세요. 사람들이 왔어요. 저런, 내가 10분만 자고 일어나야지 한 게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된 줄 몰랐네. 방안에서 모자가 나누는 듯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더 기다릴 수 있는데… 지금 그의 단잠보다 더 소중한 게 뭐가 있으랴. 그는 엊그제 팔순을 넘겼다. 이젠 그에게도 쉴 시간을 내드려야하는 거 아닌가. 바로 어제만 해도 그는 일정을 세 개나 치러야했다. 그를 만나 용기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 그가 위로해줘야 할 사람들이 아직 너무나 많다. 아들 태일이 죽고 난 후 내딛은 그의 발걸음이 이렇게 오랫동안 이어져야할 줄 몰랐을 것이다. 어제는 이랜드 조합원들을 만났다. 오랜 농성 끝에 마침내 복직하게 되었으니 그래도 마음이 가벼운 자리였을 것이다.

"다 들어갔으면 좋은데,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그만큼 들어간 거지. 남은 식구도 더 열심히 하라고, 장하다고 그랬지. 지금으로 봐서는 기륭전자 식구가 마음이 젤 아파. 기륭전다는 여러 번 가봤는데, 이랜드는 한번 밖에 못 가봤어."

그는 비정규직을 얘기하며 깊은 한숨을 짓는다.

"점점 나빠지니… 내년엔 절망적일 것이란 생각이 들어. 너무 마음이 아파. 70, 80년대에는 이 산만 넘으면 좋은 세상이 오고, 빈부격차가 줄어들고 소외받는 사람이 적어질 거란 생각을 했는데, 한 산만 넘으면, 하루만 지나면, 한 해만 더 가면 좋아질 것이라 했는데… 올해는 태일이 죽고 제일 절망적인 때였어. 40년 살아왔지만 지금만큼 절망적인 적이 없었다니까."

▲"사람의 탈을 쓰고 세상이 이럴 수 있느냐며 죽는 사람들 생길까봐 그게 제일 걱정이야." ⓒ프레시안
그의 머릿속에는 추운 날 밖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의 걱정으로 꽉 차있다.

"내가 맨 날 마음에 겁이 나. 살다가 너무 못 견디고, 다른 사람한테, 인간들끼리 저주받는다는 그런 생각이 들고 사람의 탈을 쓰고 이럴 수가 있는가, 더 이상 살기도 싫다, 그런 생각 들어서 죽는 사람 생길까 그게 제일 걱정이야. 기륭전자 가보니 죽기 직전이야. 병원에 데리고 가라고 했는데, 내가 네 번째 가서야 병원으로 가는 걸 봤어. 그렇게 놔두면 죽어. 말라서 죽는다고. 내가 죽는 것을 얼마나 봤는데, 70년부터 얼마나 봤는데, 죽는 힘으로 살아서 싸우라고 해. 죽고 나면 너들은 모르지만, 부모는 평생을 속에서 아리다가 죽는데…"

가슴에 묻은 지 반평생이 되어가지만 죽어가는 아들 태일이를 지금 품에 안고 있는 듯 말한다. 그 상처가 얼마나 깊고 생생한 것이란 말인가. 그 고통의 힘이 오늘까지 그를 데리고 왔지만 어찌하여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을까.

이소선은 늘 말해왔다.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들고 움직이는 게 누구에게서 나오는 힘인가? 바로 노동자에게서 나온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사실 너무 했잖아. 경제가 성장한 데는 먹물쟁이나 법이나 권력 가진 이들이 노력한 것이 아니지. 저 사람들은 덤으로 와서는 이제 자기들 마음대로 유리한 입장대로 하니까, 노동자들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정말 어쩌자고 이러는 건지! 지금도 시내 나가보면 우선 보기 좋은 데는 얼마나 돈을 퍼들이고 있는지 몰라. 좀 있다가 해도 될 일을 미리 해놓고… 우리와는 너무 먼 상관이야. 가장 약자에게는 쳐다보기도 어려운 먼 현실이니,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너무 말이 안 나와. 그때는 말이 하고 싶더니, 이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의 말이 끝을 맺지 못한다. 주위는 잠시 무거운 침묵이다. 누가 조금이라도 희망이 섞인 말을 내놓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지금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거짓일수 있다는 생각만 든다.

▲ 이소선 여사와 권은정 인터뷰어. 이소선 여사는 "경제가 이만큼 성장한 것은 먹물쟁이들이 한게 아닌데 이제와서 노동자들은 생각도 않고 자기들 유리한대로만 하니까"라고 말하며 답답해 했다. ⓒ프레시안

마침 전화벨이 울려 대화에 끼어든다. 바로 지척에 있는 유가족 협회사무실에서 온 전화다.

"음, 알았어, 지금 손님이 와 계시니 내가 곧 갈께."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가 말한다.

"또 오라하네. 빨리 내려오라고…처음에 내가 시작했기 때문에 뭐든지 말 할라고 하면 같이 이야기하고 의논하자고 하지. 여기는 저 사람들이 하니 내가 아무 할 일이 없어."

그는 빈한한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기념사업회를 꾸려나가는 박계현 사무국장이 사뭇 든든한 모양이다. 그는 18년간의 청계피복노조 활동 다음에 유가협으로 몸을 옮겼다. 자식을 잃고 울부짖는 어머니들에게 이소선 그만큼 든든한 버팀목은 없었다. 그는 참으로 담대한 어머니였다. 아들 태일이의 시신을 눈앞에 보면서도 정신을 놓지 않고 아들의 일기장을 찾으러 노동부에 찾아갔을 만큼 그는 똑똑히 정신을 차릴 줄 알았다. 그렇게 지켜낸 덕분에 그 아들의 정신은 지금 횃불로 타오르고 있다.

▲ "그래, 난 사람이 참 좋아. 누구든지 사람이 좋아. 내가 좀 별난 게 있었나?"ⓒ프레시안

약속이 있다고 막 나가려는 오도엽씨를 붙잡아 앉혔다. 전태일 문학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시인인 마흔 초반의 이 젊은이는 이번 책으로 유명작가 반열에 올랐다. 지난 2년간 이소선과 한 지붕 아래 먹고 자면서 이소선의 기억을 들춰냈다. 여든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며 둘은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을 것이다.

"정은 무신 정… 그냥 안 오면 기다려지는 그것 밖에 없어. 어디서 밥은 먹었는지, 굶고 그냥 술만 먹고 있는지 그게 걱정이지 뭐…" 이소선이 무심한 듯 말한다.

"어머니는 내가 주말에 집에 다니러 가도 밥 챙겨 먹었는지 물어보시는 분이에요. 하하하… 어머니는요, 주무시지 않으면 전화번호 뒤져서 사람들 안부 묻는 분이세요. 혼자 계시면 아프신 분이죠. 사람들이 많이 오면 쌩쌩하고…"

"그래, 난 사람이 참 좋아. 누구든지 사람이 좋아. 어릴 때부터 친구도 좋아하고. 옛날에도 동네사람들이 밤이면 우리 집으로 다 오고 그랬어. 내가 좀 별난 게 있었나?"

그가 원래 사람을 좋아한 게 틀림없다. 그래서 사람들도 그를 좋아한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어머니'라고 부른다. 어머니라고 부르는데 누구도 스스럼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보다 나이 많은 노인 분들도 그를 어머니라고 부르는데 있다. 예를 들면 김대중 전대통령이나 돌아가신 문익환 목사도 그랬다니 말이다.

"그냥 태일이 엄마라고 부르면 좋을텐데 말이지."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라는 상징으로서의 어머니, 그에 앞서 이소선은 일찍부터 모든 불쌍한 아이들의 어머니였다. 60년대 쌍문동 묘지 터에 무허가 집을 짓고 살던 때도 그는 굶고 있는 이웃들을 위해 동사무소로 달려가 긴급구호 식량을 받아왔다. 그보다 전에는 염천교 다리 밑에 거지아이들을 먹이고 씻겨주던 엄마노릇도 했던 사람이다. 그는 누구든 불쌍하고 가여운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그 마음을 아들 태일이가 닮았던 것이다.

▲ "책 나와서 좋은건, 나 생각해준 사람들, 고마운 사람들에게 인사를 할 수 있다는 거지." ⓒ프레시안
이소선은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내는 게 여간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 책이 나오기까지 두 달이나 버텼다. 화도 내고 고집도 피웠다. 부끄럽고 창피한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는 자신을 '세계적으로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여자'라고 생각한다. 남편은 서른아홉에, 맏아들 태일이는 마흔에 갔으니 그보다 더한 팔자가 어디 있느냐는 말이다. 오죽하면 그는 자신이 없었더라면 태일이도 안 났을 것 아니냐고, 그렇게 된 것은 자기 탓이라고 한다. 우리 어머니들, 굴곡 많고 신산한 이 땅의 불행한 역사를 자신의 불운과 부덕의 탓으로 돌리는데 익숙한 이 땅의 여성들처럼, 그도 말 못한 고통을 안고 살아온 것이다. 일제시대 태어나 일본군에게 아버지를 여의고 오빠와 어머니와 함께 '희한한 세상'을 살아온 이소선의 일생은 부끄러운 게 아니다. 오히려 그 험한 물살을 거슬러 오느라 온몸 깊숙하게 패인 상처를 그는 자랑해야 마땅하다.

그는 누가 그 책을 읽었을까봐 겁이 난다고 하지만 한 가지 좋은 점은 인정한다. 그가 평생 빚지고 산사람들에게 인사를 할 수 있게 되어서다.

"햇수로 39년, 그날부터 지금까지 못난 내가 이렇게까지 살아왔으니 주변에 고마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어. 내가 싸우고, 구치소 가고, 얻어맞고 경찰서 가고, 그때마다 사람들이 정말 날 생각해주었지. 추운 날 농성하는데 나가면 문목사님이 두루마기 벗어서 덮어주고, 목도리도 쓰라고 주고 그랬어. 나 생각해준 사람들 너무 많아. 고맙게 해준 사람이 너무 많았어."

일제 때나 독재 때나 경찰에 쫓겨 다닐 때 숨겨준 사람들, 택시비 안 받고 그냥 태워준 기사, 간호해준 사람한테 인사도 못하고 새벽에 떠나야 했을 때, 그는 가슴으로 인사를 수천 번도 더했다. 그런데 그 모든 사람들한테 이제 소리 내어 고맙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게 평생소원이었는데 책을 통해서 그 말을 하게 되었으니 소원풀이는 한 셈이란다.


▲ 이소선 여사를 보면 전태일 열사가 그의 아들이라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진다. ⓒ프레시안

이 소선은 자신의 기억을 몽땅 글로 새겨놓은 오도엽씨를 '건달'이라고 부르는데 그 모습이 여간 살갑지 않다.

"첨에는 그냥 기어갈 때 이야기 해두자고 해서 시작했는데, 속없는 저 건달이는 이말 하면 저 말 묻고, 심심한데 이야기나 합시다, 하면서 날 이상하게 만들었어. 아무렇지 않게 말하게 해놓고 여기까지 왔으니… 그런데 인연은 인연인지, 내가 오래 살아도 누구한테도 말한 적이 없는 이야기인데 저 건달이 물으면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니까."

그런데 그에게는 아직까지 수고했다,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 내가 알지. 내 하는 말을 듣고 있느라 흰머리도 늘고 허리도 아프고 그런 거 내가 알지."

그런데 인사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도 알고 너도 아는데, 뭐하러 말 하냐?"

둘러 앉아있던 우리 모두가 한바탕 웃었다.

▲ "살아야지! 살아야지, 죽으면 안 돼. 죽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니야. 살아서 싸워야해!"ⓒ프레시안

밝은 분위기를 틈타 그에게 새해소망을 한 가지 말해달라고 청했다.

"새해 소망? 그보다 실망이 더 많아!"

그래도 우리는 그에게서 들어야 한다. 진실한 소망을.
"살아야지! 살아야지, 죽으면 안 돼. 죽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니야. 살아서 싸워야해!"

이소선은 분명 열사 전태일의 어머니다. 하지만 그를 보면 이소선의 아들이 전태일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 듯 여겨진다. 헌옷장사를 하며 재단사 아들에게 근로기준법을 배운 어머니. 그 어머니는 아들에게 이미 그전에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그 정신을 심고 가르쳐 왔다. 그 가르침은 아들에게 젖을 물리던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이소선의 아들이 전태일이다.

그와 헤어져 나오는데 옆집 문 앞에 작은 종이가 팔락인다. '미싱 시다 구함, 월급으로 드립니다. 가족처럼 일하실 분.' 창신 시장을 다시 내려오면서 국밥집에 들어가 순대국밥을 말아먹었다. 기우뚱할 만큼 잔뜩 짐을 싣고 가는 오토바이 아저씨, 봉제일하는 옆집 사장, 시장통국밥집 아주머니, 그리고 이소선과 전태일과 박계현과 오도엽과 우리 모두. 다함께 연대해서 살아갈 사람들이다. 그래서 살아남을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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