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싸움
본격적인 싸움은 이제부터다. 2008년은 이 싸움의 전초전이었다. 우린 이제 상대의 목표와 전력(戰力). 전략과 병기 그리고 보급로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었다. 우리 자신의 허점도 파악하게 되었다. "백전백승(百戰百勝)"을 위한 "지피지기(知彼知己)"다. 이제 남은 것은 상대의 허를 찌르고, 우리의 힘을 상상 이상으로 결집시키는 것 외에 없다. 상대의 허는 이 나라의 민주주의 수준에 대한 무지와 능멸에 있고, 우리의 약점은 분열에 있다.
인간의 역사에서 전쟁은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낸다. 어떤 나라는 소멸하고 어떤 나라는 실력자로 등장한다. 전쟁을 피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다행스러우나, 피할 수 없다면 이겨야 한다. 우리가 싸움을 건 것이 아닌데, 필요 없는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국가의 탄생은
물론 어떤 전쟁도 그 전쟁의 비참함 앞에서 정의로울 수 없다. 인간은 전쟁에서 비극적이고 무참하게 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들을 몰살시키려는 자들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직면하는 전쟁은 희생을 각오하고 용기 있게 맞설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전쟁은 속히 끝내야 한다. 평화는 정의의 승리에 기초하는 것이지, 정의의 패배로 오지 않는다. 그것은 평화가 아니라 억압체제의 안정이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북부의 패배로 끝났다면 노예제 국가는 그 이후에도 한 동안 오래 지속되었을 것이다. 2차 대전에서 히틀러의 독일이 승리했다면 인류사는 비극적 현실을 더더욱 긴 시간 동안 감내해야 했을 것이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군부가 이겼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되었을까?
그런데 지금 우리는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니라, 정치적 내전(內戰)을 치르고 있는 중이다. 민주주의와 파시즘의 대결이다. 내전 역시 전쟁의 일종이다. 이 전쟁의 승리는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 낼 것이다. 모든 전쟁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국가의 탄생을 가져온다.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로마는 제국의 건설을 시작한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19세기와 20세기 초반 동북아시아의 운명을 바꾸었다. 오늘날 우리가 치르는 전쟁은 독재체제의 길을 열 것인지, 아니면 민주주의 국가의 재건을 택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선전포고
이 싸움의 결말이 파시즘의 승리로 돌아가게 해서는 결코 안 된다. 이명박 정권은 민주주의를 몰살시키기 위해, 온갖 파시스트적 조처를 취하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선전포고다. 전혀 필요 없는 전쟁을 일으켰다. 도발자는 어디까지나 이명박 정권이다. 민주 공화국을 지켜내는 것은 민주 공화국을 침탈하려는 자들을 퇴치하지 않고는 불가능해진다.
파시즘은 폭력이다. 법과 제도와 권력이 모두 폭력으로 변한다. 그 폭력은 모두 합법이 된다. 정당한 국가의 질서가 되고 삼엄한 원칙이 된다. 이로써 파시즘을 반대하는 모든 세력은 불법화 된다. 헌법적 시민권은 처벌대상으로 변한다. 기본권은 탄압되고 폭력에 대한 저항이 폭력으로 불린다. 진실과 거짓이 뒤집히는 것이다.
파시즘의 전략
파시즘의 전략은 우선적으로 상대의 해체다. 분열과 원자화다.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한나 아렌트가 날카롭게 갈파했듯이, 그 사회 구성원들을 원자화된 개인으로 만들어 공동체적 결속을 단절시킬 때 파시즘은 전체주의적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 그래서 언론과 방송을 장악하는 것이며, 자기 앞에 무력한 개인이 되어 일렬로 세우는 작업에 몰두한다.
무력한 개인은 도전하지 않는다. 무력한 개인은 결국 굴종한다. 아니면 방관자로 놔둬도 별 문제 될 것이 없다. 폭력적인 권력에 대해 무력감을 최대한 느끼게 만드는 것, 이것이 파시즘 승리의 근간이다.
파시즘을 붕괴시키려면 단 하나의 방법 밖에 없다. 그건 우리가 하나로 똘똘 뭉치는 것이다. 이 똘똘 뭉치는 과정에서 우리는 진화해나갈 것이다. 권력의 악행도 무찌르고, 자본의 독점체제로 해체할 수 있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일으켜 세우면, 이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권력과 자본의 동맹체제로 파탄 나게 하고 신자유주의 계급 독재도 붕괴시킬 수 있으며 남북관계로 평화적으로 도모해서 한반도의 미래를 아름답게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저들에게는 폭력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의로움이 있다. 저들에게는 간악함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진실이 있다. 저들에게는 탐욕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역사의 양심이 있다. 저들에게는 오만과 독선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이 있다.
60년대 민권운동 당시 미국의 정신적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자, 오늘날에도 미국에서 가장 명성 높고 진보적인 뉴욕의 리버사이드 처치를 담임했던 윌리암 슬로안 코핀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믿음이란 먼저 목표를 향해 몸을 날리는 것입니다. 날개는 그러면서 돋아납니다." 날개가 없다고 주저앉지 말자. 역사의 현장에 투신하는 순간, 우리는 날게 될 것이다. 파시즘의 성채는, 이렇게 비상의 힘을 가진 민중의 위력 앞에서 돌 하나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마침내 무너지고 말 것이다. 2009년, 우리가 이룩해야 할 목표가 너무나도 분명치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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