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사회에 있어서 한반도 지역의 연안 지역 거주자들에 대하여 왜(倭)라고 불렀다는 것은 여러 사서들에 의해 검증되고 있습니다. 사서들을 통하여 후한시대(25~220)의 왜인(倭人)의 개념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논형(論衡)』입니다. 『논형』은 중국 후한(後漢)의 사상가 왕충(王充)의 저서로 현재 85편이 남아 있는데 유교의 여러 학설에 대하여 실증적이고 합리적인 비판을 가한 책입니다. 특히 한(漢)나라 때 유학 속에 숨어있는 허망성(虛妄性)이나 미신적 사상을 배격하고 실증주의의 입장에서 오로지 '진실'을 규명하려고 한 책입니다. 이런 점에서 희귀한 책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논형』에서 "주나라 때 천하가 태평하여 월상(越裳)에서는 하얀꿩[白雉]을 헌상하고 왜인들은 활집을 특산물로 바쳤다."라고 합니다.8) 왜인들이 특이하게도 활집을 헌상하고 있군요. 원래 활이나 활집은 숙신의 특허물이 아닙니까? 더구나 이 기록에서 왜인이 일본이면 완전히 이해가 안되죠? 주나라의 수도가 호경(鎬京)으로 현재의 시안(西安)입니다. 일본에서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왜 = 일본'은 명백히 아니죠.
▲ [그림 ③] 은나라와 주나라와 한나라의 영역 |
『후한서(後漢書)』에는 AD 178년 경에 텡스퀘이[? 단석괴(檀石槐)]가 큰 호수에 물고기가 많은 것을 보았는데 고기를 잡을 줄 아는 자들이 없던 차에 왜인들이 어로에 능한 것을 알고 왜인국을 공격하여 이들을 잡아와 물에 배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9) 그리고 같은 책에 AD 57년경 "중원 2년 동이 왜로국왕이 사신을 보내어 헌상하였다."고 하면서 그 주석에 "왜는 대방의 동남쪽의 큰 바다 가운데 있으며 산과 섬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루었다."고 합니다.10) 같은 책에 AD 57년 경 왜로국에서 조공하러 예방하였다고 합니다.11) 대방은 만주 요동 지역이거나 황해도에 나타난 지명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왜인, 왜로국 등에 대해서 오늘날 열도(일본)와 결부시킨다는 것도 이제는 무리라는 것을 알겠죠? 이제는 "바다 가운데"라는 말도 현대에서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도 아실테니까 말입니다.
▲ [그림 ④] 산동·요동 반도 |
제가 『대쥬신을 찾아서』에서 지적했듯이 이들은 한반도에서 산동·요동 반도 지역에 광범위하게 거주하는 연안민들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만주 지역에서도 널리 분포하면서 유목, 수렵 또는 어로에 종사하면서 뚜렷한 정치적 실체를 가지지 못한 광범위한 범쥬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倭)의 발음인 [와(wa)]는 물길(勿吉)의 발음인 [와지(waji)], 옥저(沃沮)의 발음인 [오쥐] 등과 만주어인 [와지] 즉 숲의 사람(동쪽의 사람)이라는 말과 의미나 발음이 동일하기 때문이지요.
『후한서』선비전에 나타나는 텡스퀘이 관련 왜인국에 대하여 일본의 후지이 시게오(藤井重雄) 교수는 만주 내부에 있는 예인(穢人)의 나라이지 현재의 일본 열도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봅니다. 즉 왜는 현대 한국인의 직접적 선조로 알려진 예맥(濊貊)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서에 나타나고 있는 예(穢)는 『삼국지』위서(魏書) 등에 나타나는 예전(濊傳)처럼 종족으로서의 예족(濊族)이 아니고, 한 나라 당시 동방의 제종족에 대한 총칭으로서의 예족을 뜻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12)
후지이 교수의 분석은 전적으로 타당합니다. 예(濊)라는 것은 만주한반도 일대의 민족을 통틀어서 일컫는다는 점뿐만 아니라 이 시기는 부여계의 이동이 본격화되기 전의 일이라 일본 열도와는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한다면 왜인이라는 개념은 북만주 일대에 광범위하게 거주하는 쥬신에 대한 욕설(비칭)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합니다.
그러면 예맥(濊貊)의 예(濊)도 욕설입니다만 왜(倭)는 어떨까요? 사실 예(濊)나 왜(倭)는 동쪽을 의미하는 좋은 말이지만 이것을 한자로 욕으로 표기한 것이 문제죠.
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 교수는 고대 초기의 사서들에 나타나는 왜인이라는 말은 열도가 아니라 남방의 멀리 떨어진 종족의 이름으로 멍청하고 둔한 종족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합니다.13) 이 분석은 일부 타당합니다. 현대 한국어로 말한다면 '촌놈', '물질하는 놈', '산골 놈', '핫바지' 등의 속어나 비칭에 가까운 표현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이노우에 교수가 근거로 제시한 책은 AD 100년 경에 편찬된 『설문해자(說文解字)』입니다.
『설문해자』에는 "왜라는 것은 순종을 잘하고 멍청하고 둔한[倭遲] 종족."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14) 송나라(960~1127) 때 『도화견문지(圖畵見聞志)』에는 "왜국은 일본국이다. 본래 왜라는 말은 매우 치욕스러운 이름이어서 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또 이 나라가 동쪽의 끝에 위치하고 있어서 그들 스스로 일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늘날 고려의 속국이다."라고 합니다.15) 이 가운데 고려의 속국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지만 왜라는 것이 비칭임을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려라는 것은 당시의 국명이므로 왜가 백제(반도부여)의 국가였다고 이해하면 이 기록은 틀린 기록이 아닙니다. 왜 요즘도 만주는 한국의 땅이었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만주에 있었던 것은 고구려, 금, 청이지 대한민국(ROK)이 아니지요.
더욱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삼국지』에는 왜인(倭人)이 한인(汗人)으로, 왜인국(倭人國)이 한국(汗國)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왜(倭)가 그대로 한국인들을 표현하는 명칭으로 사용된 것이죠. 즉 한국(韓國)이라는 말이나 환국(桓國), 칸국(汗國)이라는 말은 모두 '환하다(sunny, bright)'의 의미로 하늘을 상징하는 말로 서로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삼국지집해(三國志集解)』에서는 이 한(汗)이라는 글자는 오(汙)를 잘못 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와(汙)라는 글자는 그대로 와[wa] 또는 오[o]로 발음이 나기 때문에 왜인(倭 [wa])이라는 말 대신에 같은 소리가 나는 와(汙)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16) 다만 글자 자체로 왜(倭)는 순하다는 의미가 있지만 와(汙)는 더럽고 비루하다(dirty)는 의미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어차피 왜(倭), 와(汙), 한(汗)은 모두 음을 빌려서 쓴 말입니다. 의미는 물론 왜(倭), 와(汙)는 동쪽의 사람이라는 의미가 강하고 한(汗)은 정치적 지배자의 의미를 가지고 있겠죠.
이제 다시 광개토대왕비를 여기서 잠시 검토하고 넘어갑시다. 저는 이미 광개토대왕비 가운데에 "(영락 14년 : 404) 왜(倭)가 법도를 지키지 못하고 대방계를 침입하였다."라는 기록에서 여기서 말하는 왜라는 것은 일본 열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접근해 봅시다. 당시 열도에서 그 많은 군대를 전략에 따라 순식간에 파견할 형편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철 기술, 항해기술, 보급기술의 정비도 있을 리가 있었겠습니까?
특히 열도에서는 5세기 후반까지도 철을 거의 생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17) 이것은 그 동안의 분석과 같이 가야의 제철 기술이 열도로 쉽게 이전되지 않았고 열도 지역 또한 한반도 남부에 대한 지배권이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왜가 일본 열도에 국한된다면 고구려를 직접적으로 공격할 하등의 이유가 없고 또한 가야도 지역적 통합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고구려를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한국의 보수 사학계에서는 기록을 무시한 채 백제가 이를 주도했으며 백제를 중심으로 가야 왜 연합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했다는 식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18) 그러다보니 온갖 억측들이 난무합니다.
즉 한일고대사 전문가 김현구 교수에 따르면, 목만치(모꾸마치)는 적어도 문주왕을 모시고 남천하여 백제를 재건하는 475년까지 백제에 머물러 있었고, 목라근자(모꾸라곤시)가 가야 7국을 평정하여 그 아들인 목만치가 마지막으로 한반도에서 보이는 475년까지는 가야지역을 경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404년 광개토대왕비의 기록(왜가 대방계를 침입)은 백제가 왜를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했다는 것이죠.19) 목라근자 - 목만치가 임나지역의 실질적인 지배자이기 때문에 그 지역의 왜군 또는 일본에 청병(請兵)하여 고구려 공격에 동참(同參)시켰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없다는 점이고, 설령 사실이 그러하다면 "백제가 법도를 어겨 고구려를 공격했다"해야 하는데 왜 하필 왜(倭)를 지목하고 있는가 하는 점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죠. 광개토대왕의 비를 만드는 사람들이 백제인들 왜인들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특히 왜를 지목합니까?
모두 틀렸습니다. 이러한 분석들은 물론 일부 타당하지만 와[倭(왜)]라는 개념을 단순히 일본 지역에 국한시키고 있고 이것이 동이(東夷)와 같은 의미로 한국인들에 대한 비칭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는 점과 부여계의 역할을 도외시한 분석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열도지역 - 가야지역 - 백제(반도부여)의 강력한 연합전선이 수립되는 과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이것은 오히려 부여계의 포괄적인 이동 과정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앞서 지적한 대로 일본 측에서는 고구려의 침공에 대한 일본(왜)의 반격이라고 보고 있습니다.20) 나아가 이 견해는 에가미 나미오의 '왜한연합왕국설(倭韓聯合王國說)'의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부분에 대해서 기존의 반도(한국)의 보수 사학계에서의 답변은 궁색할 수밖에 없지요. 대충 백제와의 공동작전이 아니겠는가라는 식으로 얼버무리는 수준입니다. 한국의 사학자들은 "광개토대왕비에 나타나는 왜는 대부분 왜를 사칭하는 가야인이고 거기에 거주하는 왜인이 약간 섞여있을 뿐"이라는 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의 견해를 '긴 가뭄의 단비'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21) 한국사의 연구수준과 그 패러다임이 얼마나 부실한지를 보여주는 한 대목입니다.
결국 왜라는 말이 한국(汗國)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든, 와[wa]라는 소리가 나는 다른 한자를 사용하든 이 말은 물길(勿吉)을 의미하는 와지[waji]라고 말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은 동쪽 오랑캐라는 의미입니다.
당나라 때 편찬된 『통전(通典)』에는 왜면토국(倭面土國)으로 나오고 있고 당나라 때 편찬된 『북사(北史)』에서는 부노국(俘奴國)이라는 말이 나오지만 이 말이 왜로국과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 지 알기는 어렵습니다.
왜로국(왜노국)은 『후한서』·『수서(隋書)』·『북사(北史)』에도 나오고 있고 『구당서(舊唐書)』에서는 "왜국이라는 것은 과거의 왜로국이었다. 사면이 작은 섬들로 50여 개의 나라를 이루어 모두 부속되어있다."22) 라고 하여 왜로국과 왜국을 같은 말로 보고 있습니다.
『삼국지』에서는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으며 동서로 바다에 의해 한정되어있으며 남으로는 왜(倭)에 접하고 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23) 이 경우도 왜가 현재의 일본 열도를 가리키는 말은 아니죠. 특히 같은 책에 "(변진) 가운데 독로국(瀆盧國)이 왜와 접하고 있다."는 기록은 왜가 한반도 남부 해안 지역을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24) 이 부분은 이미 『대쥬신을 찾아서』를 통하여 상세히 고증하였습니다.
일본에서는 왜에 대한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 『삼국사기』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많이 해오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미시나아키히데(三品彰英) 교수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왜(倭)와 가야[伽倻(加羅)]에 관한 조항을 골라내 기사표를 작성하여 중요한 사실 몇 가지를 지적합니다.
역사적 사실의 측면에서 신라의 내물왕(356~402) 이후의 기사를 면밀히 검토하면, 내물왕부터 지증왕(智證王 : 500~514)까지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초에 이르는 백수십년 동안은 『삼국사기』에 왜인과의 전투기사가 높은 농도로 열거되어 있는 반면, 가야에 대한 기사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러다가 지증왕 때인 6세기에 들어서면, 이제까지 빈번하게 보이던 왜인 관계 기사는 전혀 보이지 않게 되고, 그 대신 가야(伽倻) 관계 기사가 나타납니다. 이 시기는 열도의 경우에는 게이타이(繼體) 천황 무렵입니다.25)
이 부분에 대하여 일본의 학계에서는 왜의 세력이 한반도에서부터 이탈하기 시작하고 가야제국들이 스스로 독립하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습니다.26)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단견으로 가야와 왜 관계를 지나치게 분리시킴으로써 발생한 오류입니다.
왜냐하면 신라가 관계를 가진 왜나 가야는 지역적으로 동일합니다. 그런데 6세기 초에 일순간 그 많았던 왜의 침입이 완전히 소멸되었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죠. 이들이 일시적으로 모두 증발해야만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다만 가야의 세력 범위는 매우 광범위하여 가야계 내부에서도 많은 갈등들이 있었고 특히 가야의 마이너 그룹은 바로 왜(倭)의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부여가 예맥에서 분리되어 부여·예맥이 되듯이 왜에서 정치적으로 안정적인 세력이 나타나면 왜·가야로 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앞서 보았듯이 왜(倭)는 열도만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구당서』에서는 왜국전(倭國傳)과 일본전(日本傳)을 각각 구별하여 실었고, 일본을 과거의 왜로국(倭奴國)이라고도 합니다. 8~9세기의 『구당서』·『신당서』에 나타난 한족(漢族)들의 일본관이 일본을 왜와 완전히 동일한 것이라고는 보고 있지 않은 점,27) 다시 말해서 일본은 본래 왜와는 다른 세력이었다고 보고 있다는 점에서 왜가 갑자기 가야로 대체된 것을 일본 열도와 연관시킨다는 것은 명백히 오류입니다.
이와 같이 일본의 경우에는 위의 여러 기록을 토대로 고대에는 왜가 한반도 남부 지역에 거주했다가 고구려의 압박과 신라의 성장으로 인하여 열도로 퇴거(退去)하였다는 식의 주장이 널리 퍼져있는데 이것은 명맥히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왜라는 말 자체가 쥬신 즉 한국인들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의 사료들로만 봐도 왜인이 열도에서 한국에 진출해있다가 일본으로 간 것이 아니고 그저 한국인들이 일본열도로 건너간 것입니다.
어떻든 일본 학계의 논리가 이와 같으니, 이로 인하여 임나일본부설이 반도와 열도 사이에서 '뜨거운 감자'가 되어온 것입니다. 초기에는 임나일본부가 야마토 왕조에서 한반도 남부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인식하였다가 김석형 선생의 강력한 반론에 부딪히면서 다소 약화되었고, 그래서 임나일본부란, 정치적 기관·기구가 아니라 사자(使者)라는 의미이며, 실체는 왜왕권이 파견한 관(官)이라는 견해28) , 6세기 전반의 게이타이(繼體) 시대에 성립한 것으로 가야 제국이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가야 제국의 왕과 일본부 관인의 일종의 합의체라는 견해29) 등이 나타납니다.
일본 사학계의 초기 논리의 문제점은 임나일본부를 왜왕권의 외교기관이나 가야 제국을 통제·지배한 기관으로만 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일본서기』의 기록도 모순입니다. 예를 들면 『일본서기』 킨메이(欽明) 2년, 5년조의 이른바 '임나 부흥 회의'를 보면, 백제왕이 '제왜신'과 가야 제국의 사자·대표를 소집하여 남가라·금관가야의 부흥책에 관해 협의하고 있는데, 이 회의에서는 ① 백제왕이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점, ② '제왜신'이 왜왕권의 외교권을 체현(體現)하고 있지 않은 점, ③ '제왜신(諸倭臣)'과 '임나'의 제한기(諸旱岐)가 백제왕을 통해 왜왕의 의지·명령을 전달받고 있는 점 등이 위의 논리로는 해명할 수가 없죠.30)
스즈끼 히데오(鈴木英夫) 교수는 '임나 부흥 회의'는 백제가 가야연합을 주재하는 입장, 즉 '맹주'의 지위를 계승하여 소집한 것으로 생각되고 백제왕은 531년 이후에 가야 제국 내에 군관을 파견하여 군사지배를 실현함과 동시에, 본래 가야연합의 합의 무대였던 것을 백제의 가야지배를 위한 하나의 기구로서 존속·재편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대체로 타당한 것으로 보입니다.31)
전체적으로는 최근 일본 학계에서는 ① 왜 왕권의 가야 제국에 대한 영토적, 직할지적 지배라는 존재는 부정하고, ② 왜왕권의 행정기관도 아니며, ③ 임나일본부'의 구성도 가야의 재지호족(在地豪族)으로 보는 설이나 왜왕권의 관인으로 보는 설, 혹은 그 중간적 견해로서 양자의 합의체로 보는 설 등의 차이는 남아 있지만, 모두 가야 재지세력의 주체성·자립성을 중시하려는 연구의 경향이 있으며, ④ 임나일본부'의 성립시기에 대해서도 6세기 초의 가야·백제·신라와 왜왕권의 정치적 관계에서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32)
이에 대하여 한국의 학계에서는 '임나일본부'는 백제가 가야 통치를 위해 설치한 기관일 가능성이 있고 이에 따라 『일본서기』가 왜곡 편찬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33), '임나일본부'란 백제가 가야지역 통치를 위해 설치한 기관인데 『일본서기』가 마치 왜왕권의 기관인 양 왜곡 편찬하였고 일본부를 구성한 왜인은 백제로부터 임명된 관인(官人)·용병(傭兵)이며 모두 백제의 통제 아래 있었다는 견해34) 등이 있습니다.
그 동안의 연구에 따르면, '일본부'는 6세기 당시에 실제로 사용된 말은 아닙니다. 『석일본기(釋日本紀)』는 '일본부'에 대하여 '왜재(倭宰 : 야마토노미코토모찌 ; ヤマトノミコトモチ)라는 주를 달고 있는데 당시의 호칭은 '재안라제왜신(在安羅諸倭臣)'35)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즉 안라 지역에 있는 모든 왜국 신하들이라는 의미죠. 일본부의 실체는 왜 왕권에서 파견된 관료[官人]·사신[使者] 내지는 그들의 집단으로 일정한 군사적 기능을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36)
531년 반도부여(백제)는 안라를 제압하고 가야의 제 지역에 대한 군사지배를 확립하였는데 여기서 반도부여와 가야의 관계는 고구려·신라의 경우와 유사한 관계로 볼 수 있습니다. 즉 백제는 가야의 외교권을 흡수함과 동시에 이 지역에 병력을 파견하여 가야연합의 '맹주'로서 이들을 주재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37)
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 교수는 중국·조선 사서의 왜(倭) 관련 기사(記事)들을 검토하여 왜가 가야의 별칭이라는 결론을 도출해내고, '임나일본부'란 가야의 재지호족(在地豪族)으로 구성된 합의체로서, 왜 왕권뿐만 아니라 일본열도의 세력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합니다.38) 이노우에 교수의 견해는 왜에 대한 개념을 가장 정확하게 도출하고 있지만 열도와는 완전히 무관하게 보는 것도 타당한 견해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열도부여와 반도부여는 하나의 연합국가 또는 부여의 분국이기 때문에 서로 무관한 듯이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지요.
이노우에 교수는 왜는 가야[加羅] 제국(諸國)의 총칭이며 "후한(後漢)에서 진대(晋代)에 이르기까지는 남조선(南朝鮮)의 왜가 일본열도의 왜인보다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보는 편이 온당할 것이다."39)라는 지적은 매우 합리적이고 타당합니다.
다만 일본 학자들은 전체 쥬신의 범주에서 왜라는 말을 고려하지 못하고 있으며 일본에 관하여 지나치게 차별화된 인식이 범주에 있기 때문에 대쥬신의 실체를 보지 못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즉 왜는 요동, 만주, 산동 등지로 확장될 수 있는 개념이며 범한국인의 이름이었다는 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왜(倭)는 일반적으로 동이(東夷)를 가리키는 여러 용어들 가운데 하나로 한국인들의 별칭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왜는 가야[加羅] 제국(諸國)의 총칭이지만 『후한서』등의 중국 사서에 나타나는 것은 주로 동이(東夷) 가운데 해안과 관련된 사람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용어는 만주지역 한국인들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왜는 일본(日本)이라는 형태로 굳어집니다. 왜(倭)라는 말이 일본의 중심 지역인 현재의 오사카 - 교토 지역에 나타난 것은 최소 5세기 이후로 그 이전 기록들은 주로 만주 - 한반도 등지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왜라는 말은 한국인들을 비하하여 부르는 말이고 일본열도는 많은 한국인들이 이동해갔음을 알 수 있는 것이죠.
필자 주
(8) "周時 天下太平 越裳獻白雉 倭人貢鬯"(『論衡』第 8 儒增篇). 이것은 『논형』의 다른 부분(恢國篇)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9) "光和元年冬, 又寇酒泉, 緣邊莫不被毒. 種眾日多, 田畜射獵不足給食, 檀石槐乃自徇行, 見烏侯秦水廣從數百里, 水停不流, [二]其中有魚, 不能得之. 聞倭人善網捕, 於是東擊倭人國, 得千餘家, 徙置秦水上, 令捕魚以助糧食." (『後漢書』卷 80 列傳 鮮卑傳)
(10) "(中元) 二年春正月 辛未, 初立北郊, 祀后土. 東夷倭奴國王遣使奉獻. [一]" 의 주석 "[一]倭在帶方東南大海中, 依山島為國. 淮陽王延、趙王盱皆來朝." (『後漢書』光武帝紀 第1 下 中元 二年)
(11) "建武中元二年, 倭奴國奉貢朝賀, 使人自稱大夫, 倭國之極南界也. 光武賜以印綬. 安帝永初元年, 倭國王帥升等獻生口百六十人, 願請見." (『後漢書』卷 85 東夷列傳 卷第75)
(12) 藤井重雄,「倭人管見 ― 論衡と後漢書烏桓鮮卑傳」(『新瀉大學敎育學部紀要』10-1)
(13) 井上秀雄「中國文獻における朝鮮·韓·倭について」『任那日本府と倭』(東出版 寧樂社 : 1978)
(14) "倭 順兒 從人倭聲 詩曰 周道倭遲"(『說文解字』)
(15) "倭國乃日本國也. 本名倭旣恥其名. 又自以在極東因號日本也. 今則臣屬高麗也"(郭若虛.『圖畵見聞志』 卷6. 高麗國)
(16) 이 글자는 현재는 잘 사용되지 않고 오(汚)라는 글자를 사용하고 있다.
(17) 藤尾愼一郞「彌生時代の鐵」, 穴澤義功 「日本古代の鐵生産」『第5回 歷博國際シンポジウム 古代東アジアにおける倭と伽耶の交流』(國立歷史民俗博物館 : 2002)
(18) 김현구 「6세기의 한일관계사」『한일역사 공동연구보고서 1』(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 2005) 373쪽.
(19)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창비 : 2007) 67쪽.
(20) 末松保和『任那興亡史』(1949) 75쪽.
(21) 김태식 「4세기의 한일관계사」『한일역사 공동연구보고서 1』(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 2005) 44쪽
(22) "倭國者 古倭奴國也 四面小島五十餘國 皆附屬焉"(『舊唐書』倭國傳 )
(23) "韓 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三國志』魏書 東夷傳 韓)
(24) 일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독로국의 소재지를 경상남도 거제도나 부산시 동래에 비정하고, 그것을 근거로 '접한다'라는 말을 바다 건너 일본 열도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학설은 잘못된 말이다.
(25) 이하는 三品彰英『日本書紀朝鮮關係記事考證』上卷
(26) 鬼頭淸明 「任那日本府の檢討」『日本古代國家の形成と東アジア』(校倉書房 : 1976)
(27) 鬼頭淸明, 앞의 책.
(28) 請田正幸 「六世紀前期の日朝關係 ―任那日本府を中心として」『朝鮮史硏究會論文集』11號.
(29) 大山誠一「所謂 '任那日本府'の成立について」『古代文化』260~263쪽.
(30) 鈴木英夫 「伽倻·百濟と倭 ― '任那日本府論」『朝鮮史硏究會論文集』24(朝鮮史硏究會, 1987)
(31) 鈴木英夫, 앞의 논문.
(32) 鈴木英夫, 앞의 논문.
(33) 천관우 「韓國史의 潮流」『韓』14,15,16호.
(34) 김현구 『大和政權의 對外關係硏究』
(35) 『日本書紀』欽明 15年 12月.
(36) 鈴木英夫 「伽倻·百濟と倭 ― '任那日本府論」『朝鮮史硏究會論文集』24(朝鮮史硏究會, 1987)
(37) 鈴木英夫, 앞의책.
(38) 井上秀雄 『任那日本府と倭』(寧樂社 : 1978)
(39) 井上秀雄, 앞의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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