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로써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한반도 정세에서 주변화됐던 한국이 '본의 아니게' 정세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현 정부의 대북 강경 자세로 볼 때 상황 관리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 이명박 대통령과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그들은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연합뉴스 |
美 '중유 중단'에 北 '불능화 속도 조절'
겉으로 보기엔 미국이 강경하다. 여전히 판세를 좌우하는 듯 보인다. 숀 매코맥 미 국무부 대변인은 12일 "북핵 검증 체제가 없으면 향후 대북 에너지 지원을 위한 중유 선적은 더 이상 진전되지 않을 것"이라며 북한을 제외하고 6자회담에 참가하고 있는 나머지 5개국도 대북 중유 제공 중단을 양해했다고 말했다.
전날엔 중유 지원 중단을 재검토하겠다고만 했는데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 아예 중단을 못 박아 버린 것이다. 지난주 6자회담의 목표였던 북핵 검증의정서 채택에 실패함에 따라 합의 위반 논란이 있더라도 북한을 응징하겠다는 강한 메시지로 읽혔다.
합의 위반 논란이 나오는 이유는 지난 12일 6자회담을 끝내며 중국이 발표한 의장성명 때문이다. 거기에는 "참가국들은 10.3합의에 기술된 대로 영변 핵시설의 불능화와 중유 100만 톤 상당의 경제·에너지 제공을 병렬적으로 이행하기로 합의했다"고 되어 있다. 이는 중유 제공이 불능화하고만 연계돼 있다는 기존의 합의를 재확인한 것으로 검증과 중유 지원은 아무 상관이 없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검증의정서 채택 불발을 이유로 중유 제공을 중단한다는 것은 판을 깨는 것도 불사하겠다는 뜻으로 비춰졌다. 이에 6자회담 북한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13일 중유가 중단된다면 불능화의 속도를 조절하겠다고 즉각 반발했다. 예상됐던 반응이었다.
미국의 방침이 현실화된다면 '중유 중단→불능화 속도 조절 후 중단→불능화 시설 원상복구→오바마 행정부 출범 후 3~4개월 간 장기 교착'까지 내달릴 수 있다. 북한의 2차 핵실험도 가능성 있는 옵션이다.
미국의 엄포는 '속 빈 강정'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나온다.
우선 미국은 자신들이 제공해야 할 중유 20만 톤을 이미 다 보냈다. 6자회담 합의에 따르면 미국과 러시아가 각각 중유 20만 톤을 지원하고, 한국과 중국은 각각 중유 20만 톤 상당의 발전설비 자재 등을 제공하기로 되어 있는데 의무를 다 이행한 나라는 미국 밖에 없다. 중단하고 말고 할 게 없는 것이다.
러시아는 중규 제공 중단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6자회담 수석대표인 알렉세이 보로다브킨 러시아 외무차관은 13일 "러시아는 6자 비핵화 합의에 따라 북한에 대한 연료 공급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리아 노보스티 통신>이 보도했다. 실제로 러시아는 이달 중 남은 5만 톤의 의무량을 모두 제공할 예정이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 외교부의 친강 대변인은 13일 "불능화와 경제·에너지 지원은 동시에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불능화만 계속되면 지원을 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중국은 남은 9만 톤 어치의 발전설비 자재가 다 생산되는 대로 북송할 방침이다.
이를 종합해 볼 때 검증의정서가 마련되지 않아 중유 제공을 중단하겠다는 미국의 강수(强手)는 '엄포성 빈말'에 불과하다. 자기들이 줄 건 다 줬고, 러시아와 중국의 입장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보로다브킨 러시아 외무차관은 '5개국도 중유 중단을 양해했다'는 미국의 발표에 대해 "놀랐다. 러시아는 결코 동의한 적이 없다"고 말해 중유 중단에 대한 컨센서스가 없음을 보여줬다. <연합뉴스>의 14일 보도에 따르면 한국의 외교 당국자도 "중유 중단에 5개국이 합의한 적은 없다. 신중히 검토해 나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 상황 관리 해낼 수 있나
한국이 '당분간' 한반도 정세의 열쇠를 쥐게 됐다는 것은 이같은 상황에서 비롯됐다. 미국, 중국, 러시아는 각자의 의무를 다 이행했거나 할 것이기 때문에 결국 중유 중단 여부는 한국에 달려 있고, 그에 따라 불능화 속도 조절 여부마저 좌우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5.5만 톤 어치의 의무량이 남아 있다.
아울러 한국은 6자회담 경제·에너지 지원 실무그룹의 의장국으로써 일본이 제공을 거부한 중유 20만 톤의 비용을 호주, 뉴질랜드 등 관심국가들로부터 모금하는 일을 주도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현재의 입장은 모호하다. <연합뉴스>와 인터뷰한 외교 당국자는 "신중히 검토할 것"이라며 이미 생산이 끝난 강관 3000톤에 대해서도 "지원 여부는 좀 더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6자회담 수석대표인 김숙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도 지난 11일 "에너지 지원 중단은 매우 민감한 문제로 모든 사항을 검토해서 결정해야 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 이명박 정부가 보여준 몇 가지 모습을 보면 지원 중단 쪽으로 기울어질 가능성은 적지 않다.
우선 검증의정서 채택에 에너지 지원을 연계하자는 아이디어 자체가 이명박 정부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같은 방침은 김숙 본부장이 8일 6자회담 개막 후 가진 브리핑에서 공개됐는데, 지난 10월 18일 안보 관계 장관회의에서 나온 이명박 대통령의 지시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특히 <자유아시아방송>(RFA)은 지난 9일 한국의 '검증-에너지 연계' 입장에 일본만 동조할 뿐 나머지 국가들은 조금씩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고 보도, 미국의 아이디어는 아님을 시사했다.
경제·에너지 지원 실무그룹 의장국으로서의 활동 의지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중유 중단 결정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중유 중단에 대해 미국과 러시아, 중국이 딴 소리를 하는 것도 의장국의 소극적인 태도에 기인한 것일 수 있다. "중유 지원 계속 여부는 각국이 알아서 판단하면 된다"는 외교 당국자의 말 속에는 의장국으로서의 책임감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태도라면 설령 한국분 5.5만 톤을 보낸다고 해도 최종 20만 톤 '국제모금'에 의장국으로서의 리더십을 발휘할 것 같지는 않다.
또한 "5개국도 중유 제공 중단을 양해했다"는 미국의 말을 이명박 정부가 '한국이라도 중단하라'는 사인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이 중유를 안 보내거나 별다른 이유 없이 지연시키는 등 '눈에 보이지 않는' 합의 위반 행위를 한다면 북핵 문제는 오바마 행정부가 전열을 정비할 때까지 정처 없이 표류할 수밖에 없다. 아무도 책임지려하지 않을 것이며, 상황이 악화되면 오바마 행정부의 북핵 해결 의지에 커다란 부담을 줄 수밖에 없다.
이명박 정부가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드러날 날이 멀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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