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생소하게 느껴지는 학문이긴 합니다. 우리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른 나라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지요. 다만 연구자들의 수가 우리보다 많다는 게 우리와 다른 점이지요."
정교수는 그래도 요즘 대학원생을 비롯한 젊은 학자들이 학문적으로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어 보람이 있다고 한다.
▲ 문명교류연구소를 연 정수일 교수. ⓒ프레시안 |
연구소 설립은 지난 2005년에 실크로드 여행 갔던 중앙아시아 답사팀들의 뜻에서 비롯되었다. 정교수와 함께 다녀온 여행에 감동을 받은 그들은 돌아온 즉시 실크로드 학교를 만들었다. 뭘 좀 알고 난 뒤에 길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답사를 위한 공부가 시작되었다. 실크로드 학교 5학기가 끝나는 동안 수강생들은 점점 늘어났다. 요즘은 80여명 정도의 학생들이 있다. 각계각층에서, 전국 각 지역에서 모여든 수강생들이 그에게서 역사와 문화, 지리를 배우고 그와 함께 실크로드를 다녀왔다. 매년 4회 정도 답사가 이뤄지는데 정소장은 올해 벌써 다섯 번이나 학생들과 함께 다녀왔다. 그가 앞장서 가는 실크로드에 동행하는 일은 참으로 귀한 경험일 것이다.
"매번 가는데 그때마다 재미있고 배우는 것도 많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이다 싶은 생각이 들지요."
메마른 길 위에 드리우는 낙타의 긴 그림자, 그 길에 끝에 다다르면 상인들은 온갖 진귀한 물품들을 부려 놓았을 것이다. 그 물건에 실려 온 먼 이역 땅의 냄새와 향기. 사람들은 가보지 못한 곳의 모습을 상상 속에서 그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 정수일 교수가 최초로 실크로드를 걸었을 때 그의 나이는 스물 한 살이었다. ⓒ프레시안 |
그가 우리에게 문명교류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지는 꽤 된다. 1984년부터 서울에서 살기시작하면서 박사 학위 논문으로 신라서역교류사를 내놓았다. 그리고 곧장 문명교류사라는 과목을 신설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사실 정소장 만큼 문명교류라는 학문을 진작부터 몸소 체험한 이도 없을 것이다. 중국 양자강에서부터 이집트 나일강에 까지 그 흐르는 물에 그는 젊은 날 벌써 발을 담궈 보았다.
최초로 실크로드를 걸었을 때 그는 스물 한 살이었다. 유학길에 나섰을 때였다.
"하하 옛날이지요. 그때 바닷길 실크로드였지요. 홍콩으로 가서 이집트까지 갔었지요. 제가 중국연변출신인데 1952년도에 대학에 입학하려고 북경 갈 때 처음 기차를 타봤습니다. 나흘간 기차로 갔지요. 북경대학 다니고 유학을 갔는데 홍콩에서 시작했지요. 그때 아직 중국과 홍콩은 외교관계가 없었었습니다. 북경에서 광주 가는데 양자강 철교가 다 끊어져서 청주에 가서 기차를 탔는데 그때 배에 기차를 실은 채 양자강을 건넜지요. 일주일 걸렸어요. 홍콩에서 비행기를 처음 타고 카라치 가서 40일 머물렀어요. 그때 인도 고대문명 유적들을 처음으로 접했지요."
생애 최초로 실크로드를 건너면서 그는 비로소 자기 안에 들어 있던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발견하였다. 당시 그가 속했던 북경대 동방학부는 외교관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학과였다. 그는 의문이 들었다. 국제관계사를 공부하면서 궁금했다.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는 과연 정치적 논리나 힘의 관계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일까? 그는 다르게 설명하고 싶었다. 전쟁, 외교, 힘의 논리가 아닌 게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그는 감지했다.
처음 보고 듣는 세상의 모습이, 서로 다르기만 할 것이라 믿었던 세계가 실상은 오래전부터 어울려 살아왔다는 사실을 그는 알아차렸던 것이다.
공부를 마친 후부터 그의 행로를 보면 그자신이 본격적으로 '교류'에 몸을 던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외교관이 된 그는 모로코 대사관에 근무하면서 알제리 전쟁을 지켜볼 수 있었다. 중국으로 돌아온 그는 뛰어난 인재로 인정받아 전도양양한 중국인으로 살 수 있었지만 그는 결국 고국을 택했다. 그가 평양행 국제열차에 몸을 실은 것이 1963년의 일이다. 평양 국제관계대학 및 평양외국어대학에서 가르치면서 11년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튀니지, 말레이 등 외국으로 나가 연구생활을 하며 십년 세월을 지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서울에 정착한 것은 1984년. 그리고 24년째 살고 있다.
▲ 정수일 교수와 권은정 전문 인터뷰어. ⓒ프레시안 |
이렇게만 말한다면 그가 남북한을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상당한 능력의 소유자인 듯 들릴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으로서 그러기 어렵다는 사실은 우리는 다 잘 알고 있다. 90년대 중반 어느 시기에 그는 국가 보안법위반으로 감옥으로 들어갔다가 특사를 받고 5년 만에 다시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 살기 위한 대가를 치르는 동안도 그의 관심은 한반도 역사 안에서 이뤄진 문명교류였다. 그는 우리의 대외관계, 교류사에 관심을 가지고 전반적인 공부를 했다. 교류의 주체로서 당시 우리 역사는 어떤 것이었을까? 특히 그는 다음 사실에 의문을 던졌다. '우리가 정말 동방에 위치한 조그만 나라, 폐쇄적이며 은둔하는 민족인가?' 정말 그랬을까? 자학적인 역사관이 정당한가? 우리역사 현실을 비교할수록 그의 결론은 확실했다.
"절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저는 절대라는 말을 감히 씁니다. 우리역사를 통시적이고 수직적으로만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나라 역사와 비교하면서 공시적이고 평면적으로 바라보았다면 우리 역사를 다르게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식민사관의 편향적인 주입식 역사관 때문입니다. 우리 역사는 폐쇄적이고, 은둔적인 게 아니었습니다. 개방적이고 수용적인 아주 자랑할 만 한 것입니다."
그는 연구소를 통해 이런 생각을 널리 퍼뜨릴 계획이다. '우리부터 알자'는 목표를 잡고 한 달에 두 번씩 모여 교류사를 학문적으로 연구해보자는 계획이 서있다. 앞으로 1년간, 세계인식에 관한 한국고전을 독해하면서 우리선조들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해왔는지 탐구해볼 작정이다. 사람들이 우리 안에 들어있는 '세계'를 선명하게 읽어내기를 그는 기대한다.
▲ "어느 민족이든 그 역사에 세계성이란 꼭 있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얼마나 잘 자각하고 구현해 내느냐인 것이죠."ⓒ프레시안 |
"어느 민족이든, 우리처럼 우수한 민족은 물론이고 후진국이나 틈바구니에 낀 작은 민족이라도 그 역사에 세계성이란 게 꼭 있기 마련입니다. 그 세계성을 외연적인 세계성(바깥에서 만나는 세계)과 내재적인 세계성(우리 속에 들어와 있는 세계)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것을 얼마나 잘 자각하고 구현해 내느냐, 그게 문제인 것이지요."
문명담론은 분명 우리 시대의 화두다. 우리는 다른 세계와 관계없이 살 수 없는 시대에 이르렀다. 그 다른 세계와 소통하기 위해 문명간 교류는 초석이며 근본일 것이다.
그는 문명교류 연구소의 활동을 통해 이 담론이 원활하게 진행되기를 기대하면서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문명학을 하나의 이론으로 정립하는 것이라고 밝힌다.
"전체 인류역사 5천년 과정을 한마디로 압축하자면 인류가 직면한 여러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방법을 찾는 것이라 할 수 있어요. 그 방도나 과정에는 여러 형태가 있어왔지만 토인비 같은 서구 지성인들은 전쟁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세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명이 필요하다고 설파했지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공분모가 문명입니다. 문명은 억지로 되는 게 아니에요. 문명이란 누가 뭐래도 좋으면 받아들이고, 나쁘면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세계가 직면한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기존의 문명충돌론이나 문명공존론이 합당하지 않다고 그는 지적한다.
"문명교류론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문명교류를 통해서 유니버설 보편문명, 모든 이가 공히 받아들일 수 있는 동서양의 보편문명을 도출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곧 진정한 세계화의 과정이 아닐까요?"
▲ "우리가 단일민족인가? 다른 민족에 호들갑떨지 말라." ⓒ프레시안 |
정소장은 그의 저서 <이슬람 문명>에서 우리 역사안의 세계성을 뚜렷하게 지목하면서 지금 우리 사회의 다문화주의에 일침을 가한다. 그는 '호들갑을 떤다'는 표현을 썼다.
"다른 민족이 우리 안에 들어온다고 당황하고 그러지요. 차별하고 멸시하고, 그러는데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미래 비전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탓입니다. 저는 항상 우리역사가 개방적이고 수용적이라고 말했습니다. 민족 문제 하나만 들더라도, 우리민족은 총 275개 성씨를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 귀화한 것이 136개입니다. 절반은 외국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고려시대에 귀화 성씨가 60개로 제일 많습니다. 신라시대가 40개. 가장 폐쇄적이라는 조선시대에 30개 성씨가 들어왔어요. 고려시대에 '내저불거: 오는 사람은 거절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다 받아들인다는 뜻이지요. 자신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얼마나 잘 용해했습니까? 우리는 단일민족이라고 믿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 인구 4000만 중에 100만이 외국인이라고 할 때, 그 비중이 얼마 되겠어요? 굉장한 변화라고 할수 없으니 호들갑 떨지 말라는 것이지요."
일흔 중반을 넘긴 나이지만 연구와 답사에 대한 열정으로 그는 전혀 지쳐 보이지 않는다. 12월과 1월에 답사가 연이어 예정되어 있고 하면서 강의 스케줄도 빡빡하다. 곧 있을 외교통상부와 한국문화예술부위원회 공동주최로 열리는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축제 개막 기조강연을 준비하며 그는 흥이 나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과 최한기의 지구전요에 나온 중앙아시아에 관한 기록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 "이미 우리 선조는 중앙아시아의 존재를 1600년대 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프레시안 |
1600년대에 쓰여진 우리의 세계백과사전에 있는 내용이었다. 그동안 우리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 동방의 작은 나라, 은둔적이며 닫힌 나라'의 후손일 뿐이었다. 정소장이 광활한 세상을 드나들었을 우리 선조들의 모습을 확실히 보여줄 것 같다.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실크로드' 교역의 덕을 입고 풍요로운 문화를 향유하며 살지만 실제로 먼 나라에 대해서는 무심하다. 저 너머에 사는 사람들이 이룬 것과 우리의 것이 잘 어울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 소장은 그의 존재를 다해 설명해왔다. 그동안 그를 밀고 오는 힘은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민족주의가 근본적인 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고루한 사람이라고들 하지요. 민족이란 속성은 연대의식, 발전지향성을 가지고 있지요. 민족주의는 하나의 생활 속에 존재하는 생태적 생활양식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민족주의는 개방과 교류와 대치개념이 아니에요. 꽃은 여러 가지가 잘 피어야 백화동산을 이룹니다. 개별문화, 개별문명이 다 잘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동북아하모니 그렇게 말하는데 그려지는 게 뭔가? 정확하게 말하는 이가 없습니다. 그런 환상을 가지지 말고 우리의 전통문화를 제대로 꽃피우는 게 중요합니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입니다. 이건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정소장은 그의 저서<이슬람문명>에서 고려속요 '쌍화점'을 고려시대 무슬림의 고려정착의 단면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쌍화점에 쌍화를 사러가니 회회 아비가 내 손목을 잡았다. 이 소문이 상점 밖으로 퍼진다면 조그마한 새끼광대인 네가 퍼뜨린 것인 줄 알리라.' 무슬림 고유의 빵인 상화(쌍화)를 사러간 고려여인과 무슬림 남성간의 로맨스를 그리는 노래다. 아득히 먼 고려시대의 노래 속에서 지금 우리보다 더 개명한 고려여인의 멋을 느낀다. 한국문명 교류연구소에 가서 우리 역사 안에 분명한 자취로 남은 찬란한 교류의 역사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걸음을 재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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