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한눈으로 보는 백제사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한눈으로 보는 백제사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35〉 곤지왕이 유라쿠 천황인 까닭 ①

제 12 장. 곤지왕이 유라쿠 천황인 까닭

들어가는 글 : 한눈으로 보는 백제사

다음은 『북사(北史)』의 「열전(列傳)」에 있는 백제(百濟)에 대한 기록입니다.1) 이 기록을 통해 전반적인 반도부여(백제)의 모습을 한번 그려보시고 오늘날의 반도쥬신(한국)의 모습과 비교하시기 바랍니다.

"백제는 원래는 까오리국(索離 = 高麗)에서 나왔는데2) , 대체로 마한(馬韓)의 속국이라고 한다. 까오리국의 왕이 외출을 다녀왔는데, 그 시중을 드는 아이가 임신을 하였다. 왕이 돌아와 죽이려 하니, 그 아이가 말하길, '언젠가 하늘을 보았는데, 위에서 큰 계란같은 기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운이 제게 내려와 아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왕은 그녀에 대해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그녀가 사내 아이를 낳았다. 왕이 그 사내 아이를 돼지우리에 두었으나 돼지가 죽이기는커녕 입기운으로 아이를 보호하여 죽지 않았다. 그래서 왕은 사내 아이를 다시 마굿간에 버려 두었으나 마찬가지였다. 왕이 이를 신비롭게 여겨 이 사내 아이를 기르도록 명을 내리고 이 아이의 이름을 '동명'이라고 하였다. 동명은 자라면서 활을 잘쏘았다. 그래서 왕은 동명의 용맹함을 두려워하여 다시 그를 죽이려 하였다. 이에 '동명'은 달아나 남쪽의 '아리수(淹滯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모두 다리를 만들어주었다. 동명은 이 다리를 타고 부여로 건너가 왕이 되었다.

동명의 후손 가운데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인정이 많고, 어질고 믿음이 있었다. 구태가 '대방'의 옛 땅에 나라를 세우고,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의 딸과 결혼하여 아내로 삼았고 이로 이 나라는 동이(東夷) 가운데서도 강국(强國)이 되었다. 처음 100 가(家)의 집으로 나라를 시작하여 '백제'라고 했다 한다.

이 나라의 동쪽은 신라이고 북쪽은 고구려에 접하며 서남쪽은 큰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소해(小海)의 남쪽에 위치한다. 이 나라는 동서로 사백오십리이고 남북이 구백여리이다. 그 도읍을 거발성(居拔城) 또는 고마성(固麻城)이라고 한다. 지역에는 오방(五方)이 있는데, 중방을 고사성(古沙城) 동방을 득안성(得安城) 남방을 구지하성(久知下城) 서방을 도선성(刀先城) 북방을 웅진성(熊津城)이라 한다. 왕의 성은 여씨(餘氏)이고 어라하[유로샤(? : 於羅瑕)]라 부르고 백성들은 왕을 건길지[쟌지즈(? : 鞬吉支)]라 부른다. 이 말은 하(夏)나라 말로 왕과 같은 것이다. 왕의 처는 어륙[유류(? : 於陸)]라 하는데, 하나라 말로는 왕비라는 것이다.

이 나라의 관직은 16품이 있다. 좌평(左平)이 5인으로 1품, 달솔(達率)이 13인으로 2품, 은솔(恩率)이 3품, 덕솔(德率)이 4품, 우솔(杅率)이 5품, 내솔(奈率)이 6품이다. 이상의 관리들은 관에 은과 꽃으로 장식을 한다.3)

▲ [그림 ①] 부여 옛지도(부여군청 자료)

도읍에는 1만가(萬家)가 있고, 이를 나누어 5부(五部)가 있는데, 상부·전부·중부·하부·후부이고, 부에는 5항(五巷)이 있어 선비들이 거처한다. 부에는 병사가 총 500명이다. 5방(五方)에는 각각 방령(方領)이 1명씩 있는데 달솔이 방령을 맡고 방령을 보좌하는 사람이 2명이다. 방에는 10개의 군(郡)이 있고, 군에는 장수가 3명이 있는데, 덕솔(德率)이 장수를 한다. 총 병사는 700명~1200명 이다. 성의 안과 밖의 백성은 작은성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이 나라의 백성들은 신라인·고구려인·왜인·중국인 등이 섞여 있었다. 그 음식과 의복은 고려(고구려)와 거의 비슷하고, 만일 제사지내거나 조알할 때는 그 관의 양쪽에 날개를 달았는데, 전쟁을 할 때는 이렇게 하지 않는다. 절을 하거나 위사람에게 아뢸 경우에는 양손을 땅에 대는 것으로 예를 삼는다. 부인은 화장을 하지 않고, 여자는 머리를 땋아 뒤로 드리우며, 결혼하면 곧 양쪽으로 드리우고, 판같은 것을 머리에 얻기도 한다. 옷은 겉옷으로 입는 도포와 비슷해서 소매가 작으나 통이 넓다. 병기는 활과 화살 칼과 창이 있다.

이 나라의 풍속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중히 여긴다. 뿐만 아니라 과거의 문장이나 역사도 즐겨읽는다. 학식이 뛰어난 사람들은 글을 짓거나 글놀이를 즐길 수 있고 여러 가지의 일에 능하다. 또한 의약과 거북점(蓍龜)을 칠 줄 알고, 상술(相術)이나 음양오행법(陰陽五行法)을 안다. 이 나라에는 승려와 비구니가 있고, 절과 탑이 많지만 (도교의) 도사는 없다. 이 나라의 악기로는 고각·공후·쟁우·호적이 있고, 투호·저포·농주·악삭등의 놀이가 있는데, 이 나라 사람들은 특히 바둑과 장기를 숭상한다.

▲ [그림 ②] 부여의 사계, 궁남지(부여군청 자료)

달력은 송나라의 원가력(元嘉曆)를 쓰는데, 음력으로 정월[寅月]을 설[歲首]로 삼는다. 나라의 세금은 베·명주·실·마·쌀 등으로 받는데, 그해의 수확 사정에 따라서 차등을 두어 걷는다. 나라의 형벌에는 반역을 도모하는 자, 전쟁에 나가서 명령을 따르지 않고 후퇴하는 군사, 살인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도둑질한 자는 훔친 물건의 두배로 갚게 한 후 쫓아 내고, 부인이 간음을 하면, 그 남편의 집의 노비로 삼는다. 혼인하는 예는 중국의 풍속과 같다. 부모나 남편이 죽으면, 3년상을 지내지만 그 나머지 친척들은 장례식이 끝나면 멈춘다. 이 나라의 밭은 물기가 많고 기후는 온난하여 사람들은 모두 산에 거처한다. 큰 밤이 생산되고 오곡·잡과·채소· 술 등의 반찬거리가 중국과 같은 것이 많다. 그렇지만 낙타·노새·당나귀·양· 거위와 오리 등은 없다.

이 나라에는 큰 성씨가 여덟 족이 있는데, 사씨(沙氏)·연씨(燕氏)·사씨(沙氏)·해씨(解氏)·진씨(眞氏)·국씨(國氏)·목씨(木氏)·묘씨(苗氏) 등이다. 이 나라 왕은 사계절의 각각 가운데 달(음력 2월, 5월, 8월, 11월)에 하늘과 오제(五帝)의 신에게 제사 지낸다. 이 나라의 시조인 구태(仇台)의 사당을 나라의 성에 세우고 해마다 4번 제사를 지낸다. 이 나라의 서남쪽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15개의 섬에 거주하고 있고 그 섬에는 모두 성읍(城邑)이 있다.

북위 연흥 2년(473년) 이 나라 왕 여경(餘慶 : 개로왕)이 처음으로 관군장군부마도위 불사후(弗斯侯), 장사 여례(餘禮), 용양장군 대방태수 사마 장무(張茂) 등을 보내어 국서를 올리고 통교하였다. 이 국서(북위 황제에 올리는 국서)에서 말하기를 다음과 같았다.

「신(臣)은 고려(고구려)와 함께 부여(夫餘)에서 나왔습니다. 오래 전에는 신의 나라와 고려는 돈독하고 우의가 깊었습니다. 그런데 고려의 조상인 '쇠(釗 : 고국원왕)'가 쉽게 오판하여 좋은 이웃을 깨부시기 위해 신의 나라 경계로 넘어왔는데, 신의 할아버지 수(須 : 근구수왕)가 번개같이 군사를 정돈하여 이끌고 가서 '쇠'의 머리를 베었습니다. 이로부터는 감히 신의 나라를 함부로 넘보지 못하고 북연(北燕)에게도 이리저리 시달려 도망다니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런데 이 나쁜 무리들이 점차 힘을 길러 일어나더니, 끝내 신의 나라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신의 나라는 이로 인하여 원망과 재난이 끊이질 않은 지가 어언 30여년입니다. 만일 천자께서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신다면, 신(臣)의 나라가 너무 떨어져 '먼 땅'이라고 무시하지 마시고 빨리 장수 하나를 보내어, 신의 나라를 구해주시옵서. 신이 어리석은 여자를 천자께 바치오니 후궁으로 삼으시고, 신의 자식과 동생을 함께 보내니 마굿간 지기를 시키시던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경진년 후에 신의 나라 서해 바다에 10여 구의 시체를 보았는데, 옷과 그릇, 안장과 재갈이 함께 있었습니다. 고려의 물건이 아니었고 소문을 들으니, 천자의 사신들이 신의 나라에 내려오던 중 큰 뱀이 길을 막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다는 또한 길이 험합니다. 이제 신이 당시 시신들과 함께 건져올린 말 안장을 증거로 올리겠습니다.」

이 국서를 읽은 북위의 황제는 그 먼 곳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국서와 예물을 바치러 오니, 그 정성이 갸륵하다고 하여 사신 소안(邵安)을 보내어 그 사신과 함께 돌아가게 하였다. 북위 황제의 조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보낸 글월을 읽고 별고가 없음을 알게되니 매우 기쁘다. 그대가 고려와 화목하지 않아, 침범을 당하는 일이 있었는데도, 순의(順義)와 인덕(仁德)으로 지키고자 하니 어찌 근심이 없겠는가. 이전에 짐이 사신을 보내었는데, 바다로 거친 외국땅으로 갔다. 짐이 보낸지가 몇 년이 지났는데도 가서 돌아오지 않으니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대가 보낸 물건(안장)을 자세히 살피고, 옛날에 타던 것과 비교해보니 우리의 물건이 아니었다.4) 그대가 고려를 이런 식으로 의심하면 안된다. 이 사건도 그대가 지나쳐서 생긴 문제이다. 다스림에 분별력이 필요하니, 고려와 화목하지 않고 갈라서려는 것을 버려야 한다. … 고려는 짐에게 먼저 조공하였고, 오래 전부터 천하의 일에 이바지 하고 있어, 고려가 옛날의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짐의 영을 거역하는 잘못을 하지 않았다. … 이제 여러 물건을 나누어 하사한다. 또 고려왕 련(璉 : 장수왕)에게 (짐의) 사신 소안(邵安) 등을 보호하며 (내려) 보내라는 말을 전하려고 고려에 이르렀는데, 련이 여경(餘慶 : 개로왕)과 옛날에 원수진 일이 있어 동쪽으로 못 지나가게 하였다. 사신 소안등이 모두 돌아오자, 이를 책망하였다. … … <중략> 」

이후 '진', '송', '제', '양'이 양쯔강 남쪽을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백제는 역시 사신을 보내어 스스로 제후국[藩國]이라 칭하면서, 국교를 수립하였고, 북위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조공하였다. … [이하 생략]"

이상의 『북사』의 기록을 보면 백제의 기원과 문화, 고구려와의 관계 등을 포괄적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위의 기록 가운데 "구태가 '대방'의 옛 땅에 나라를 세우고,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의 딸과 결혼하여 아내로 삼았고 이로 이 나라는 동이(東夷) 가운데서도 강국(强國)이 되었다."라는 말은 한강변의 백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만주 요동 지역의 백제를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요동 부여(또는 남부여)지요. 다시 한번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만 동이들 가운데서도 강국이라는 말은 한강변의 소국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태 - 공손도 연합 세력이 중원을 정벌할 정도의 세력을 형성했을 때를 의미합니다. 연왕(燕王) 공손도가 중원을 도모한 내용과 그 결말은 『삼국지』에 상세히 묘사되어있습니다.

다음으로 "(백제는) 대체로 마한(馬韓)의 속국"이라는 표현은 부여계가 한강으로 이동하기 이전의 상황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서는 마한의 속국이었던 한강변의 소국 백제와 부여계의 대국 백제(대방에서 건국하여 공손씨의 몰락과 함께 남하하여 소국 백제를 병합한 부여계의 반도부여)를 하나의 범주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북사』의 주석을 통해서 보면 색리(索離,), 고리(櫜離), 고리(高離), 고리(槁離), 고려(高麗) 등이 모두 같은 나라 즉 '까오리(Kaoli, Cauli, Khori, Korea 또는 Proto-Korea)'를 지칭하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쥬신의 역사를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 같은 말을 일괄적으로 고려류어(高麗類語)라고 합니다.

쥬신(한국인)을 지칭할 때는 주로 고려류어와 조선류어(朝鮮類語) 또는 숙신류어(肅愼類語)가 사용되어져 왔습니다. 고려류어는 『몽골비사』의 코리(Khori : 忽里 또는 高麗 : Proto-Korea), 『위략(魏略)』의 고리(槁離), 고리(槀離), 『삼국지(三國志)』의 고리(高離)와 기타의 다른 사서에 자주 나타나는 고리국(藁離國), 탁리(槖離 : 藁離를 잘못 옮겨쓴 것), 삭리(索離 : 藁離를 잘못 옮겨쓴 것), 고려(高麗), 구려(句麗), 고구려(高句麗 : KaoKhori : Old Korea) 등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朝鮮), 숙신(肅愼 : Sùshèn), 직신(稷愼 : Jìshèn), 제신(諸申 : Zhūshēn), 식신(息愼 : Xīshèn), 직신(稷愼 : Xīshēn), 여진(女眞 : Nüzhēn), 주신(珠申 : Zhushēn) 등을 조선류어(朝鮮類語) 또는 숙신류어(肅愼類語)라고 합니다. 다만 조선류어가 고려류어보다는 좀더 포괄적으로 사용되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이 『북사』의 기록에 나타난 백제의 지방제도의 모습은 아마도 성왕(523~554) 이후의 백제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백제의 지방제도가 제대로 개편되고 중앙정부의 힘이 골고루 미친 때가 바로 성왕 때였기 때문입니다. 성왕은 538년 협소한 웅진(熊津 : 충남 공주)으로부터 광활한 사비성(泗沘城 : 충남 부여)으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고쳤습니다. 그리고 통치제도를 정비하였는데 대체로 중앙의 22부(部), 지방의 5부(部)·5방(方) 제도를 이때 실시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합니다.

▲ [그림 ③] 부여 주요 지역(부여군청자료 재구성)

그리고 위에 나타난 개로왕의 국서를 보면, 북위와 고구려의 관계가 북위와 백제의 관계보다 훨씬 더 돈독하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나아가 북위가 북위의 사신을 고구려가 통과하지 못하게 한 조치에 대해서도 규제할 수 없는 상태인 점을 감안해보면, 고구려의 세력이 북위의 세력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정도라는 점도 알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장수왕이 백제의 개로왕에 대해 원수지간으로 간주하는 점을 봐서 양국의 갈등이 매우 심각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앞 장에서 이미 살펴보았지만, 곤지왕이 일본으로 간 문제를 한번 더 짚고 넘어갑시다. 일찍부터 반도와 열도의 사학계는 곤지왕의 임무가 청병사(請兵使)라는 것을 지적하였습니다.5) 일본 학계의 일반적 견해는 곤지의 파견은 대고구려 전선에 왜병을 투입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6) 그러나 이재석 선생은 곤지왕을 단순 청병사로 보기 힘든 이유로 청병사라면 곤지왕이 장기 체류할 필요가 없으며, 곤지왕이 일본으로 간 후에도 왜의 군사적 도움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정재윤 선생은 단순한 청병사설을 비판하고 백제계통의 이주민 집단을 조직화하여 왜정권에 협력하고 이들의 힘을 이용하여 백제를 구원하려는 임무를 수행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장기 체류가 그 이유임을 지적합니다. 즉 곤지왕이 단순청병사라면 장기체류가 불필요하기 때문이죠.7) 저도 앞서 지적하였듯이 곤지왕이 청병사로서 실질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볼만한 물증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곤지왕의 도일(渡日) 문제에 대해 연민수 선생은 개로왕이 왕권의 안정을 위해 세력이 강한 제2인자인 곤지왕을 국내정치에서 제거하기 위해 일본에 보냈다는 견해를 제기하기도 했는데 이는 지나친 견해로 생각됩니다.8) 당시 백제는 광개토대왕 이후 고구려의 침공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는 절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집안 싸움을 할 단계로 보기는 어려울 때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보시겠지만 곤지왕은 개로왕의 아들로 봐야하기 때문에 이 견해는 옳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개로왕이 보낸 국서에서 백제가 고구려로 인하여 "원망과 재난이 끊이질 않은 지가 어언 30여년입니다."라고 하는 점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이재석 선생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종합하여 곤지왕이 양국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그 결속 과시의 효과와 나제동맹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9) , 나아가 왜국 조정의 동태에 대한 감시를 위해 일본으로 갔다고 합니다.10)

그러나 지금까지의 분석만을 토대로 봐도, 이상의 견해들은 곤지왕이 일본으로 간 정확한 사정과 동기를 제대로 파악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 점들을 이제 왜왕의 관점에서 보다 본격적으로 분석해 보도록 합시다.

필자 주

(1) 당(唐)나라의 이연수(李延壽)가 편찬한 역사서로, 북위(北魏), 서위(西魏), 동위(東魏), 북주(北周), 북제(北齊), 수(隋) 등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북조(北朝)의 여섯 왕조의 역사를 기술한 것이다.
(2) 『북사』의 이 부분 주석에는 "出自索離國 梁書卷五四高句麗傳「索離」作「櫜離」, 三國志卷三0夫餘傳註引魏略作「高離」(殿本作「槁離」), 隋書卷八一百濟傳作「高麗」. 按「櫜」音「高」. 「索」當是「櫜」之訛. 「櫜離」即「高麗」也. "과 같은 말이 있어 索離, 櫜離, 高離, 槁離, 高麗 등이 모두 같은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 "장덕(將德)이 7품으로 자주색 띠를 두르고, 시덕(施德)이 8품으로 검정색 띠를 두르고, 고덕(固德)은 9품으로 붉은띠, 계덕(季德)은 10품으로 청색띠, 대덕(對德)은 11품, 문독(文督)은 12품으로 모두 노랑띠, 무독(武督)은 13품, 좌군(佐軍)은 14품, 진무(振武)는 15품, 극우(剋虞)는 16품으로 모두 백색띠를 두른다. 은솔이하로는 관직이 수효가 없다. 각각 부사(部司)가 있어서 업무들을 분장하여 일을 맡는다. 내관(內官)에는 전내부·곡내부·내경부·왜경부·마부·도부·공덕부·낙부·목부·법부·후궁부가 있다. 외관에는 사군부·사도부·사공부·사구부·점구부·객부·외사부·주부·일관부·시부가 있다. 근무는 길어도 3년에 한번씩 교대한다."(『북사』같은 책)
(4) 원문에는 중국(中國)이라고 표시되어있다. 이 때의 중국은 한족(漢族)의 중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명사로서 세상의 중심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중국이라는 말이다.
(5) 이도학 「漢城末 熊津時代 百濟王位繼承과 王權의 性格」『한국사 연구 50, 51』(1985), 양기석 「三國時代 人質의 性格에 대하여」『史學志 15 』(1981) 55~56쪽, 등
(6) 鈴木靖民 「東アジア 諸民族の國家形成と大和王權」 『講座日本歷史 1』 (東京大學出版會 : 1984) 206쪽.
(7) 정재윤「동성왕의 즉위와 정국 운영」『한국고대사 연구 20(2000)』29~30쪽.
(8) 연민수 「5世紀後半 百濟와 倭國;昆支의 행적과 東城王의 卽位 事情을 중심으로」『日本學 13(1994)』東國大學校日本學硏究所 283~315쪽.
(9) 즉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해야하는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독립하려고 하는 신라와 왜가 충돌하면 최대의 피해자가 백제이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해 왜를 설득하러 갔다는 것이다. 정운용 「나제동맹기 신라와 백제 관계」『백산학보 46(1996)』90~104쪽.
(10) 이재석 「5세기말 昆支의 渡倭 시점과 동기에 대한 재검토」『백제문화 제30집』(2001. 12) 公州大學校百濟文化硏究所.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